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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잡지)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제사[ 祭祀 ]
목차
1. 신라
2. 고구려
3. 백제
1. 신라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는 다음과 같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서기 6)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22대 지증왕(智證王) 때에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비로소 5묘(五廟)를 제정하였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의 시조로 세우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五廟)를 만들었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 때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按新羅宗廟之制 第二代南解王三年春 始立始祖赫居世廟 四時祭之 以親妹阿老主祭 第二十二代智證王 於始祖誕降之地奈乙 創立神宮 以享之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濟高句麗 有大功德 並爲世世不毁之宗 兼親廟二爲五廟 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또한 『사전(祀典)』에 쓰인 것을 보면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까지는 지내지 않았다. 『예기』왕제(王制)편에 “천자는 7묘이며 제후는 5묘이니 2소(昭) 2목(穆)과 태조(太祖)의 사당을 합하여 5묘이다.”라고 하였고, 또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니, 감히 예법에 벗어나지 않고 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사직단 및 사당의 높이, 사직단 주위의 담과 사당 문의 안팎, 신위 순서의 높고 낮은 것, 제물의 차림과 오르내리는 절차, 술잔과 제기와 제육과 축문 등에 대한 예법은 추측으로만 할 수도 없으므로 그 대략의 내용만을 기록할 뿐이다.
又見於祀典 皆境內山川 而不及天地者 蓋以王制曰 天子七廟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 又曰 天子祭天地天下名山大川 諸侯祭社稷名山大川之在其地者 是故 不敢越禮而行之者歟 然其壇堂之高下壝門之內外次位之尊卑陳設登降之節尊爵籩豆牲牢冊祝之禮 不可得而推也 但粗記其大略云爾
1년에 여섯 번씩 5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이었다. 12월 인일(寅日)에는 신성(新城) 북문에서 팔자(八)에 제사를 지내는데, 풍년에는 대뢰(大牢, 소ㆍ양ㆍ돼지)를 흉년에는 소뢰(小牢, 양ㆍ돼지)를 썼다.
一年 六祭五廟 謂正月二日五日 五月五日 七月上旬 八月一日十五日 十二月寅日 新城北門 祭八 豊年用大牢 凶年用小牢
입춘(立春)이 지나고 들어오는 해일(亥日)에는 명활성(明活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先農, 농사를 가르쳤다는 신농씨)에 제사 지내고, 입하(立夏) 지나고 들어오는 해일에는 신성 북문에서 중농(中農)에 제사 지내고, 입추 지나고 들어오는 해일에는 산원(園)에서 후농(後農)에 제사를 지냈다. 입춘 후 축일(丑日)에 견수곡(犬首谷) 어구에서 풍백(風佰)에게 제사 지내고, 입하 후 신일(申日)에 탁저(卓渚)에서 우사(雨師)에게 제사 지내고, 입추 후 진일(辰日)에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다.[여러 『예전(禮典)』들을 조사해 봐도 선농에만 제사를 지냈고, 중농과 후농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다.]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 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 祭中農 立秋後亥日 園祭後農 立春後丑日 犬首谷門 祭風伯 立夏後申日 卓渚祭雨師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檢諸禮典 只祭先農 無中農後農]
3산(三山) 5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하였다.
三山五岳已下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대사(大祀)는 3산에서 지냈는데 첫째는 나력산(奈歷山)[습비부], 둘째는 골화산(骨火山)[절야화군], 셋째는 혈례산(穴禮山)[대성군]이다.
大祀 三山 一奈歷[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
중사(中祀)를 지낸 곳은 다음과 같다.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吐含山)[대성군], 남쪽의 지리산(地理山)[청주], 서쪽의 계룡산(鷄龍山)[웅천주], 북쪽의 태백산(太伯山)[나이군], 중앙의 부악산(父岳山)[공산이라고도 한다. 압독군]이다. 사진(四鎭)은 동쪽의 온말근(溫沫懃)[아곡정], 남쪽의 해치야리(海恥也里)[실제라고도 한다. 추화군], 서쪽의 가야압악(加耶岬岳)[마시산군], 북쪽의 웅곡악(熊谷岳)[비열홀군]이다. 사해(四海)는 동쪽의 아등변(阿等邊)[근오형변이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형변(兄邊)[거칠산군], 서쪽의 미릉변(未陵邊)[시산군], 북쪽의 비례산(非禮山)[실직군]이다. 사독(四瀆)은 동쪽의 토지하(吐只河)[참포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황산하(黃山河)[삽량주], 서쪽의 웅천하(熊川河)[웅천주], 북쪽의 한산하(漢山河)[한산주]이다. 이 이외에 속리악(俗離岳)[삼년산군], 추심(推心)[대가야군],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서림군], 오서악(烏西岳)[결이군], 북형산성(北兄山城)[대성군], 청해진(淸海鎭)[조음도]에서도 중사를 지냈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大城郡] 南地理山[菁州] 西鷄龍山[熊川州] 北太伯山[奈已郡] 中父岳[一云公山 押督郡] 四鎭 東溫沫懃[牙谷停] 南海恥也里[一云悉帝 推火郡] 西加耶岬岳[馬尸山郡] 北熊谷岳[比烈忽郡] 四海 東阿等邊[一云斤烏兄邊 退火郡] 南兄邊[居柒山郡] 西未陵邊[屎山郡] 北非禮山[悉直郡] 四瀆 東吐只河[一云槧浦 退火郡] 南黃山河[歃良州] 西熊川河[熊川州] 北漢山河[漢山州] 俗離岳[三年山郡] 推心[大加耶郡] 上助音居西[西林郡] 烏西岳[結已郡] 北兄山城[大城郡] 淸海鎭[助音島]
소사(小祀)를 지낸 곳은 다음과 같다. 상악(霜岳)[고성군], 설악(雪岳)[수성군], 화악(花岳)[근평군], 감악(鉗岳)[칠중성], 부아악(負兒岳)[북한산주], 월나악(月奈岳)[월나군], 무진악(武珍岳)[무진주], 서다산(西多山)[백해군 난지가현], 월형산(月兄山)[나토군 사열이현], 도서성(道西城)[만노군], 동로악(冬老岳)[진례군 단천현], 죽지(竹旨)[급벌산군], 웅지(熊只)[굴자군 웅지현], 악발(岳髮)[발악이라고도 한다. 우진야군], 우화(于火)[생서량군 우대현], 삼기(三岐)[대성군], 훼황(卉黃)[모량], 고허(高墟)[사량], 가아악(嘉阿岳)[삼년산군],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아지현], 비약악(非藥岳)[퇴화군], 가림성(加林城)[가림현. 어떤 기록에는 영암산, 우풍산은 있으나 가림성은 없다.], 가량악(加良岳)[청주], 서술(西述)[모량].
