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풍경]
존 루이스 게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출판사: 에코 리브르
역사학과
20100618
박초이
역사학 입문
들어가기전 저자 존 루이스 개디스에 대하여
그는 오하이오 대학에서 석사교수와 현대사연구소 소장으로 28년간 재직한 후 옥스퍼드 대학의 함스워스 석사교수와 으스트먼 초빙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미국 국제관계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예일 대학 사학과의 석좌교수로 있다. 1973년 출간된 <미국과 냉정의 기원>으로 밴크로프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외 <러시아, 소련, 그리고 미국>, <봉쇄 전략>, <긴 평화>, <미국과 냉전의 종식>,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경이 , 안보, 그리고 미국의 경험>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조지 케넌의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있다. [역사의 풍경 표지 중 존 루이스 개디스의 프로필]
위의 프로필에서 알 수 있듯이 개디스는 현대사가와 동시에 냉전사가이다. 개디스 교수가 책을 쓴 많은 동기들 중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학생들의 '교육'에 관한 것이다. 그가 '냉전의 역사'를 집필하게 된 이유를 밝혔는데 그것이 바로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냉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때마다 제기하는 의문에 응하기 위해서라는 점'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역사의풍경'을 집필한 이유와 유사하다. 그는 서문에서 밝혔듯이 학생들에게 더 풍부한 교육을 위하여 풍부학 역사방법론적 서적을 남기기 위함이라 말하였다. 개디스 교수는 누구보다도 올바른 역사의 교육과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역사학의 발전을 바라고 있다.
'역사의 풍경'을 읽고...
냉전사의 수장이자 대표적인 현대사가 중 한 사람인 존 루이스 개디스의 [역사의 풍경]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으로 시작된다. 검은 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지팡이를 든 채 높은 바위 위에서 짙은 안개 속에 솟아있는 바위, 숲, 산, 들판,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카스파르의 그림과 그가 생각하는 역사가의 모습과 ‘같다’고 표현하려 한다. 그 이 유는 첫째, 방랑자는 짙은 안개로 뒤덮여 어느 하나 확고한 경계선 하나 없는 풍경과 둘째, 광대한 자연에 압도당하는 방랑자의 모습을 역사와 역사가의 지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이 그림처럼 처음엔 어떠한 경계선 없이 어지럽게 마치 짙은 안개 속에 숨어 부분적인 모습만 보인 체 역사가들을 맞이한다. 역사가는 잠시 그 매력적인 정보 속에 흥분과 재미를 느끼겠지만 곧 광범위한 범위와 광대한 자료들 속에 압도당하는 작은 모습까지 보여준다. 개디스는 그 후 ‘묘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저자가 역사가가 역사에 전통적으로 접근하려던 방식이었던 ‘해석’에서 발전하여 ‘묘사’라는 단어로 역사가 자연 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과 유용하다는 것을 표현하려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 블로크와 E. H 카의 역사 입문서적을 읽고 특히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의 내용을 확대하고 좀 더 세밀하면서도 업데이트된 정보와 지식들로 구성 되어있다. 개디스의 주장과 목적은 뚜렷하게 각 장마다 나타나있으며 전체적으로 수많은 은유를 상대로 역사가가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많은 다른 학문적 지식들을 동원해 보충 설명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과학적 전문 지식들과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저자는 위트 있는 예문과 은유를 통해 나의 이해를 도와주려 노력했다.
