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한 날들
크리스천 돈런 / 포레스트북스
책소개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마주한 한 남자의 분투기 『완벽한 날들』.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마치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통증을 경험하고 난 후 평생 완치되지 못할 신경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저자가 불치병과 맞서 싸우며 담담하게 기록한, 지난 5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넷, 딸이 첫걸음마를 뗀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재앙처럼 불어 닥친, 인체와 인격 모두를 파괴하는 그 병의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고, 오로지 혼자 외로움을 감당해야 했다. 언제 죽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고, 통증과 혼란은 점점 자아를 잠식했지만 저자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과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뇌과학과 신경질환을 공부하면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온전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보다 남은 가족의 불완전할 삶을 더 걱정하는 간절한 바람이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진다.
전신의 통증, 감각과 사고 회로의 이상을 느끼면서도 불치병에 걸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동안 잊고 지낸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저자가 그랬듯 인생의 가장 소중한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저자 소개
저자 : 크리스천 돈런
영국 서식스 대학교(Sussex University)에서 문학과 시각문화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저명한 주간지인 《뉴스테이츠먼(New Statesman)》을 비롯해 《엣지 매거진(Edge Magazine)》, 《바이스(Vice)》 등에 특집 기사를 썼다. 10년째 게임을 직접 해보고 리뷰를 쓰는 일을 하고 있으며, 비디오게임 전문 웹진인 《유로게이머(Eurogamer)》의 특집 담당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딸이 태어난 후 크리스천은 주말 아침마다 거실에 앉아 딸과 함께 레고 블록을 쌓았다. 그 몇 달 동안 손가락 감각이 무뎌지고 팔다리에 힘이 조금씩 빠졌으며, 목소리가 떨리고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 몸속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감지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딸의 뇌가 자랄수록 그의 뇌는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다.
크리스천은 재앙처럼 닥친 병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여겼다. 자기 자신을 탐구할 기회이자 새로운 자아를 찾아 떠나는 탐험으로 바꾸고자 했다. “병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게 해주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영국 브라이튼에서 아내 세라, 딸 리언과 함께 이 탐험이 계속되길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의 첫 책 『완벽한 날들』은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다.
역자 : 박미경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외국 항공사 승무원, 법률회사 비서, 영어 강사 등을 거쳐 현재 바른번역에서 전문 출판번역가이자 글밥아카데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살인 기술자』, 『포가튼걸』, 『프랙처드?삶의 균열』, 『언틸유아마인』,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에게 배우는 사랑과 우정과 인생』, 『이어 제로』, 『슈퍼히어로의 에로틱 라이프』, 『남편이 임신했어요』, 『내가 행복해지는 거절의 힘』, 행복 탐닉』등이 있다.
목차
추천의 글
1. 죽음은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 밤과 같다
2. 몸 안의 거대한 발전소
3. 뇌를 도둑맞다
4. 병을 진단받은 날 딸이 첫걸음마를 떼다
5.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6. 바다를 푸른 초원으로 착각한 사람들
7. 자기 자신 때문에 비통할 수 있을까
8. 무심코 지나가는 이 순간을 기억해
9. 죽어도 괜찮다는 걸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
참고 문헌에 관한 메모
감사의 글
책 속으로