小祀 霜岳[高城郡] 雪岳[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沙熱伊縣] 道西城[萬弩郡] 冬老岳[進禮郡丹川縣] 竹旨[及伐山郡] 熊只[屈自郡熊只縣] 岳髮[一云髮岳 于珍也郡] 于火[生西良郡于大縣] 三岐[大城郡] 卉黃[牟梁] 高墟[沙梁] 嘉阿岳[三年山郡] 波只谷原岳[阿支縣] 非藥岳[退火郡] 加林城[加林縣 一本有靈嵒山虞風山 無加林城] 加良岳[菁州] 西述[牟梁]
사성문제(四城門祭)는 첫째 대정문(大井門), 둘째 토산량문(吐山良門), 셋째 습비문(習比門), 넷째 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냈다. 부정제(部庭祭)는 양부(梁部)에서 지냈다. 사천상제(四川上祭)는 첫째 견수(犬首), 둘째 문열림(文熱林), 셋째 청연(靑淵), 넷째 박수(樸樹)에서 지냈다. 문열림에서는 일월제(日月祭)를 지냈고,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는 오성제(五星祭)를 지냈고, 혜수(惠樹)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사대도제(四大道祭)는 동쪽은 고리(古里), 남쪽은 첨병수(簷幷樹), 서쪽은 저수(渚樹), 북쪽은 활병기(活倂岐)에서 지냈다. 압구제(壓丘祭)와 벽기제(辟氣祭)도 지냈다. 이상과 같은 제사는 특별한 제도에 의하여 지내기도 하였고,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기도 하였다.
四城門祭 一大井門 二吐山良門 三習比門 四王后梯門 部庭祭 梁部 四川上祭 一犬首 二文熱林 三靑淵 四樸樹 文熱林 行日月祭 靈廟寺南 行五星祭 惠樹 行祈雨祭 四大道祭 東古里 南簷幷樹 西渚樹 北活倂岐 壓丘祭 辟氣祭 上件 或因別制 或因水旱 而行之者也
2.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古記)와 중국 역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高句麗百濟祀禮不明 但考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 以記云爾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영성(靈星)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신(襚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後漢書云 高句麗 好祠鬼神社稷靈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以十月迎而祭之
『북사(北史)』에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음사(淫祠, 미신에 가까운 제사)가 많았다. 신묘(神廟)는 두 곳인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으로 나무를 깎아 부인상을 만들어 모시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인데 이는 시조가 부여신의 아들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 두 곳에는 모두 관아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는데, 하백의 딸과 주몽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云 高句麗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양서(梁書)』에 “고구려는 왕궁 왼편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겨울에는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梁書云 高句麗 於所居之左 立大屋 祭鬼神 冬祠零星社稷
『당서(唐書)』에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가 많았으니 영성과 태양, 기자(箕子), 가한(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신수(神隧)라 부르며 10월에는 왕들이 직접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
고기(古記)에 “동명왕 14년(기원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東扶餘)에서 죽자 그 나라의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절을 갖추어 장사 지내고는 신묘(神廟)를 세웠다. 태조왕(太祖王) 69년(서기 121)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扶餘)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냈다. 신대왕(新大王) 4년(서기 168) 가을 9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고국천왕(故國川王) 원년(서기 179) 가을 9월과 동천왕(東川王) 2년(서기 228) 봄 2월과 중천왕(中川王) 13년(서기 260) 가을 9월과 고국원왕(故國原王) 2년(서기 332) 봄 2월과 안장왕(安臧王) 3년(서기 521) 여름 4월과 평원왕(平原王) 2년(서기 560) 봄 2월과 건무왕(建武王) 2년(서기 619) 여름 4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 고국양왕(故國壤王) 9년(서기 392) 봄 3월에 국사(國社)를 세웠다. 또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대회를 여는데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古記云 東明王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太祖王六十九年 冬十月 幸扶餘 祀太后廟 新大王四年 秋九月 如卒本 祀始祖廟 故國川王元年 秋九月 東川王二年 春二月 中川王十三年 秋九月 故國原王二年 春二月 安臧王三年 夏四月 平原王二年 春二月 建武王二年 夏四月 並如上行 故國壤王九年 春三月 立國社 又云 高句麗 常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
3. 백제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시조는 동명왕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조는 우태(優台)라 하기도 한다.”고 써있고,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예 구태가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시조를 구태라 하였으나 동명왕이 시조인 것은 사적에 명백하므로 그 밖의 것은 믿을 수 없다.]