책은 역사와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우선 역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고로 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을 역사에 의존하여 배우고 터득한다. 그의 예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들 수 있다. 군주론은 역사적 경험의 압축임으로 후대를 위하여 정보를 간결하고 사용 가능한 형태로 포장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과거를 공부한다는 자체가 미래를 예측하는 지도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역사가가 역사를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다음 세대에게 정보와 지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더불어 때때로 역사가는 제약 즉 ‘대상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적인 묘사를 선택하는데 예술가와는 달리 역사가는 과거에 존재 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의 위치를 바꾼다거나 빛을 조정함으로써 역사를 왜곡 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역사가들의 고충을 느끼게 해준다. 적당한 상상력은 필요하지만 그에 반에 지나친 상상력은 올바른 역사 이해를 방해하고 이해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과 자기 확신의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는 역사가가 갖고 있는 중요한 3가지 능력을 잘 활용하여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고 개디스는 말한다. 이 3가지 능력이란 ‘선별성’, ‘동시성’ 그리고 ‘규모’인데, 어떤 한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대한 역사가의 선별성, 그리고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좀더 중요하게는 ‘비교’할 수 있는 동시성과 마지막으로 미시적 에서 거시적으로 거시적 에서 미시적으로 규모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이동하여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역사가는 역사를 ‘묘사’할 때 이러한 능력을 가능케 하기위하여 넓은 시야확보가 필요하다. 다시 돌아가 만약 방랑자가 묘사하는 것이 광대한 자연이라면 역사가는 역사를 묘사 하는 것이고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신 경험할 수 있게 함으로 역사가의 넓은 시야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 올라타 이전엔 이해하기 힘들었던 피카소의 그림들이 하늘에서 땅을 보았을 때 어지럽게 엉켜있는 ‘큐비즘’의 선들을 보고 알았을 때 즉, ‘실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제공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넓은 시야를 확보’ 하였을 때 좀더 납득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묘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 있는 역사 ‘묘사’이다. 다른 학문과 달리 이러한 이점을 갖고 있는 것이 역사학임으로 우리가 지금 현재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 이러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넓은 시야와 함께 최대한 역사가로서의 자세한 ‘묘사를’이끌어내야 한다.
개디스는 좀더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과학적 그리고 지도학적 접근이다. 그 이유는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이성적인 의견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역사는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과학보다는 실험실 밖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반복가능성’ 예를 들어 지질학자나 고생물학자와 유사하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남아 있는 것들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받아드려야 한다. 또한 이러한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사고실험‘에 해당하는 것들 극복하는 것처럼 역사가들도 논리와 상상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았다. 지도학 또한 역사와 유사한 절차를 밟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 묘사, 그리고 설득이다. 지도는 현재위치에서 가려는 목적지까지의 정보를 제공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지도역시 역사가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경험을 묘사해 그것을 종위위로 추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와 역사는 마찬가지로 현실, 묘사, 설득에 각자의 상상력을 더해 나아간다. 하지만 필자가 말한 것과는 달리 분명 지도와 역사 간의 차이점은 존재한다. 지도는 목적지까지의 도착을 위찬 일반화된 정보를 주는 것이라면 역사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아는 방법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또한, 개디스는 카오스와 복잡성을 언급하며 모든 형상은 복접성이 서로 엉켜있는 것으로 어느 것에 대한 결과나 답을 내기가 힘들다는 것인데 이러한 과학적 성격을 역사와 비교하여 이 두 학문의 유사성을 부각시켰다.
여기서 개디스는 사회과학의 표준화된 모델인 환원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사회과학이 주장하는 보편성 일반화와 역사학이 추구하는 보편적이지 않는 일반화를 차이를 짚고 넘어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회과학 학문의 접근방식과 역사가의 접근방식을 유사하게 표현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개디스의 주장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사회과학은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표준화 일반화 시키려는 취지를 갖고 있다. 반대로 역사는 모든 변수를 이해하고 특정한 틀에 모든 이야기를 묶어 내려 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변수를 이해하며 해석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가는 사회과학자와는 달리 원인과 선례에서 우선순위와 등급을 매기는 행동은 무책임한 일 뿐이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사회과학처럼 어떠한 한 사례로 다른 것을 모델링[보편화]을 하는 게 아니라 시뮬레이션 즉, 가상 실험을 통해 통상적인 인과관계의 연결고리에서 특별한 것을 ‘구별’ 하려한다. 