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숙선 명창 ***
2002.01.10(설은 9일)자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국악명창 안숙선이 부른 여인천하 주제가 이야기 인데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
[국악이야기] 구음 시나위… 감정의 전달력 가장 강해 (2002.01.09)
“안숙선 명창이 부른 인기 TV드라마 ‘여인천하’ 주제가 가사를 어렵게 구했습니다.
” 이런 글이 인터넷 국악 사이트에 올랐다. 뭐, 주제가라고? 안숙선이 불렀다고? 궁금한 마음에 급히 클릭했더니, 거기에는 한 페이지 가득
“허어이~ 어어으어어~/어이~허어이~어어으어어~ 어어어/허이이 이이 이이이 허어이~어이~”라고 씌어있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TV에서 들어 본 이 노래의 주제가 ‘가사’는 과연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국악 중에서 ‘구음 시나위’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성악을 ‘가사’로
접근한 최초의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천하’의 주제가는 ‘노래’일까? 성악가가 발음하는 ‘허어이~어어으어어~’는 ‘가사’일까? 국악에서는 ‘구음’이라고 한다. ‘인성’ ‘보이스 아츠(Voice arts)’ ‘입소리’와도 뜻이 통하는 구음은 국악기를 배울 때 악기에서 나오는 독특한 소리 특징을 목소리로 모방하여
연주와 함께 하는, 일종의 교육 방법이다. 예를 들면 장구를 배울 때 ‘덩-더 쿵 더러러 쿵 기덕 쿵 덕’이라는 말을 장단에 맞게 입으로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음악의 흐름이 몸에 배게 되고 실제 장구를 치는 기법까지도 익힐 수 있다.
이 구음은 또 교육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인 성악예술 장르를 형성하기도 했다. 성악가는 마치 ‘보이스 아티스트’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 삼아 솔리스트(독주자) 마냥 기악 연주에 합류하여 연주하는데, 이때 성악가는 별 뜻 없는 모음이나 자음을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붙여가며 마치 자기가 악기가 된 것처럼 노래를 한다.
전형적인 틀, 원칙, 또는 가사에 얽매이지 않는 이 구음의 매력은 그 어떤 음악보다 전달력이 강하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면 구음이야말로 음악가의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오는 최고의 감성 음악이라는 느낌이 든다. 음악가의 영감이 온 몸을 휩싸는 느낌, 음악을 듣고 나면, 그와 부둥켜 안고 실컷 울고 난 심정이 들게 하는 음악인 것이다.
구음 시나위 중에서는 안숙선의 ‘지음’ 음반에 담긴 구음, 김소희 명창의 구음이 감상용으로 좋다. 좀 더 원초적인 구음을 맛보려면 ‘진도 씻김굿’이나 ‘동해안 별신굿’ 등의 무속음악에 들어있는 구음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 송혜진 /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안숙선님의 프로필입니다. 불교TV 제작국 제작부PD로 근무하시는 나성근님의 글입니다. 더 알고 싶은 분은 http://myhome.netgo.com/budd/ 에 들르시면 됩니다. ================================================================
인간문화재란 말은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된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70년대 한국일보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들을 연재하면서 쓰게된 표현이다. 당시 이 연재물의 제목이 [인간문화재]였고, 이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들을 일컬러 통칭 [인간문화재]라고 불리게 되었고 오늘날은 명인들을 다른 말로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긴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당시에 문화공보부는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되살리고 전통을 이어가자는 의미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고 각계의 주요 명인들을 문화재로 지정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합리한 모순도 발생하기도 했지만 어째거나 소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는 독보적인 능력과 연륜, 그리고 명인으로써의 자질을 갖춰야만이 얻어지는 칭호인 것만은 틀림없다.