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고기(古記)에 “온조왕(溫祚王) 20년(서기 2) 봄 2월에 단을 설치하여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온조왕 38년 겨울 10월, 다루왕(多婁王) 2년(서기 29) 봄 2월, 고이왕(古尒王) 5년(서기 238) 봄 1월과 10년 봄 1월 및 14년 봄 1월, 근초고왕(近肖古王) 2년(서기 347) 봄 1월, 아신왕(阿莘王) 2년(서기 393) 봄 1월, 전지왕(腆支王) 2년(서기 406) 봄 1월, 모대왕(牟大王) 11년(서기 489) 겨울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 지냈다. 다루왕 2년 봄 1월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책계왕(責稽王) 2년(서기 287) 봄 1월, 분서왕(汾西王) 2년(서기 299) 봄 1월, 계왕(契王) 2년(서기 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1월, 전지왕 2년 봄 1월에도 모두 이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古記云 溫祚王二十年 春二月 設壇祠天地 三十八年 冬十月 多婁王二年 春二月 古尒王五年 春正月 十年 春正月 十四年 春正月 近肖古王二年 春正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牟大王十一年 冬十月 並如上行 多婁王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 春正月 汾西王二年 春正月 契王二年 夏四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並如上行
악[ 樂 ]
신라의 음악은 세 가지 관악기와 세 가지 현악기와 박판(拍板, 박자를 맞추는 나무쪽)과 대고(大鼓, 큰북)와 가무(歌舞)가 있다. 춤은 두 사람이 추는데, 방각복두(放角幞頭)를 쓰며 자대수공란(紫大袖公襴)을 입고 홍정도금(紅鞓鍍金)과 요대(銙腰)를 매고 오피화(烏皮靴)를 신는다. 세 가지 현악기는 첫째 현금(玄琴), 둘째 가야금(加耶琴), 셋째는 비파(琵琶)이다. 세 가지 관악기는 첫째 대금(大笒), 둘째 중금(中笒), 셋째 소금(小笒)이다.
新羅樂 三竹三絃拍板大鼓歌舞 舞 二人 放角幞頭紫大袖公襴紅鞓鍍金銙腰帶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笒 二中笒 三小笒
현금은 중국 악부(樂部)의 금(琴)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금조(琴操)』에 “복희(伏犧)가 금을 만들어 수신 수양하여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금의 길이는 석자 여섯 치 여섯 푼이니 366일을 상징하였고, 넓이는 여섯 치이니 육합을 상징하였으며, 판 위를 지(池)[지는 연못이니 공평함을 의미한다.]라 하고, 판 밑을 빈(濱)[빈은 복종을 의미한다.]이라 하였으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사람의 존귀와 비천을 표시함이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모방한 것이며, 다섯줄은 오행(五行)을 상징한 것이오. 큰 줄은 임금, 10줄은 신하를 나타내는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두 줄을 더 첨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풍속통(風俗通)』에 “금의 길이는 넉자 다섯 치이니, 이는 사계절과 오행(五行)을 모방한 것이오, 일곱 줄은 칠성(七星)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玄琴 象中國樂部琴 而爲之 按琴操曰 伏犧作琴 以修身理性 反其天眞也 又曰 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文上曰池[池者水也 言其平] 下曰濱[濱者服也] 前廣後狹 象尊卑也 上圓下方 法天地也 五絃 象五行 大絃爲君 十絃爲臣 文王武王加二絃 又風俗通曰 琴長四尺五寸者 法四時五行 七絃 法七星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둘째 재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의 원형을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훗날 현금이라고만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晋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 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신라 사람 사찬(沙飡) 공영(菾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琴)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스로 30곡을 새로 지어 이것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것을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도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법을 배워 오게 하고, 마침내 그에게 남원(南原)의 공적 업무를 맡겼다.
윤흥이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두 명, 즉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선발하여 지리산에 가서 금의 연주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귀금 선생이 그들에게 금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미묘한 부분은 알려주지 않았다. 윤흥이 자기 처와 함께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으로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전해 받으려는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면서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왕에게 복명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윤흥은 술을 들고 그의 처는 잔을 잡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예의와 정성을 다한 뒤에야 그가 숨겼던 표풍(飄風) 등의 3곡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여 극종이 7곡을 지었으며, 극종 이후로는 금으로써 자기의 업을 삼은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은 음률에는 두 가지 조(調)가 있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요, 둘째는 우조(羽調)이며 모두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의 곡도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기록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나머지 것도 모두 흩어지거나 없어졌으므로 전체를 기록할 수 없다.
羅人沙飡菾永子玉寶高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得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 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飡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允興到官 簡聰明少年二人 曰安長淸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 欲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秘而不傳 吾無以復命 允興捧酒 其婦執盞膝行 致禮盡誠 然後 傳其所秘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流傳 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
옥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2, 의암곡(倚嵒曲)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1,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吾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 이었으며 극종이 지은 7곡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玉寶高所制三十曲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嵒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一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一 降天聲曲一 克宗所製七曲 今亡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풍속통』에서 “쟁은 진(秦)나라 악기다.”라 하였고, 『석명(釋名)』에서는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소리가 쟁쟁하며 병(幷), 양(梁) 두 주(州)의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부현(傅玄)은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六合)을 모방한 것이고,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이니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 하였다. 완우(阮瑀)는 “쟁의 길이는 6자이니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현은 12줄이니 이는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三才, 천ㆍ지ㆍ인)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風俗通曰 箏 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 箏形如瑟 傅玄曰 上圓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柱高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槪似之
『나고기(羅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인데,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聲音)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악사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순하였다. 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정착시키고 곧 대나마(大奈麻) 주지(注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였다.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신하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말하였다.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이를 연주하도록 하고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音調)가 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요,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모두 185곡이었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 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一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撙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는 보기(寶伎), 넷째는 달기(達己), 다섯째는 사물(思勿), 여섯째는 물혜(勿慧), 일곱째는 하기물(下奇物), 여덟째는 사자기(師子伎), 아홉째는 거열(居烈), 열째는 사팔혜(沙八兮), 열 한째는 이사(爾赦), 열 두째는 상기물(上奇物)이다. 니문(泥文)이 지은 3곡은 첫째는 오(烏, 까마귀), 둘째는 서(鼠, 쥐), 셋째는 순(鶉, 메추라기)이다.[사(赦)자의 뜻은 분명치 않다.]
