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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설명
불국사의 예배 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 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 아치 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를 번호순으로 소개하다 보니 칠보교 및 연화교(국보 제22호)를 먼저 소개하고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제23호)를 나중 소개하게 되었다. 불국사에 들어서면 청운교 백운교를 먼저 만나게 되고, 대웅전에 오르는 다리이자 계단으로 원래 규모가 더 크고 아름다운 청운교 백운교이며 칠보교 연화교는 상대적으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데다 대웅전 옆에 있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다리이자 계단이기에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를 동시에 오를 수는 없으니 관습적으로는 대부분이 청운교 백운교를 많이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국보 소개를 번호순으로 하다 보니 오른쪽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 보다 그 왼쪽에 있는 칠보교 연화교를 먼저 소개한 것이다.
현재 학계를 비롯하여 문화재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는 국보 1호 남대문을 지난번 화재사건도 있었고, 복원 문화재를 국보 1호로 하기가 좀 그렇다면서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정하자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차제에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 번호를 아예 없애고 그저 국보와 보물 등으로만 분류하여 번호가 우열의 순서나 의미적 개념이 아님을 실천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현재 번호순으로 국보를 소개하고 있고, 또 나름대로 국보나 보물에 붙인 번호가 꼭 없애거나 바꾸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련 분야에서 지혜를 모아 정해지는 것을 기다려본다. 그래도 답사기는 기존의 번호순으로 이어 나갈 생각이다.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
위쪽 16계단이 청운교, 아래쪽 18계단이 백운교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것은 계단인데 왜 ‘다리(橋)’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이곳 불국사에 들어와 대웅전 부처님을 뵈러 가는 과정이 때 묻고 속박으로 얼룩진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임을 상징하여 다리로 부르는 것이다. 즉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청운교 백운교 경사진 계단에 조심스럽게 올라서면 자하문을 들어서서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인데, 불경에 부처님 사는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고 구름 위를 지나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런 과정을 건축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청운교 백운교라는 것이다.
이 청운교 백운교는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으며,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아치)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靑雲橋)’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합니다.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로,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습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줍니다.
연화교 및 칠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다. 이러한 교리적인 의미와 해석도 중요하지만 불국사에 있어서 석조건축의 백미는 바로 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가공하는 신라인들의 기술도 놀랍지만 건축구조학적으로 크고 튼튼함은 물론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상호 연결과 어울림의 석조건축 기술은 오늘날 현대적 기법으로도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홍예문, 홍예교의 처음으로 불리는 청운교 백운교
무지개다리의 시작점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라고 하는데 참으로 볼수록 매력적이다. 어떻게 돌을 저렇게 둥글게 쌓아서 무지개처럼 구부린 후에 그 위에 계단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이론으로 수학적 공식풀이를 선행하고 돌을 다듬고 쌓아 올리는 건축 기법으로 구현한 홍예(아치)의 아름다움이라니….
저 아래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처음 설계한 사람의 진정한 의도가 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런데 대부분이 청운교와 백운교의 연결 부분에 있는 홍예만 기억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청운교 아랫부분에도 작지만 분명한 홍예 구조가 밑에서 받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하문(紫霞門)
청운교와 백운교에 올라서면 자하문이다. 자하문은 수미산의 정상에 해당되며, 중생을 보살피는 천신 제석천왕이 상주하는 곳이다. ‘붉을 자(紫)’, ‘안개 하(霞)’를 써서 붉은 안개가 서려 있는 문이란 뜻인데, 부처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 즉 자줏빛 금색이라고 하는데 이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린다는 뜻으로 부르는 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세계, 불국(佛國)이 펼쳐진다는 것이니 불국사의 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지(蓮池)
또한 붉은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번지는 것은 아침 햇살을 받아 구품연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럼 어디에 연못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못은 없다. 청운교, 백운교가 계단임에도 다리라고 부를 때는 분명 연못을 건너가는 구조일 텐데 그렇다면 청운교 백운교 아래는 연못이 아니었을까? 원래 불국사를 떠받든 거대한 석축 아래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있으니, 연못이 있었을 당시 이 주변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잔잔한 물이 고여 있는 길고 좁은 형태의 연못이 왼쪽으로는 칠보교와 연화교 아래로, 오른쪽으로는 청운교와 백운교 아래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주변에는 기화요초가 피어 있거나 수중에 연꽃이 기품 있는 자태로 떠 있거나…. 수구에는 쏟아지는 토함산 물줄기는 포말을 일으키며 햇빛을 반사하여 허공중에 무지개를 띄워 올리고, 그 빛남이 자하문까지 번져 올라 자주 금빛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는 이름 그대로의 광경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또한 길고 거대한 석축 위의 안양문과 자하문, 그리고 범영루와 경루가 물에 비쳐 마치 실루엣처럼 어른거리는 절경은 불국(佛國)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하였을 텐데 70년대 복원 시에 빠진 것이 못내 아쉽다.
그 옛날 불국사에 들어서면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대웅전을 보고 옆에 있는 극락전으로 가거나, 아니면 애초 칠보교 연화교를 올라 극락전을 본 후 옆에 있는 대웅전으로 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운교 백운교와 칠보교 연화교를 동시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왜 두 개의 다리 계단을 만들었을까? 청운교 백운교로 올라 앞마당에 석가탑, 다보탑을 만난 후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을 뵙고 관음전, 비로전을 돌아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뵈며 극락세계를 체험한 후에 칠보교 연화교로 내려오라는 의미이거나 또는 그 반대의 순서일까?
아무튼 속세와 불국토를 이어주는 청운교 백운교를 둘러보았다. 지금의 기법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보급 다리가 새삼 존경스럽다. 추후 여력을 비축하여 다리 아래 연못도 다시 되살려 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