지난 97년, 신문의 문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제호의 기사가 실렸다. "40대의 젊은 국악인 인간문화재 등극.." 그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중견 국악인이며,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소릿꾼 안숙선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기능보유자로 선정된 것이었다. 그녀는 노쇠한 우리 국악계 젊은 바람을 일으키며 판소리의 나이를 젊게 끌어내린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는 소릿꾼이다. 나는 그녀를 감히 말한다. "40대의 젊은 국악인으로 우리 시대의 국악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중이다" 라고.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가야금 병창의 명인, 향사 박귀희 선생(1921~1993)의 자택에서였다. 물론 방송국에서 비공식인 만남이 몇 번 있었지만 그녀와 사적인 대화를 나눴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만남이었기 때문일까, 어색함을 뒤로 하고 몇 마디의 대화에서 그녀의 단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하고 깔끔한 용모,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의 말씨에도 한치의 헛점도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은 상대방을 부담스럽게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도 그녀는 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나는 근자에 그녀와 인사를 했던 사이라는 것을 애써 감추며 사무적으로 그녀를 맞았고, 예정된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윽고 방송이 끝나고나자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저 기억 못하시나봐요?" 나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지난번에 수인사를 나눈 사이인데, 왜 모른척 하느냐는 항변이었다. 고백컨데 나는 성격상 무척이나 낯을 가리는 편이다. 더군다나 상대편이 말을 건네기 힘든 인상을 가진 사람일수록 낯가림은 더욱 심해진다. 나는 그녀와 첫만남에서 근엄과 단단함을 엿봤고 함부로 말을 건네기 힘든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뒤에 안 이야기지만 그녀를 아는 국악인들은 그녀가 명창 김소희와 박귀희선생에게서 소리 공부를 하면서 완벽하리만큼 두 선생의 성격을 물려 받았다고 한다. 깐깐하고 예의바르며 자기 관리에 엄격하며 시간 약속이 철저한 소릿꾼. 깔끔한 무대 매너와 무서우리만큼 자기 일에 성실한 여자. 개인적으로 박귀희, 김소희 선생과 교우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완벽하리만큼 스승을 닮은 여자. 그녀가 바로 안숙선이었다. 어째거나 그 이후, 나는 공식적인 국악 행사에서 그녀를 자주 볼 수 있었고, 처음에 느꼈던 딱딱함은 조금씩 풀려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릿꾼의 운명을 타고난 여류명창>
안숙선은 출생부터 소릿꾼의 길을 걸어야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소리의 고장인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미 아홉살때부터 소릿길로 들어섰다. 그녀의 이모는 가야금의 명인인 강순영이다. 그리고 그녀의 외숙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이며 큰 산맥이었던 명창 강도근(판소리 인간문화재:94년 작고)이다. 국악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녀는 명인 주광덕 선생에게서 소리의 기초를 닦았고 외숙인 강도근 명창에게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동편소리를 익힘으로써 일찌감치 소릿꾼으로써의 행보를 남보다 빨리 했다. 이미 열살 안팎의 나이에 전국에서 열리는 학생 명창대회 휩쓸고 다녔고, 국악계에서는 이미 어린 안숙선의 재능과 앞날을 점치고 있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서울생활을 하면서 소리공부를 하게 된 것은 20세때, 명창 김소희(1917~1995)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공부하면서다. 김소희선생은 이미 안숙선이 어린 시절 그녀를 눈여겨 보았고 여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면서 소리공부를 시켰다.
안숙선은 이무렵부터 김소희 명창에게서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고, 뒤에 명창 정광수에게 [수궁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우는 등 국창급 명창들에게 진수만을 각각 넘겨받았다. 그래서 안숙선은 스승들의 바디를 고루 익혀 시김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몇 번만 들으면 금세따라하는 천부적 자질은 그녀를 [녹음기]라는 별명을 붙게 할 만큼 뛰어난 음악적 감각과 재주가 있었고, 거기에 어렸을 때부터 스승 복까지 겹쳐 뛰어난 여늬 국악인이 누리기 힘든 행운까지 누렸다.