于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寶伎 四曰達己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鶉[赦字未詳]
비파는 『풍속통』에서 “근대 음악가들이 만든 것으로 그 시초는 알 수 없다. 비파 길이의 석 자 다섯 치는 하늘ㆍ땅ㆍ사람과 오행(五行)을 모방한 것이오, 네 줄은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명』에는 “비파는 원래 호족들이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인데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비(琵)라 하고 손을 끌어당기는 것을 파(琶)라고 하기 때문에 이를 악기의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향비파(鄕琵琶)는 당나라의 비파와 대체로 같으나 약간 다르며, 그것도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음악에는 세 가지 음조가 있는데 첫째는 궁조(宮調), 둘째는 칠현조(七賢調), 셋째는 봉황조(鳳皇調)로 모두 212곡이다.
琵琶 風俗通曰 近代樂家所作 不知所起 長三尺五寸 法天地人與五行 四絃 象四時也 釋名曰 琵琶 本胡中馬上所鼓 推手前曰琵 引手却曰琶 因以爲名 鄕琵琶 與唐制度 大同而少異 亦始於新羅 但不知何人所造 其音有三調 一宮調 二七賢調 三鳳皇調 共二百一十二曲
삼죽(三竹)은 역시 당나라의 피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에서 “피리는 한무제(漢武帝) 때 구중(丘仲)이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고찰하여 보면 송옥(宋玉)의 작품에 「적부(笛賦)」가 있는데 송옥은 한(漢)나라 이전 사람이니 이 설은 옳지 않은 듯하다. 마융(馬融)은 “근대의 쌍적(雙笛)은 강(羌)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적(笛)은 척(滌)의 뜻이니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고 맑고 바른 데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길이는 한 자이며 4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였다. 향삼죽(鄕三竹)은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기(古記)에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 가운데에 갑자기 작은 산이 생겼는데,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 한 포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대나무를 쪼개어 적(笛)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고 써있으나 이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는 없다. 삼죽적(三竹笛)에는 일곱 조가 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 둘째는 황종조(黃鐘調), 셋째는 이아조(二雅調), 넷째는 월조(越調), 다섯째는 반섭조(般涉調), 여섯째는 출조(出調), 일곱째는 준조(俊調)다. 대함(大笒)은 324곡이오, 중함(中笒)은 245곡이오, 소함(小笒)은 298곡이다.
三竹 亦模倣唐笛 而爲之者也 風俗通曰 笛 漢武帝時 丘仲所作也 又按 宋玉有笛賦 玉在漢前 恐此說非也 馬融云 近代雙笛 從羌起 又笛 滌也 所以滌邪穢 而納之於雅正也 長一尺 四十七孔 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 古記云 神女王時 東海中忽有一小山 形如龜頭 其上有一竿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使斫之作笛 名萬波息 雖有此說 怪不可信 三竹笛有七調 一平調 二黃鐘調 三二雅調 四越調 五般涉調 六出調 七俊調 大笒三百二十四曲 中笒二百四十五曲 小笒二百九十八曲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儒理王) 때 만들었으며,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脫解王),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婆娑王), 사내[시뇌(詩惱)라고도 한다.]악(思內樂)은 내해왕(奈解王), 가무(笳舞)는 내밀왕(奈密王),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訥祗王) 때 만든 것이다.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백결(百結) 선생이 만들었으며, 간인(竿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 사람인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든 것이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法興王) 때 만든 것이며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眞興王) 때 만든 것이다.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眞平王) 때 사람인 담수(淡水)가 만들었으며,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만든 것이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음악이오,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의 음악이오,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음악이오,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는 동벌군(同伐郡)의 음악이오,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隈郡)의 음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다.
그러나 곡조와 악기의 수 및 가무(歌舞)의 형태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기(古記)에 “정명왕(政明王, 신문왕) 9년(서기 689)에 왕이 신촌(新村)에 행차하여 큰 술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가무(笳舞)에는 감(監, 감독하는 사람)이 6명, 가척(笳尺, 피리부는 악사)이 2명, 무척(舞尺, 춤을 담당한 악사)이 1명, 하신열무(下辛熱舞)에는 감이 4명, 금척(琴尺, 가야금을 타는 악사)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3명, 사내무(思內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한기무(韓岐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상신열무(上辛熱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소경무(小京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1명, 가척이 3명, 미지무(美知舞)에는 감이 4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이었다.
애장왕(哀莊王) 8년(서기 807)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처음으로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하였다. 무척 4명은 푸른 옷을 입었으며, 금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고, 가척 5명은 채색 옷을 입고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을 새겨 넣은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무(碓琴舞)를 연주하는데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므로 자세히는 말할 수가 없겠다. 신라 시대에 악공(樂工)은 모두 척(尺)이라고 불렀다.
최치원(崔致遠)의 시에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가 있으므로 이제 여기에 기록한다.
금환(金丸)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구슬을 희롱하니
달 흐르고 별 떠올라 눈에 가득 차누나
의좋은 친구 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더 나으랴?
