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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74) 아하시야- 누구 옆에 계십니까? 역대하 22장 1-9절
오늘 본문은 여호사밧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였어도, 저 아합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이 오늘 얼마나 다윗왕조에 큰 상처와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람이 형제들을 죽이고, 산당을 세우며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 때, 엘리야가 글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으나 돌이키지 않지요? 나라가 공격을 당하고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내들을 다 빼앗기는데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결국 창자에 병이 들어 쏟아지도록 고생하다가 아끼는 이가 없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 연합으로 말미암는 고통과 후유증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호람에게 막내아들 하나가 겨우 남아 있었는데, 그가 아하시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스로 다윗의 왕조를 지켜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떠했다고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의 삶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세 군데만 수정하고 넘어가겠습니다. 21장 17절에, 막내아들 ‘여호아하스’가 아니고, ‘아하시야’라고 옆에 써주시면 덜 헷갈리실 것 같습니다. 개역한글판에서도 ‘여호아하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다시 개정판에 적은 것 같습니다. 또 22장 6절에도 ‘아사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도 ‘아하시야’라고 옆에 써주십시오. 다른 성경들 새로 나오는 성경들은 그래도 ‘아하시야’로 고쳐서 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장 2절도 ‘사십이’ 세가 아니고, 22세입니다. 아버지 여호람이 40에 죽었고 막내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42세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기록해주신 성경을 잘 번역할 수 있도록, 사람의 실수와 오류를 찾아 바르게 읽어냄으로 성경이 성경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자, 이어가겠습니다. 여호람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얼마동안? 네, 딱 1년 동안입니다. 가장 짧은 기간 왕을 했던 이인데, 왜 그렇게 짧았는지 오늘 본문 2-4절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가 패망하게 하는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 같이 악을 행하였더라”(대하22:2-4)
그래요. 여호사밧 이후 남 유다의 암흑기를 살펴보면, 이 중심에는 아합의 딸이자, 여호람의 아내였던 아달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람(아들)과 아하시야(손주)는 여호사밧(조부)의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합의 길을 따르지요, 유다왕들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왕들의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때요? 여호람은 모든 것을 다 잃고 아끼는 자가 없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 역시 어머니 아달랴에 의해서, 본문의 말씀대로 하면,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길은 어떤 길? 패망하게 하는 아합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과 같이 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저주받아 죽을 길입니다. 개들이 피를 핥게 되는 비참하게 죽는 길입니다. 아합에게 속한 자는 다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성읍에서 죽은 자는 새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새들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왕상21:24). 자, 오늘 아하시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아시는 대로 아합이 죽고 이세벨이 곧 죽게 되는데, 이 일에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님시의 아들 예후를 통해서, 그리고 그와 마음을 같이 했던 요나답이라고 하는 신실한 레갑족속이 함께 이뤄내었던 일이지요. 저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 사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 아합의 아들 요람의 죽음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을 살펴보며 생각해보겠습니다.
일전에 아합과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아합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것 기억나시지요? 바로 여기에 400명 거짓선지자와 미가야의 대결이 나왔던 것이지요? 하나님께 여쭈었음에도, 말씀은 묵살되었고 선지자는 옥에 갇혔습니다. 올라가면 안되는 전투에 기어코 올라가더니, 오히려 변장하고 들어간 아합에게 하나님의 저격이 이뤄집니다. 아람의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갑옷 솔기를 꿰뚫었고, 아합이 중상하지요. “나로 나가게 하라” 명령하지만, 그곳은 이미 온통 뒤엉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적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저녁 때까지 싸우다가 죽습니다. 그 병거의 피를 씻을 때 아합의 피를 개가 핥았던 것입니다. 그때 함께 했던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아람의 군사들을 감동시키시매 살려서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 길르앗 라못전투 2차전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 것일까요? 아합의 아들 요람이 오늘 갓 왕이 된 아하시야를 불러서, 마치 아합이 여호사밧을 불러서 전투에 나간 것처럼 함께 전투에 나갑니다(왕하8:28). 아람왕 하사엘이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데, 북 이스라엘의 요람이 부상을 입고 퇴패합니다. 반면 저 아하시야는 또 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을 지켜주시듯 저 전장에서 지키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남유다의 군사들과 함께 안전하게 퇴각을 할 수 있게 도우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자리를 벗어났나 싶었는데, 오늘 이 아하시야가 기어이 제 발로, 저 부상당한 요람, 그로말미암아 병을 얻은 요람을 위로하겠노라고 사마리아 이스르엘로 병문안을 갔던 것이지요.(왕하 8:29) 악인들끼리 서로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일전에 잠시 말씀드린, 악인들의 ‘두레’와 ‘품앗이’ 같은 것처럼 말이지요.
