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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굴뚝을 섬돌 밑으로 내어라. 그래서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쌀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는 사람에겐 밥 짓는 연기만 보여도 속상할 수 있느니…….” 위는 양식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 말로 구례 운조루(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오미리))를 지은 문화 류씨 류이주(1726~1797) 선생이 235년 전에 한 말이다. 굴뚝은 원래 불을 땔 때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든 구조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하늘을 올려다보게 굴뚝을 만드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굴뚝을 섬돌 밑으로 가게 하라니 이 무슨 말이던가? 요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가난한 이들의 쌀 한 톨까지 빼앗으려 안달한다. 재벌기업이 골목상권까지 모조리 휩쓸어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되어 결국은 나라에서 나서게까지 되었다. 이런 세태에 우리는 운조루 정신을 되새겨봄직하다.
▲ 아무나 퍼갈 수 있게 한 “타인능해” 쌀뒤주 굴뚝뿐만이 아니다. 운조루에는 아주 희귀한 쌀뒤주가 있는 데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뒤주가 그것이다. 이 뒤주는 말 그대로 양식이 떨어진 이들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 쌀을 퍼가라고 조그마한 쌀 구멍이 뒤주에 뚫려있다. 이것은 섬돌 밑의 굴뚝과 함께 운조루 종가의 “나눔정신”, “더불어 사는 정신”을 잘 나타내는 상징물인 것이다. 집안 대대로 며느리들이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매달 그믐날에 쌀 2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를 채우는 일이었다. 쌀이 없어 굶어야 하는 이웃을 위한 배려이다. 특히 가을걷이가 끝나 거둬들인 쌀의 20% 정도는 남을 위해 내놓았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소출의 대부분을 공출해갈 때 까지 이어졌다. 타인능해 쌀뒤주는 쌀을 퍼가는 이들이 주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안채가 아닌 사랑채의 헛간에 두었다. 섬세한 배려의 마음이다. 동학혁명,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겪어오면서도 이 집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 “더불어 사는”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 운조루 전경 안방마님으로 한세상을 곱게 사셨다면 무척 고왔을 자태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 되어 드문드문 찾아드는 방문객들이 내는 1천 원짜리 입장료 돈 몇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일상복 차림으로 운조루 대문에서 삭인 고추며, 봄나물을 파는 모습이 구례장터에서 흔히 만나는 이웃집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한국전쟁 무렵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종부는 60년간 운조루의 흥망을 몸소 겪었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둔 이길순 종부는 이십여 년 전 2살 터울인 남편을 여의고 81살의 노구로 운조루를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기자는 안타까워 물었다. 그런 종부의 말은 취재 내내 느낄 수 있었다. 흘깃 대문 안을 넘겨다보곤 “가자! 별것 없다.”라며 뒤돌아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나마 대문 안에 들어서 여기저기 핀 꽃들을 사진기에 담다가 시큰둥하게 대문을 나서는 모습의 관람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종가의 삶과 철학을 배울 요량이면 몰라도 그저 관광이 목적이라면 적어도 운조루는 올 일이 아니다. 종부는 조근조근 얘기해준다.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인데 정부나 구례군에서 지원이 없나요?” 요즘 한옥민박이 유행하고 있지만 운조루는 화장실이나 주방시설이 미비해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집안을 돌볼 형편이 아니었고 종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운조루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둘째와 막내아들을 불러 들였다고 했다. 이제 농사도 어려운데다 1천 원의 입장료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나물 몇 가지 팔아봤자 손에 쥐는 게 별로 없을 터 종부는 손수 담근 된장과 간장을 팔고 있었다. 마침 안채 마당에 서서 장독을 기웃거리던 한 손님이 된장을 파느냐고 하니까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이 운조루 종부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이길순 할머니가 된장을 꾹꾹 눌러 담고 있다. “아니 그렇게 꼭꼭 눌러 담아주시면 뭐 남는 게 있겠어요?” 기자가 물으니 원래 이곳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일제강점기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선의 풍수≫ 라는 책에 소개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당이었다.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이곳은 금구몰니(金龜沒泥), 금환낙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라고 한다. 금거북이가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모양새라는 금구몰니(金龜沒泥),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금환낙지(金環落地), 아래쪽에 다섯 가지 보석이 모여있다는 오보교취(五寶交聚)이다. 창건 당시의 이 집터에 대해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집터를 명당이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고 주변이 척박해서 그 누구도 집터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이 집을 지은 류이주가 알아보고 이 땅에 집을 짓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류이주는 본래 대구 사람인데 이 금환락지의 명당에 매료되어 은퇴하면 이곳에 대대로 살 터전을 만들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를 지었고 7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마무리를 했다. 집을 짓는 동안 류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공사를 마무리하고자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이곳에는 명당을 찾으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한 것에 따르면 1918년 70 집에 350명이었던 마을 사람이 4년 뒤 148 집에 무려 744명으로 불어났다. 또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될 때는 300여 집이 들어섰었는데 이제 남아 있는 집이 별로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집의 명당을 말하는 양택은 거의가 당대에 끝나고 그를 보완하려면 끝없는 나눔의 삶이 이루어져야 함을 그들은 지나쳤던 모양이다. 행랑채가 학의 날개처럼 좌우로 좌악 펼쳐진 집.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無心以出岫) 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倦飛而知還)”라는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시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왔다는 당호 “운조루”. 우리는 이곳에서 어떠한 삶이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특히 운조루는 사랑채에 남아있는 상량묵서에 영조 52년(1776년)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운조루가 지어질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가 있으며, 운조루의 5대 주인이었던 류제양(1846 ~ 1922)의 일기 “시언(是言)” 등 그림이나 문헌 기록이 잘 남아 있는 호남의 몇 안 되는 18세기 이전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아래 맷돌이 더 큰 남부지방 맷돌(왼쪽), 위아래 맷돌이 크기가 같은 중부지방 맷돌 운조루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안채 마당에서 특이한 민속 생활도구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맷돌인데 맷돌은 중부지방의 것과 남부지방의 것이 다르다. 중부지방은 위쪽 맷돌과 아래쪽 맷돌의 크기가 같아 맷돌 아래에 매함지나 매판을 깔고 쓰도록 되어 있지만 남부지방은 아래 맷돌이 더 커서 굳이 아래쪽에 매함지나 매판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곳 마당에는 두 가지 맷돌이 다 있었다. 집안의 규모로 보아 두 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지방에서 온 하인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어쨌든 서로 다른 지방의 민속품을 한 자리서 볼 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다. 전통한옥을 연구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운조루는 “ㅁ” 자 모양의 본채에 사랑채가 서쪽과 남쪽 방향으로 곁달린 경북 북부지방에 많이 보이는 형태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그저 절집에서 늘 보았던 풍경이 고즈넉하게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집에서 대대로 살았던 이들은 이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닦았음인가?
집안 곳곳에는 매화, 산수유, 명자꽃, 살구꽃이 고루 피어 있다. 온통 퍼지는 향내가 이 꽃들의 잔치인지 아니면 운조루 사람들의 내면의 향기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다. 돌아 나오면서 지리산에서 발원된 물이 모였다는 연못의 정취를 느껴본다. 하지만 아직 연꽃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다. 이곳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청할 수 있다면 도시 삶 속에서 켜켜이 쌓인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이웃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얻어갈 수도 있으련만 아직 민박을 할 여건이 못 된다니 아쉬운 마음뿐이다. 그저 운조루 뒷켠 대숲 바람소리만 귀담아 들어본다. 그리고 죄송스럽게도 운조루 종부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만 잠시 훔쳐갈 뿐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음인가? “운조루” 그대 있음에 나는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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