넓은 바다 파도조차 잠잠해짐을 바로 알겠구나
월전(月顚)
솟은 어깨 움추린 목 머리털 높이 치켜세우고
팔을 걷은 뭇 사내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 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는데
밤에 꼭두 세운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누나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손에 구슬 달린 채찍 들고 귀신을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맵시나게 춤을 추니
붉은 봉새가 요(堯)시대 봄철의 태평성대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束毒)
엉킨 머리 쪽빛 얼굴이라 사람 같지 않은데
떼를 지어 뜰에 나와 난새 춤을 배우네
북은 둥둥 울리고 바람 솔솔 부는데
이리 저리 뛰고 내달아 끝이 없구나
산예(狻猊)
머나먼 길 걷고 걸어 사막을 지나오니
털가죽은 헤어지고 먼지가 쌓였는데
흔드는 머리 살랑거리는 꼬리에 어진 모습 배었는데
웅장한 기상은 정녕코 온 짐승의 재주를 아우른 것 같구나
會樂及辛熱樂 儒理王時作也 突阿樂 脫解王時作也 枝兒樂 婆娑王時作也 思內[一作詩惱]樂 奈解王時作也 笳舞 奈密王時作也 憂息樂 訥祗王時作也 碓樂 慈悲王時人百結先生作也 竿引 智大路王時人川上郁皆子作也 美知樂 法興王時作也 徒領歌 眞興王時作也 捺絃引 眞平王時人淡水作也 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 內知 日上郡樂也 白實 坤梁郡樂也 德思內 河西郡樂也 石南思內道 同伐郡樂也 祀中 北隈郡樂也 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而聲器之數歌舞之容 不傳於後世 但古記云 政明王九年 幸新村 設酺奏樂 笳舞 監六人 笳尺二人 舞尺一人 下辛熱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三人 思內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韓岐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上辛熱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小京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一人 歌尺三人 美知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哀莊王八年 奏樂 始奏思內琴 舞尺四人靑衣 琴尺一人赤衣 歌尺五人彩衣繡扇並金鏤帶 次奏碓琴舞 舞尺赤衣 琴尺靑衣 如此而已 則不可言其詳也 羅時樂工皆謂之尺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群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趍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蓬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狻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掉尾馴仁德 椎氣寧同百獸才
고구려(高句麗)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 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彈箏) 하나, 국쟁(掬箏) 하나, 와공후(臥箜篌) 하나, 수공후(竪箜篌) 하나, 비파 하나, 오현(五絃) 하나, 의취저(義觜笛) 하나, 생(笙) 하나, 횡저(橫笛) 하나, 퉁소(簫)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재고(齋鼓) 하나, 첨고(檐鼓) 하나, 패(唄)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복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써있다.
『책부원귀』에는 “악기에 오현금, 쟁, 피리, 횡저, 퉁소, 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고 써있다.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 飾以鳥羽 黃大袖 紫羅帶 大口袴 赤皮鞾 五色緇繩 舞者四人 椎髻於後 以絳抹額 飾以金璫 二人黃裙襦赤黃袴 二人赤黃裙襦袴 極長其袖 烏皮鞾 雙雙倂立而舞 樂用 彈箏一 掬箏一 臥箜篌一 竪箜篌一 琵琶一 五絃一 義觜笛一 笙一 橫笛一 簫一 小篳篥一 大篳篥一 桃皮篳篥一 腰鼓一 齋鼓一 檐鼓一 唄一 大唐武太后時 尙二十五曲 今唯能習一曲 衣服亦寑衰敗 失其本風 冊府元龜云 樂有 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백제(百濟)의 음악에 대하여 『통전(通典)』에 “백제 음악은 당나라 중종(中宗)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開元) 연간에 기왕범(岐王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다. 무용수 두 명은 자색빛의 큰 소매에 치마와 저고리의 옷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남아 있는 악기는 쟁(箏), 적(笛), 도피필률(桃皮篳篥, 관악기, 피리), 공후(箜篌, 현악기)인데, 악기류는 대부분 중국과 같다.”고 써있다. 『북사』에 “고(鼓), 각(角), 공후, 쟁, 우(竽), 지(箎), 적과 같은 악기가 있었다.”고 써있다.
百濟樂 通典云 百濟樂 中宗之代 工人死散 開元中 岐王範爲大常卿 復奏置之 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 紫大袖裙襦 章甫冠 皮履 樂之存者 箏笛桃皮篳篥箜篌 樂器之屬 多同於內地 北史云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색복(의복)
목차
1. 신라
2. 고구려
3. 백제
1. 신라
신라 초기의 의복제도는 복색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때 처음으로 6부(六部)의 복색의 존비(尊卑)제도를 정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오히려 우리의 풍속을 유지하였다. 진덕왕(眞德王) 2년(서기 648)에 김춘추(金春秋)가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당의 의식을 따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니, 당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동시에 의대(衣帶)를 주었다. 그가 돌아와서 이를 시행하여, 우리의 풍속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문무왕(文武王) 4년(서기 664)에는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치니, 이후로 우리의 의관(衣冠)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천명을 받은 후에도 모든 국가 제도는 신라의 옛 것을 많이 따랐으므로, 지금 조정과 상류 남녀들의 의복도 대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들여왔던 제도인 것 같다. 내가 세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우리 일행의 의관이 송나라 사람과 다른 것이 없었다. 전번에 조회에 들어가다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자신전(紫宸殿)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떤 합문원(閤門員)이 와서 묻기를 “누가 고려의 사신입니까?”라 하기에, “내가 고려의 사신이오.”라 대답하니 그가 웃으면서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 유규(劉逵), 오식(吳拭) 등이 와서 사관에 묵고 있을 때, 연회석상에서 우리 옷차림을 한 기생을 보고 섬돌 위로 불러 올려 소매 넓은 옷과 색실 띠와 긴 치마를 가리키면서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것이 모두 중국 3대의 의복인데 지금까지 여기에서 입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부녀자들의 예복도 당나라의 옛 제도임을 알 수 있겠다.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만 대략 기록하기로 한다.