개디스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적 접근과의 유사점을 확대하는 반면 사회과학과의 차이점과 사회과학이 학문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하여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사회과학이 지난 20세기의 뉴턴 식의 세계관을 수용한 것을 낡은 것이라 판단한 것과 동시에 대세라고 말 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의 접근방식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사회과학의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연과학적 접근방식의 중요성에 힘을 주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책은 역사가의 도덕적 심판 부분 설명으로 넘어간다. 과학자는 예를 들어 물리학자는 분자에 대한 도덕적 심판을 가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가는 의도적이던 의도적이 아니던 어떻게든 역사적 인물 또는 사건에 대한 도덕적 심판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는 역사가가 어떻게 이러한 문제를 유연하게 대처 해나가는 것에 달렸다. 우리가 한 인물의 자서전을 읽고도 모두의 느낀 점이 다른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사관을 갖고 그 인물을 그렸는지, 저자가 어떠한 시대에 살고, 어떠한 교육을 받았나에 따라 인물을 다르게 그려진다. 여기서 개디스는 앞에 언급한 ‘묘사’의 중요성을 다시 되풀이 말한다. 개디스는 내가 수업에서 배웠던 것과 같이 ‘과거 역사에 대한 평가가 역사가가 살고 있는 현재를 방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유명한 역사가 몇몇은 대체로 ‘역사속의 위인을 심판하는 것은 동시대의 몫’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E. H카와의 의견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므로 묘사를 얼마나 사실에 잘 끼워 맞추는가의 문제로 다시 보고 있다. 여기서 역사가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역사가는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잃지 않고 역사를 해석 및 ‘묘사’해 나간다. 하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는 중에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심판을 해야 될 때도 온다. 저자 또한 이 부분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해답에 접근하는 방법을 자연과학적으로 풀이 하였다. 해안선을 잴 때 적용할 수 있는 단위가 여러 가지이고 이것을 단순히 단위환산을 할시 남겨질 수 있는 차이를 고려 할 때 역사 또한 어떠한 시선으로 인물 과 사건 등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의 묘사는 사실이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역사가의 ‘묘사’는 처음 동시대 사람들과의 기억과 마찰 그리고 경쟁하지만 어느 샌가 ‘묘사’가 그들이 머릿속에 스며들고 결국 그것은 기억 즉 사실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읽으면서 지금 많은 이슈가 되고 있는 역사 왜곡에 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제대로 ‘묘사’ 되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새 우리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기억이 되어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 개디스가 말한 것과 같다고 느낀다. 이것을 통해 역사가가 역사를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그 에 따른 역사가의 막중한 임무와 책임 또한 배우게 되었다.
덧붙여 개디스는 역사 교육에 대한 열성을 표하였다. 그가 말했듯이 사회체제는 역사학이라는 학문 없이는 불가능하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규모를 불문하고 더 넓은 시야를 위한 토대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역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교과서이고 이를 자기의 개인적 경험으로 확대하며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 결국 역사가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교육이라고 개디스 또한 말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학문으로나 연구 논문 또는 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개디스는 카스파르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초반 개디스가 이 그림을 언급했을 때 앞서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뒤돌아선 방랑자의 얼굴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관대한 풍경 앞에 압도당하여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도 있을 가능성과 한편 한 폭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이것을 또한 어떻게 많은 이에게 전해야 할까하는 전달자로서의 고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또한 역사가는 ‘동시에 경험과 교훈, 의무와 책임의 망에 점점 얽매이게’된다고 말한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난 전혀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도 역사가의 입장에서 그가 겪는 고충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있어 [역사의 풍경]은 단순히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론적 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겪는 고통들 고뇌 그리고 이를 완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기 위한 책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아쉬움이 가장 컸다.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전문적 지식 용어들이나 정보들을 100% 흡수 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아쉽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뒷받침 해줬더라면 개디스가 말하려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만은 지식들을 직접 내손으로 찾아보고 얻으려는 자세를 터득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저자에게 아쉬운 점은 전문적인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으로만 풀이하지 말고 더 많은 양을 역사에 적용시켜 풀이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몇몇 장들을 읽고 이것이 과연 역사 입문서 인가? 자연과학 입문서인가? 하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다음 장에 두려움은 더 커져갔다. 나는 물론 역사를 배우는 단계이고 역사나 과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지만 만약 저자가 조금만 더 쉽게 풀이 하였다면 만약 이해하기 힘든 은유가 아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예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더 얻지 않았을까 싶다.
첫댓글 유사 관련 주제들에 가서 토론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