나는 패턴을 찾는 일도 게을리했다. 처음엔 문고리를 놓쳤고 다음엔 스위치를 켜지 못했다. 부엌 찬장 문을 열지 못했으며 현금인출기의 숫자판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문제가 점점 확산됐지만 적어도 1년 동안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에 온 세상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게서 2, 3센티미터씩 멀어져갔다. 아기가 곧 태어날 예정이라 이런 문제를 감지하기가 더 어려웠다. 예정일이 가까워오자 나는 요일 감각이 없어지고 물건을 자꾸 떨어뜨렸다. 음식을 쏟기도 하고 걸핏하면 펜촉이나 식기류에 찔렸다. 그런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가 된다는 불안감 때문일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실상은 불안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는 놀라운 사실도 그냥 넘겨버렸다. p.62
2014년 9월 5일, 내가 진단받은 날 딸이 첫걸음마를 뗐다. 잔인한 현실과 완벽한 현실의 병치. 너무 진부한 설정이라 누구한테 말하기도 거북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나는 그 순간을 담은 영상을 지금도 본다. 영상에 찍힌 모습은 두 번째 걸음을 떼는 장면이다. 첫걸음마 떼는 모습을 휴대폰 렌즈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 걸음부터 영상에 담았다. 초저녁이었다. 세라와 나는 병원에서 막 돌아왔다. 리언이 거실에서 커피 테이블을 붙잡고 서 있었다. 요샌 붙잡을 게 있으면 곧잘 일어섰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리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테이블을 잡고 있던 두 손을 놓았다.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리언은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다리에 힘을 잔뜩 주었다. 프랑켄슈타인처럼, 아니 관에서 막 나온 드라큘라처럼 두 팔을 벌리고 한 발짝 내디뎠다. 리언이 첫걸음마를 뗀 것이다. 한 발짝, 두 발짝, 거실을 가로질러 오더니 손바닥을 활짝 펴고서 내 다리를 와락 붙잡았다. 그런 다음 쓰러져서 깔깔 웃었다. 나도 깔깔 웃었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끄고 세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야.” p.169~170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때 기분이 되살아났다. 벤이 침대에서 발작을 일으키던 모습처럼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기억이라 더 생생했다. 유진이 또다시 죽었다. 그는 내가 그 자그마한 양철 상자를 떠올릴 때마다 죽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을 떠올려도 내가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좌절감이 밀려와 엉엉 울고 싶었다. “그 사람을 참 좋아했나 봐.” 세라가 말했다. “하긴 그는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리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세라에게 기댔다. 머리가 세라의 어깨에 놓이자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세라는 한참 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가 대신해줄 수는 없어. 당신이 이겨내야 해.” 세라는 내 얼굴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게 한 다음 말했다. “그가 대신해 줄 수 없어. 대신해서도 안 되고.” “안 되지.” 내가 중얼거렸다. 세라 말이 맞았다. “그가 여기 있다면 당신에게 뭐라고 말할까?” 세라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난 이보다 더한 것도 참아냈어’라고.” 그리고 이런 말도 했을 것이다. 병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설사 인생의 끝이라 해도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p.227
2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더니 낯선 혹성이었다. 보름 정도 그 혹성에 머물렀다. 낮에 하늘을 보면 태양이 두 개 떠 있었다. 한 태양이 다른 태양더러 비키라고 조금씩 떠미는 것처럼 보였다. 밤이 되면 서로 맞물린 두 달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복시(複視) 혹은 이중시(二重視)라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 시신경을 둘러싼 수초가 손상돼 발생하는 MS의 대표적 증상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직접 경험하자 충격을 받았다. 리언을 데리고 브라이언과 유진을 만나고 온 직후부터 복시 때문에 세상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전경(前景)에 보이는 사물은 또렷하게 하나로 남아 있지만, 새로운 내 눈이 시계(視界)를 뒤섞어 내가 움직일 때마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교회 첨탑이 유령을 달고 움직이는 것처럼 농간을 부렸다. 사물은 흐릿한 형체와 하나로 합쳐질 듯하다가 다시 분리돼 두 개로 보였다. p.242~243
이 시기에 내 병은 변화를 거듭했다. 나를 괴롭히던 인지적 혼란은 줄어들고 언어 능력도 개선되는 것 같았지만 신체적 증상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종아리 통증이 허벅지와 사타구니로 번졌다. 시내에 나갈 때면 30분에 한 번씩 쉬어야 했다. 밤마다 두통에 시달렸다. 마치 금속 밴드가 두개골을 옥죄는 것 같았다. 밤새 주먹을 불끈 쥐고 잔 탓에 아침에 눈을 뜨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패였다. 아프지도 않은데 주변 사람을 괜히 걱정시킨다고 생각했던 걸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