新羅之初 衣服之制 不可考色 至第二十三葉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尊卑之制 猶是夷俗 至眞德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太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以夷易華 文武王在位四年 又革婦人之服 自此已後 衣冠同於中國 我太祖受命 凡國家法度 多因羅舊 則至今朝廷士女之衣裳 蓋亦春秋請來之遺制歟 臣三奉使上國 一行衣冠 與宋人無異 嘗入朝尙早 立紫宸殿門 一閤門員來問 何者是高麗人使 應曰 我是 則笑而去 又宋使臣劉逵吳拭來聘在館 宴次見鄕粧倡女 召來上階 指闊袖衣色絲帶大裙 嘆曰 此皆三代之服 不擬尙行 於此 知今之婦人禮服 蓋亦唐之舊歟 新羅年代綿遠 文史缺落 其制不可僂數 但粗記其可見云爾
법흥왕 때의 제도에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부터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자색 옷을 입었고, 아찬(阿飡)으로부터 급찬(級飡)까지는 붉은 비색 옷을 입고 상아홀을 들었으며,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는 푸른 옷을, 대사(大舍)로 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는 황색 옷을 입었다.
法興王制 自太大角干至大阿飡 紫衣 阿飡至級飡 緋衣並牙笏 大奈麻奈麻 靑衣 大舍至先沮知 黃衣
이찬(伊飡)과 잡찬(迊飡)은 비단 관을 쓰고, 파진찬(波珍飡)과 대아찬(大阿飡)과 금하(衿荷)는 진홍빛의 비색 관을 쓰며, 상당(上堂)의 대나마(大奈麻)와 적위(赤位)의 대사(大舍)는 실로 짠 갓끈을 매었다.
伊飡迊飡 錦冠 波珍飡大阿飡衿荷 緋冠 上堂大奈麻赤位大舍 組纓
흥덕왕(興德王) 9년, 즉 태화(太和) 8년(서기 834)에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興德王卽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진골(眞骨) 대등(大等)은 복두(幞頭,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는 임의로 하되 겉옷과 반소매옷과 바지에는 모직이나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모두 금한다. 허리띠에는 연문(硏文)이 들어간 백옥(白玉) 장식의 사용을 금한다. 장화에는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하며, 장화끈에는 은문(隱文)이 들어간 백옥 장식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은 능(綾) 이하를 임의로 사용하며, 신은 가죽이나 실이나 삼을 마음대로 사용하되, 베는 26승(升) 이하를 사용한다.
眞骨大等 幞頭 任意 表衣半臂袴 並禁罽繡錦羅 腰帶禁硏文白玉 靴禁紫皮 靴帶禁隱文白玉 襪任用綾已下 履任用皮絲麻 布 用二十六升已下
진골 여자: 겉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내의(內衣), 반소매옷, 바지, 버선, 신은 모두 모직과 수놓은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목도리는 모직과 금은 실로 수놓은 것과 공작(孔雀) 꼬리와 비취(翡翠) 털의 사용을 금하며, 빗에는 슬슬(瑟瑟)을 박은 것과 대모(玳瑁)의 사용을 금한다. 비녀에는 금실을 새겨 넣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하며, 모자에는 슬슬을 박은 것을 금하며, 베는 28승 이하를 사용하며, 아홉 색깔 중에서 자황(赭黃)색의 사용을 금한다.
眞骨女 表衣 禁罽繡錦羅 內衣半臂袴襪履 並禁罽繡羅 裱 禁罽及繡用金銀絲孔雀尾翡翠毛者 梳 禁瑟瑟鈿玳瑁 釵 禁刻鏤及綴珠 冠 禁瑟瑟鈿 布 用二十八升已下 九色禁赭黃
6두품: 복두에는 가늘고 성긴 나직과 거친 견포(絹布)를 사용하며, 겉옷에는 다만 면주(綿紬)와 주(紬)와 포(布)를 사용한다. 내의에는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하며, 바지에는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띠는 검은 무소뿔과 놋쇠와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하며, 버선은 거친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장화에는 검은 사슴 가죽으로 주름진 무늬를 입히는 것을 금하며 자색 가죽의 사용도 금한다. 장화끈은 검은 무소뿔과 놋쇠와 철과 구리를 사용한다. 신은 가죽과 삼만을 사용하며, 베는 18승 이하를 사용한다.
六頭品 幞頭 用繐羅絁絹布 表衣 只用綿紬紬布 內衣 只用小文綾絁絹布 袴 只用絁絹綿紬布 帶 只用烏犀鍮鐵銅 襪 只用絁綿紬布 靴 禁烏麋皺文紫皮 靴帶 用烏犀鍮鐵銅 履 只用皮麻 布 用十八升已下
6두품 여자: 겉옷은 다만 중소 무늬 능직과 거친 견직만을 사용하며, 내의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野草)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반소매옷은 모직과 수놓은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바지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에 금박 올린 것의 사용을 금한다. 목도리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에 금은박 올리는 것을 금하며, 배자와 잠방이와 짧은 옷에는 모두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베실 나직과 야초 나직에 금은박 올리는 것을 금한다. 겉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과 금은박 올린 채색 비단의 사용을 금하며, 허리끈과 옷끈에는 모직과 수놓은 것을 금한다.