그때 였습니다. 엘리사가 보낸 청년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었고(왕하 9:6-7), 예후가 그와 함께한 장수들과 함께 병거를 미친 듯이 몰아서 이스르엘로 달려왔던 것이지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6-7절입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이 병이 있으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방문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입었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하시야가 갔다가 요람과 함께 나가서 님시의 아들 예후를 맞았으니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이더라”(대하22:6-7)
그래요. 여호사밧은 길르앗 라못에서 생명을 건진 후 아합을 떠났지만, 오늘 아하시야는 부상당한 요람을 다시 찾아 이스르엘로 갔던 것이지요. 저 이스르엘 망대에서 파수꾼이 늦지 않게 예후를 발견하고 사람을 여럿 보내보았으나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요람이 아하시야와 함께 그를 맞으러 나갑니다. 그러나 예후의 걸음은 요람의 바램처럼 평강으로 오는 걸음이 아니었지요.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왕하9:22)
그래요. 열왕기하가 증언하듯, 이들이 마주선 곳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이었습니다.(왕하9:21) 아버지가 마련해둔 밭에 푸르고 싱싱한 채소가 길러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흘린 나봇의 피를 하나님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계셨고(왕상21:19), 정확하게 그곳에서 피를 흘리도록, 그곳에서 정확하게 개가 그 피를 핥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외마디 일갈성은 요람 자신도, 아하시야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마저도 끝내 하나님을 외치고 하나님을 부르지 못했던 이들의 마지막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요, 그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서 엎드러진지라”(왕하9:23-24) 그리고 이어지는 26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왕하 9:26)
그래요. 저 이방 아람은 요람을 부상 당하게 할 뿐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오늘 예후를 통해 그의 염통을 꿰뚫으셨던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돌이키지 못하고 뉘우치질 못하고, 생명 구하기를 간구하지 못하니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조차 지키질 못하니, 자기를 찾아온 사람도 지키질 못하지요.
네, 이번에는 요람만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에는, 아하시야까지 계획에 두셨던 것이지요. 본문 7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입었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대하22:7a) 그래요. 오늘 그곳에 요람을 위로하러 내려갔던 아하시야마저 저 예후의 손에 죽고 말았던 것이지요.(왕하9:27) 그렇게 저 아하시야는 남유다의 왕중에 유일하게 북이스라엘땅, 사마리아에서 죽은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호람은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이 들어 아끼는 이 없이 죽었고, 아하시야는 악인 옆에서 악인과 함께, 남유다의 왕이 타국에서 객사를 하였노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은 또 무었을 말하고 있지요? 22장 8절, 아하시야만 죽지 않았지요?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는데, 유다의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 자기 조카들이 모두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후로 하여금 아합의 집을 심판하게 하실 때에 유다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서 죽였더라”(대하22:8) 그들의 죽음을 평행본문 열왕기하에는 이렇게 조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42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13-14)
보십시오. 악인과의 교제,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와의 동행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자식이 악을 행하고, 그 손주도 비참하게 죽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이들까지 말입니다.
바라옵기는 먼저 제가 저와 동행하고자 하는 여러분을 죽게 만드는 악인이 아니길, 악인이 되어가지 않기를 늘 기도해주시고, 여러분들 역시 악인과의 동행을 멈추실 줄 알고, 기왕이면 애시당초 시작도 하지 않으실 수 있는 은혜와 지키심이, 선하고 귀한 분별력과 이끄심이 늘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며 아람과의 전투에서 구해주셨건만, 다시 요람을 찾아 기어이 죽을 자리로 내려가는 오늘 저 아하시야와 같은 미련함이 우리에게 없기를, 1년밖에 왕을 하지 못하고, 그의 친족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다 죽임을 당해야하는 안타까운 아하시야가 되지 않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도 다시한번 성경은 우리 가운데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의 곁에 머물고 있느냐, 또 다시 누구를 찾아가고 있느냐가 나는 물론 우리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동맹을 맺고 누구와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은 어떤 일입니까? 저가 악을 행하는 사람인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 더 이익이 되기 때문에 조금 더 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저와 손을 잡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저 사람에게 불어닥치는 폭풍같은 심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보다 내가 덜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폭풍은 무서운 것입니다. 한 순간도 악한 사람 곁에 서지 말고, 걷지 말고, 앉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요람의 죽음과 아하시야의 죽음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요람 곁에 있다가는 다 같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저녁에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여럿이 함께 걷는 길이라고 반드시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좁은 길이요, 홀로 걷는 길이어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 안전한 것입니다. 굶고 목마르고 힘들어도 하나님과 걷는 길이 안전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특별히 생명길, 사명의 길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듯, 내 짊어진 것들을 내려놓아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신을 벗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끊지 못하고,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무엇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우리는 길을 가려 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보화를 짊어져야 할 어깨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짊어지고 가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오늘도 그리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요람과 아하시야는 악한 길을 함께 걷다 함께 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하나님의 기대를 모른 채,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릇된 길을 걷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이 필경 사망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여지껏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으니 나도 이제 저들과 함께 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으시면 안됩니다. 여지껏 괜찮았으니 이제 망할 시간이 머지 않은 것입니다. 여지껏 참고 또 참으셨으니 이제 우리의 염통에 화살을 꽂으실 저 예후에게 기름 부으실 시간인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흔적도 자취도 찾을 수 없도록 망해버린다고 성경은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우리의 시선과 마음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돌보심을 찬송하며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영광 광채가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주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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