<40대 인간 문화재가 된 큰 별>
앞서 그녀가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및 병창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이 글을 읽은 분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리라 여겨진다. 판소리를 전공한 소릿꾼이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아닌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라니? 사실 여기에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깊은 사연이 있다. 그녀가 명창 김소희에게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던 73년이야기다. 어느날 가야금 병창의 명인 박귀희가 명창 김소희의 교습소를 찾아왔다. 그때 박귀희는 소리잘하고 똑똑한 안숙선을 발견하고 그녀의 재주가 욕심이 났던 것이다. 유달리 제자 욕심이 많았던 박귀희는 김소희와 형님 아우하며 평생을 형제처럼 친구처럼 살아온 터였기에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저 녀석 나 다오"라고 말했고, 김소희는 "그녀석 욕심나며 데려가 공부 좀 원없이 시켜라"며 흔쾌히 승락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말하기 좋아하는 국악계 참새(?)들은 박귀희가 김소희의 애제자인 안숙선을 [뺐어갔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안숙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에 그녀는 무척이나 가야금을 배우고 싶어했고, 그의 스승 김소희 선생을 졸라, 박귀희 선생에게서 가야금 병창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째거나 안숙선의 국악 인생은 이렇게 해서 또다른 행보를 걷게 되었고, 박귀희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녀는 가야금 병창을 전수 받게 된다. 이미 어린 시절, 그녀의 이모이자 가야금의 명인 강순영에게서 가야금을 배웠던 그녀에게 가야금 병창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나 보다. 더군다나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적 감각은 남들보다 빨리 가야금 병창을 이수하게 되었고, 스승도 놀랄만큼 일취월장하게 된다. 당시 박귀희의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배우던 제자들은 안숙선을 비롯하여 강정숙, 윤소인, 조남희, 장영찬, 그리고 탤렌트와 가수로 활동중인 김성녀 등이 있었다. 이렇게 박귀희명창 문하에서 가야금병창을 배우면서 스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받기도 하면서 스승의 가야금 병창과 산조를 사사 받게 되었고, 지난 93년 박귀희 명인이 세상을 뜨자, 문화재 관리국은 그녀를 박귀희의 뒤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안숙선은 20대 시절인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고, 창극단에서 단장 겸 예술감독 직을 역임했다. 그녀는 20여년을 창극단의 단원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창극의 주인공을 도맡았을 정도 광대 기질 또한 천부적이었다. [수궁가]에서 토생원역, [심청가]의 심청역 등에서 보여준 애원성 깃든 소리와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고,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새로운 닉네임이 그녀의 이름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없는 국립창극단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많은 단원들이 그녀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창극에 몰입했다.
1986년 남원춘향제 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87년 KBS국악대상 수상 등으로 명성을 얻은 그녀는 일본 등 아시아권 12개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등 북남미, 유럽 12개 도시의 순회공연 등 세계 속에 우리소리를 전파하기도 했다. 가냘픈 몸매에서 솟구쳐 나오는 우조의 힘찬 소리는 청중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고, 유럽공연 당시 프랑스 한 신문에서는 안숙선의 소리를 [천상의 소리]라고 격찬했을 정도였다.
이미 다섯 마당 완창무대를 가진 그녀는 열살 소녀시절부터 인기를 누렸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 노력파이기도 하며, 모범생이라고 불릴 만큼 가정에 충실한 주부이기도 하다.
이제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새로운 기대를 양 어깨에 짊어져야 할 중견 국악인 안숙선. 어린 시절 자신의 가야금 연주의 초석이 된 이모 강순영과, 단단한 우조의 성음을 가르켜 준 동편소리의 명인인 외숙 강도근 명창, 그리고 시대의 전설같은 여류 명창 김소희에게서 배운 판소리, 또 가야금 병창의 참맛과 국악인으로써의 자세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당대의 스승 박귀희, 이 모든 스승들을 만난 것은 어찌보면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소릿꾼의 길로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안숙선. 이즈음 안숙선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스승보다 더 높은 별로 기록될 날도 멀지 않은 느낌이다.
*주: 현재 안숙선님은 국립창극단 단장직을 벗고 예술인으로 한국종합예술대 교수로 활동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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