속치마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야초 나직을 금하며, 허리띠는 금은실과 공작꼬리와 비취털로 끈을 늘여 술 만드는 것을 금한다. 버선목은 털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을 금하며, 버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을 금한다. 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을 금하며, 빗에는 슬슬의 장식을 금하며, 비녀에는 순금에 은을 새겨 넣거나 구슬을 매다는 것을 금한다. 모자에는 가늘고 성긴 나직과 엷은 견직을 사용하며, 베는 25승 이하를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금가루 빛과 붉은 빛의 사용을 금한다.
六頭品女 表衣 只用中小文綾絁絹 內衣 禁罽繡錦野草羅 半臂 禁罽繡羅繐羅 袴 禁罽繡錦羅繐羅金泥 裱 禁罽繡錦羅金銀泥 褙襠短衣 並禁罽繡錦羅布紡羅野草羅金銀泥 表裳 禁罽繡錦羅繐羅野草羅金銀泥纈 襻 禁罽繡 內裳 禁罽繡錦羅野草羅 帶 禁以金銀絲孔雀尾翡翠毛爲組 襪袎 禁罽羅繐羅 襪 禁罽繡錦羅繐羅野草羅 履 禁罽繡錦羅繐羅 梳 禁瑟瑟鈿 釵 禁純金以銀刻鏤及綴珠 冠 用繐羅紗絹 布 用二十五升已下 色 禁赭黃紫紫粉金屑紅
5두품: 복두에는 나직과 거친 견포를 사용하며, 겉옷은 다만 베를 사용한다. 내의와 반소매옷은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한다. 바지는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다만 철로 장식한다. 버선에는 다만 면주를 사용하며, 장화는 주름 무늬로 된 검은 사슴 가죽과 자색 가죽을 금한다. 장화끈은 다만 놋쇠와 철과 구리로 장식한다. 신은 가죽과 삼을 사용하며, 베는 15승 이하를 사용한다.
五頭品 幞頭 用羅絁絹布 表衣 只用布 內衣半臂 只用小文綾絁絹布 袴 只用綿紬布 腰帶 只用鐵 襪 只用綿紬 靴 禁烏麖皺文紫皮 靴帶 只用鍮鐵銅 履 用皮麻 布 用十五升已下
5두품 여자: 겉옷은 무늬없는 홑천을 사용하며, 내의는 잔무늬 능직만을 사용하며, 반소매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바지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과 금박을 금한다. 목도리에는 능직과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배자와 잠방이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베실 나직과 금은박 올린 채색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짧은 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베실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겉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하며, 허리끈과 옷끈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속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허리띠에는 금은실과 공작 꼬리와 비취 털로 만든 수술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목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신은 가죽 이하만을 사용하며, 빗은 대모 이하를 사용한다. 비녀는 백은 이하를 사용하며, 모자는 쓰지 않는다. 베는 20승 이하를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누른 가루와 진홍빛의 사용을 금한다.
五頭品女 表衣 只用無文獨織 內衣 只用小文綾 半臂 禁罽繡錦野草羅繐羅 袴 禁罽繡錦羅繐羅野草羅金泥 裱 用綾絹已下 襠 禁罽繡綿野草羅布紡羅金銀泥纈 短衣 禁罽繡錦野草羅布紡羅繐羅金銀泥纈 表裳 禁罽繡錦野草羅繐羅金銀泥纈 襻 禁罽繡錦羅 內裳 禁罽繡錦野草羅金銀泥纈 帶 禁以金銀絲孔雀尾翡翠毛爲組 襪袎禁罽繡錦羅繐羅 襪禁罽繡錦羅繐羅野草羅 履但用皮已下 梳用素玳瑁已下 釵用白銀已下 無冠 布用二十升已下 色禁赭黃紫紫粉黃屑紅緋
4두품: 복두는 다만 엷은 비단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하며, 겉옷과 바지는 다만 베만을 사용한다. 내의와 반소매옷은 다만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다만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한다. 장화에는 주름 무늬의 검은 사슴가죽과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하며, 장화끈에는 다만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하며, 신은 소가죽과 삼 이하를 사용하며, 베는 13승 이하를 사용한다.
四頭品 幞頭 只用紗絁絹布 表衣袴 只用布 內衣半臂 只用絁絹綿紬布 腰帶 只用鐵銅 靴 禁烏麖皺文紫皮 靴帶 只用鐵銅 履 用牛皮麻已下 布 用十三升已下
4두품 여자: 겉옷은 다만 면주 이하만을 사용하며, 내의는 다만 잔 무늬 능직 이하만을 사용하고, 반소매옷과 바지는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목도리와 짧은 옷은 다만 견직 이하만을 사용하며, 배자와 잠방이는 다만 능직 이하만을 사용하고, 겉치마는 다만 거친 견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허리끈은 치마와 같으며 옷끈은 월라(越羅, 질이 다소 낮은 비단)를 사용한다.
속치마는 입지 않으며 허리띠는 수놓은 것과 땋은 것과 야초 나직과 승천 나직과 월라의 사용을 금하고 다만 면주 이하만을 사용한다. 버선목은 다만 잔 무늬 능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버선은 다만 잔 무늬 능직과 거친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신은 가죽 이하를 사용한다. 빗은 흰색의 뼈ㆍ뿔ㆍ나무 등을 사용하며, 비녀는 금실을 새겨 넣거나 구슬을 다는 것과 순금의 사용을 금한다. 모자는 쓰지 않는다. 베는 18승을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황색 가루와 진홍색과 홍색과 멸자(滅紫)색을 금한다.
