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果川)부터 기는 촌놈
조선왕조(朝鮮王朝)가 1392년 태조(太祖) 이성계가 건국을 하고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왕조(王朝)가 마감되고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의 긴 역사를 가졌다. 세계사의 가장 긴 왕조는 로마제국의 1200년이다. 동로마인 비잔티움제국이 1453년까지 존속하였지만 이것은 로마가 동서(同棲)로 분열된 왕조(王朝)다.
일본이 자랑하는 천황(天皇) 왕조는 1대 진무왕(神武王-기원전 660~585)을 시작으로 125대왕인 지금의 아키히토(明仁1989~현재)왕까지 2600년의 왕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풍이다. 14대까지는 전설적인 신화에 의한 것이고 36대 고토쿠(孝德645~654)때에 처음으로 천황(天皇)이라는 명칭을 사용 한다.(일본역사책 日本書記)
숫자상으로는 일본 천황(天皇) 왕조가 약 1300년이지만 일본은 봉건시대의 무사(武士)집단인 사무라이와 지방의 토호(土豪)세력인 봉건국가(封建國家)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난립하였으며 107대 천왕인 고요제이(後陽成1586~1611)때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히데요시 가 일본 천하를 통일한 것으로 보면 전통적인 일본 왕조는 불과 약 400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필자 주장)
우리역사의 신라 천년, 고구려 660년, 백제 600년 고려470년 조선519년과 같은 단일 왕조는 세계사에 드문 역사이다. 중국역사도 300년을 넘긴 왕조가 없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인가!
때 맞추어 조선왕릉(朝鮮王陵)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조선왕조의 중심지인 서울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오늘 찾은 “과천 대공원”도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과천(果川)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서울 가는 촌놈 과천부터 긴다” 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과천은 시골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도시다.
지금은 서울의 관문(關門)을 제1한강대교를 건너 용산 일대를 말하지만 조선시대의 한양도성 관문은 과천(果川)이었다.
충청, 전라, 경상도 사람들은 한양을 가기위해서는 천안, 수원을 거쳐 과천을 지나야 한다.
토박이는 낯선 사람들에게 텃세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과천 현감은 얼마나 끗빨이 좋았으며 과천 주민들은 얼마나 어깨를 재었겠는가. 그리고 남태령(南泰嶺) 을 넘어야 한다.
남태령(南泰嶺)은 남쪽에 있는 큰 고갯마루라는 뜻인데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지극한 효성에서 비운(悲運)에 죽은 아버지 장헌세자(藏獻世子-사도세자)를 그리워하여 수원에 있는 묘(墓)인 융릉(隆陵)을 참배하러 다닐 때 처음에는 이 고개를 넘어 과천을 지나갔다.
남태령(南泰嶺)에 대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예전에 남태령은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여우가 많이 나타났다 하여, 호현(狐峴-여우고개)라 불러 오고 있었다.
그날도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사도세자의 능원 행차길 에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잠시 쉬어가게 하면서 한 시골 노인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니다』
하고 임금 앞에서 여우고개라 말하지 않고 고개의 이름을 다르게 고치어 아뢰었다.
그런데 정조임금은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고 일찍이 고려조의 명장(名將) 강감찬(姜邯贊)이 고개를 넘다가 여우들이 사람을 홀리는 장난이 심하여 크게 꾸짖기를 『앞으로 너희 여우들이 이 고개에서 사람들을 홀리면 씨를 멸종 시키겠다』고 호령한 후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들어 왔기 때문에 시골노인의 『남태령(南泰嶺)』이라는 고개 이름이 틀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자(仁慈)한 정조임금도
『네가 어찌 짐에게 거짓 이름을 고하느냐?』
하며 크게 꾸짖으시면서 시골 노인에게 고개 이름을 다르게 고한 사유를 묻자
노인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해명을 하기를
『이 고개는 원래 호현(狐峴-여우고개)이 오나, 전하께서 하문하시는데 “여우고개” 라는 부정(不淨)스러운 이름을 아뢰기가 불경(不敬)스러워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였사옵니다.』
노인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정조는 잠시의 노여움을 풀고, 시골 노인을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고 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 촌로(村老)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후손이 지금도 남태령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과천시에서는 남태령(南泰嶺)의 옛길을 복원하고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에도 『남태령(南泰嶺)』이라는 큰 돌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조각한 것이라 한다.
집자(集子)라는 뜻은 유명인(有名人) 글씨를 문헌이나 다른 서책 등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은 글씨이다. 불 에탄 숭례문(崇禮門)의 현판도 복원 후에는 양녕대군의 글씨를 집자(集子)할 것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다.
매번 행차에 남태령이 매우 험하여 고생이 많고 길이 험하다 보니 말과 수행하는 신하들이 너무 고생이 많아 신하들의 건의에 의하여 행궁경로를 마포를 경유하여 노량진을 거쳐 지금의 시흥으로 경유하게 되었다. 시흥(始興)이라는 이름도 정조대왕이 하룻밤 잠을 자고 난후『비로소 마을이 발전하였다』하여 생긴 지명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과 과천(果川)은 인연이 깊다.
경상도 관찰사이든 추사의 선친(先親) 김노경(金魯敬)께서 회갑연을 앞두고 과천에 별서(別墅)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을 지으면서 과천과 추사선생의 인연이 시작된다.
별서(別墅)란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하는데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추사는 젊은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았고 선친께서 돌아가시자 3년상을 위해 과지초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추사 선생이 북청 유배지에서 돌아와 4년 동안 말년을 보냈던 곳이 바로 과천의 과지초당이었으며 추사가 72세때 일생의 마지막 글씨가 지금의 삼성동 봉은사에 있는 『판전(板殿)』이다.
이 글씨는 미술·문화재 전문 출판사인 학고재(學古齋)에 의하면 추사가 운명하기 얼마 전에 쓴 소위 종필(終筆)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사용한 호(號)가 과천에서 살고 있는 노인이라는 뜻의 『노과(老果)』이다.
과천시 문원동에는 “찬 우물” 이라는 『가자(加資)우물』이 있다.
정조대왕이 이곳 우물의 물맛이 좋아 가자(加資)라는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다.
마치 세조 수양대군이 속리산 법주사를 찾을 때 가마가 소나무의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에 세조는 소나무를 가상히 여겨 정이품송(正二品松) 의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가자(加資) 우물 부근에는 영조(英祖-정조의 조부)때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묘가 있다. 김약로는 노론의 영수 문성국과 같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김약로의 묘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려 가는 과천 에 있으니 정조로서는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이곳을 지날때는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태령이 고개가 험하여 시흥길로 행궁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안으로는 김약로의 묘가 보기 싫어서 길을 바꾸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과천에는 청계산, 관악산, 삼성산, 고시촌, 연주대, 등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가 많다.
이제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 세계 속에 웅비(雄飛)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역사 또한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 비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역사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국민이 우리역사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교육수준에 걸맞게 역사가 숨 쉬는 기왓장 하나 왕릉한기에도 관심을 갖어야 진정한 문화인이며 뼈대 있는 역사 민족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