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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생
비서로...민간외교관으로...든든한 그림자 역할 ‘톡톡’ 부잣집 셋째딸서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축첩 타파· 부부동반 문화 만들기에 애써 | ||||||
▲ 34년 10월 뉴욕에서의 결혼식 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박사 부부. 신랑은 59세, 신부는 34세였다. 유언으로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바른 태극기’를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아들 이인수 박사(정치학)· 조혜자 부부는 “어머님께선 아버님을 뵈러 매주 금요일 국립묘지에 가시곤 했는데, 80년대 초 거기서 만난 한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님께 ‘오스트리아인이시죠?’했더니 대번에 ‘아니요, 난 한국인이예요’하실 정도로 한국 사랑이 끔찍하셨다”고 회상한다. 그런만큼 이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를 구별 못하고 편의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으로 불렀던 한국 국민의 무신경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시정 물가를 몰랐다던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잉보호로 인의 장막을 쳤다는 등 세간에 떠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혈육으로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
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영부인 시절 축첩 타파에 힘써...임영신 초대 상공장관 임명에 영향력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녀는 꿋꿋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미 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은 도맡았다. 경무대 안주인이 되면서 한 가지 관행을 바꾸려 애썼다. 손님을 초대할 때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들의 회합에 기생이 노래와 춤을 하고 첩이 동행하는 풍습을 바꾸려 한 것이다. 축첩을 금지하는 내용을 임시국회 첫 회기에 반영시키려 하였다. 아내의 보좌를 받아온 이 대통령은 여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 초대 상공장관에 임영신 여사를 임명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검약으로 경무대 안살림을 꾸렸고 ‘쪼끔,쪼끔 사모님’으로 별칭을 얻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의 건강과 식사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일본 총독과 미군정 하지 준장이 살았던 경무대를 전혀 수리하지 않고 지냈으며 목욕통이 짧아서 다리를 펼수 있도록 구멍을 더 파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장원엔 가지를 않고 블라우스는 천을 끊어서 만들어 입고 옷, 양말은 기워 입었고 내외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하였다. 허술한 데가 없었다. 장교들의 도미시찰 여비를 일찍 귀국한 날짜만큼 반납을 받았고 도미유학장교단의 여비가 1.3배 과다 청구되었다고 미국 지도를 펴놓고 설명할 정도로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박마리아 여사만이 아니라 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씨 등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과는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6.25전쟁 초기 석달 간 비망록 기록...영문편지로 세계 각지에 구호손길 요청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기차로 대구를 향했다. 작전상 탈출이었으나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초대사가 영부인의 도쿄 피난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수원, 대전, 부산으로 임시 정부수도를 옮겨가는 누추하고 헐벗은 피난생활은 대통령 부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은색으로 변해갔으나 그의 명랑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과 재빠른 언변은 남편을 늘 생기 있게 하였고, 남편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선 장병, 부상병, 포로 등을 접해야하는 최전방의 영부인이었고 학교, 병원 고아원, 30만명의 과부와 10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한국부인회가 함께 하기도 했다. 피난민의 생활을 둘러보고 미군 병사들도 방문하는 일정도 바쁘다. 항상 한복 긴치마, 앞섭이 긴 저고리, 손에 든 큰가방, 검은 선글라스의 차림이다. 부산에서의 생활환경은 척박했다. 여사는 남편의 체력과 건강을 위한 스케줄을 관리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이대통령을 위로하는 세계 각지로부터 답지하는 글에 답장을 쓴다. 영어로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루는 대통령과 같이 밤새워 하와이와 미주에 있는 친지들에게 그리고 빈에 있는 친정가족에게 우리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대달라고 37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우리 동포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여사의 친정에서 제일 먼저 구호품을 보내왔고 하와이 미주에서도 속속 구호품이 도착했다 전쟁 중에 미국사령관을 만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내외가 함께 나서서 많이 풀어나갔다. 영부인은 6.25일부터 9월 5일까지 전쟁 비망록을 써놓았다. 9.28 수복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과 기쁨을 김활란 박사와 나누기도 했다. 서울 환도 짐 속에 제일 먼저 타이프라이터를 챙기고 대통령의 낡은 스프링 코트을 접다가는 석달 전 한강철교를 건너 남하할 때 침통한 표정으로 자꾸 서울 쪽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괴었다. ‘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YWCA, 한국부인회 등의 활동…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 등과 교우 서울YWCA 회관건립 건축모금 위원회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명예회장, 다울링 대사부인을 회장으로 한 국제바자를 57년 5월 25일 미 대사관저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고 이날 모인 1만2천 달러는 최이권 회장에게 건축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후원금을 박마리아 연합회 회장에게 전달하고 다음해 1958년 6월 23일 기공식에 박에스터와 함께 회관 건설의 첫 삽을 함께 떴다. 임영신이 회장인 한국부인회와의 교류 정도로 관계를 맺었다.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다녀가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5월 29일 출발했다. 이화장에 다시 돌아와 ‘행복한 할머니’로 20여 년 여생 보내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결혼으로 32년 같이 보낸 사랑하는 남편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방지 하와이에서 한스럽게 떠나보내고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생활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상업전문대학 졸업 후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1920년 개신교 자동차경주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 1923년 헬무트 뵈룅과 이혼 1933년 2월 어머니와 구라파 여행 중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 박사 만남 1934년 10월 8일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이 박사와 결혼 1934년 워싱턴으로 독립운동 근거지 옮김 1940년 이 박사의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원제: Japan Inside Out) 원고 타자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워싱턴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도움 1945년 8월 15일 광복 / 10월 16일 이 박사와 함께 귀국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기거 1948년 7월 20일 이승만박사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50년 6·25 전쟁 발발. 임시수도 부산 피난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5월29일 이승만 박사와 하와이 망명길 동행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박사 별세 1970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 20여년 간 이화장에서 생활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1992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