四頭品女 表衣 只用綿紬已下 內衣 只用小文綾已下 半臂袴 只用小文綾絁絹已下 裱短衣 只用絹已下 褙襠 只用綾已下 表裳 只用絁絹已下 與裳同 襻 用越羅 無內裳 帶 禁繡組及野草羅乘天羅越羅 只用綿紬已下 襪袎 只用小文綾已下 襪 只用小文綾絁綿紬布 履 用皮已下 梳 用素牙角木 釵 禁刻鏤綴珠及純金 無冠 布 用十八升 色 禁赭黃紫紫粉黃屑緋紅滅紫
평민: 복두는 견포만을 사용하며 겉옷과 바지는 베만을 사용한다. 내의는 견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구리와 철로만 장식한다. 장화는 주름 무늬로 된 검은 사슴가죽과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한다. 장화끈은 철과 구리로만 장식한다. 신발은 삼 이하를 사용하며 베는 12승 이하를 사용한다.
平人 幞頭 只用絹布 表衣袴 只用布 內衣 只用絹布 帶 只用銅鐵 靴 禁烏麖皺文紫皮 靴帶 只用鐵銅 履 用麻已下 布 用十二升已下
평민 여자: 겉옷은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내의는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바지는 거친 면주 이하를 사용하며 겉치마는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옷끈은 능직 이하를 사용하며 띠는 다만 능직과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버선목은 무늬 없는 천을 사용하며 버선은 거친 면주 이하를 사용한다. 빗은 흰색의 뼈와 뿔 이하를 사용하며 비녀는 황동 이하를 사용한다. 베는 15승 이하를 사용하며, 색의 사용은 4두품 여자와 같다.
平人女 表衣 只用綿紬布 內衣 只用絁絹綿紬布 袴 用絁已下 表裳 用絹已下 襻 只用綾已下 帶 只用綾絹已下 襪袎 用無文 襪 用絁綿紬已下 梳 用素牙角已下 釵 用鍮石已下 布 用十五升已下 色 與四頭品女同
2.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高句麗百濟衣服之制 不可得而考 今但記見於中國歷代史書者
『북사(北史)』에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 사인(士人)은 거기에 2개의 새 깃을 더 꽂았다. 귀한 사람의 모자를 소골(蘇骨)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자색 나직으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소매가 큰 웃옷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 띠를 띠고, 황색 가죽 신을 신었으며, 부녀들은 치마 저고리에 끝동을 달았다.”고 써있다.
北史云 高麗人皆頭着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 服大柚杉大口袴素皮帶黃革履 婦人裙襦加襈
『신당서(新唐書)』에 “고구려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나직으로 관을 만들며, 가죽 혁대에는 금단추를 달았다. 대신은 푸른 나직의 모자, 그 다음 신분은 진홍색의 모자를 쓰는데, 2개의 새 깃을 귀 부분에 꽂고 다양한 금은 단추를 달았다. 웃옷은 통소매요, 바지는 통이 넓었으며, 흰 가죽 띠에 황색 가죽 신을 신었다. 평민은 거친 옷을 입고 고깔을 썼으며, 여자는 머리에 장식 삼아 수건을 썼다.”고 써있다.
新唐書云 高句麗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大臣靑羅冠 次絳羅 珥兩鳥羽 金銀雜釦 衫筩褎 袴大口 白韋帶 黃革履 庶人衣褐 戴弁 女子首巾幗
『책부원귀(冊府元龜)』에 “고구려는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 자수한 것과 금은으로 차림을 하였다.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모두 머리에 수건을 썼다. 그것은 관책(冠幘) 같으면서 후면이 없었다. 소가(小加)는 절풍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고 써있다.
冊府元龜云 高句麗 其公會 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着幘 如冠幘而無後 其小加着折風 形如弁
3. 백제
『북사』에 “백제의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조회의 배례와 제사 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붙인다. 그러나 군대의 행사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나솔(奈率)에 이상은 관에 은꽃을 장식하였고, 장덕(將德)은 자색 띠, 시덕(施德)은 검은 띠, 고덕(固德)은 적색 띠, 계덕(季德)은 푸른 띠, 대덕(對德)과 문독(文督)은 모두 황색 띠, 무독(武督)으로부터 극우(剋虞)까지는 모두 흰 띠를 하였다.”라고 써있다.
北史云 百濟衣服與高麗略同 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 奈率已上 冠飾銀花 將德紫帶 施德皂帶 固德赤帶 季德靑帶 對德文督皆黃帶 自武督至剋虞 皆白帶
『수서(隋書)』에 “백제에서는 좌평(佐平)으로부터 장덕(將德)까지는 자색 띠, 시덕(施德)은 검은 띠, 고덕(固德)은 적색 띠, 계덕(季德)은 푸른 띠, 대덕 이하는 모두 황색 띠, 문독(文督)으로부터 극우(剋虞)까지는 모두 흰 띠를 사용하였다. 모자에 대한 제도는 모두 같은데 다만 나솔(奈率) 이상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라고 써있다.
隋書云 百濟自佐平至將德 服紫帶 施德皂帶 固德赤帶 季德靑帶 對德以下 皆黃帶 自文督至剋虞 皆白帶 冠制並同 唯奈率以上 飾以銀花
『당서(唐書)』에 “백제에서는, 왕은 소매가 큰 자색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나직 모자에 금화 장식을 하고, 흰 가죽 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관원들은 모두 진홍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평민들은 진홍빛과 자색 옷을 입지 못하였다.”고 써있다.
唐書云 百濟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통전(通典)』에 “백제는 의복제도에 있어서 남자들은 고구려와 대략 유사하고, 부녀자의 옷은 도포와 같으면서 소매가 약간 크다.”라고 써있다.
通典云 百濟其衣服 男子略同於高麗 婦人衣似袍而袖微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