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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경기도(京畿道)
(위치. 境略)
경기도는 전국의 중앙에 있으니 동북쪽은 강원도와 접하고 서북쪽은 황해도와 연하고 남쪽은 충청도와 인하고 서쪽은 바다를 임하니 동서가 320여 리요, 남북이 400여 리이다. 북위 37도로부터 동경 127도에 이른다.
(연혁)
본도는 고조선과 마한의 지역이니 한강 이북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가 후에 대방군이 되고, 이남은 마한의 땅으로 백제가 아우른 바 되었다가 그후 고구려 남 평양과 신라 북 한산주(漢山州)가 되어 서로 침범하여 빼앗다가 급기야 고구려․ 백제가 망하니 신라가 한주(漢州)를 설치하였다. 고려가 통합한 후 성종 14년에 개성부에서 맡아 다스리다가 관내도로 바뀌었다. 현종 9년에 개성부를 없애고 정주, 덕수, 강음 3현으로 개성에 속하게 되고 송림, 임진, 면산, 임강, 적성, 파주, 마전 7현으로 장단현에 속하게 하여 상서도성에 직속으로 두고 경기(京畿)라 불렀다.
** 충숙왕 원년에 양광도로 바뀌었고 공양왕 2년에 경기 좌우도를 나누었다. 태종 2년에는 관찰사 각 1인을 두었다. 태종 13년에 사방 원근을 적당히 헤아려 연안, 백천, 우봉, 강음, 토산은 황해도에 돌려주고, 이천은 강원도에 딸리게 하고, 충청도 여흥부 안성, 양지, 양성, 음죽 및 강원도 가평 등 현을 쪼개어 나누고 좌우도를 합하여 경기도라 처음 정하였다. 세종 16년에 안협은 강원도에 내어 주니 무릇 4부 34개 군이다.
(지세)
본도는 북동은 산악이 많고 서쪽은 바다와 만, 섬들이 많다. 한강, 임진강 2 개의 큰 강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운수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또 황도의 소재지인 까닭으로 정치상 문명의 중심이 되어 사방 화물이 부챗살 모이듯 하니 실로 제왕의 웅장한 고을이요 산하 중 장대한 땅이다.
(山嶺)
경기도의 산맥은 세 갈래로 나뉘니, 첫째 갈래는 문천곶 여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황해도를 지나 송악산, 천마산이 되고, 둘째 갈래는 회양 분수령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평강, 화천, 영평 등지를 지나 양주, 도봉, 삼각산이 되고, 셋째 갈래는 속리산으로부터 서북으로 달려 죽산, 용인, 수원, 광주 등 여러 산을 이룬다.
삼각산(일명 부아악 또는 화산)은 한성 북쪽의 진산(鎭山)이다. 백운, 국망, 인수 3봉이 하늘 가운데 우뚝 솟아 세 갈래 연꽃과 같으므로 삼각이라 하였는데 그 정신 기세가 만화조천(萬火朝天)의 모습이다. 그 높이는 2,634척이다. 예전에 백제 온조왕이 이 산에 올라 도읍하여 살 만한 땅을 바라본 산이 바로 이 산이니 정상에 올라보면 황도(皇都)의 왕성하고도 아름다운 기상과 수백 리 산천의 자연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진다.
백운대는 높고도 험한 바위로 이루어져 날고 뛰는 형상으로 푸른 하늘에 닿아 있으며 그윽한 샘과 사나운 여울이 폭포를 이루고 있다. 바위 사이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빽빽한 속에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하여 이에 비길 절경이 없다. 태조 이성계가 어렸을 때 이곳에 올라 지은,
引手攀蘿上碧峰 (담쟁이 넝쿨 더위잡아 푸른 봉에 오르니)
一庵高臥白雲中 (작은 암자 하나 백운 중에 누워 있었네)
이란 시가 있어 백운대라 이름하였다. 백운대를 따라 남으로 내려 오면 남경대니, 태조 조에 중 무학에게 명하여 이곳에 올라 천하를 보았으니 국망봉이라 하였다. 산의 허리에 중흥사의 샘돌이 기이하더니 북한산성을 쌓을 때 모두 깎여 평평해졌다. 성의 둘레는 수십 리에 달하며 산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절벽에 임해 있어 수비가 견고하다. 그 안에 별궁과 사원이 있고 역대 보배롭게 간직해야 하는 사고(史庫)를 두었다.
백악은 삼각산, 만경대의 남쪽 가지이니 곧 황성 경복궁의 북쪽 진산이다. 그 형국이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은 모란과 같아 정기가 빼어나다. 높이는 1,296척이며 그 서쪽은 인왕산이니 바위가 뾰족하고 날카롭다. 그 동쪽엔 타락산이 있다. 목멱산(일명 인경산, 종남산)은 그 남쪽에 있으니 높이는 853척이며 정상은 잠두봉(속칭 갈두, 용두)이니 소나무가 울창하며 그 아래로 사대부의 정자가 많다.
남한산(일명 일장산, 주장산)은 한성 동남쪽 40 리에 있어 그 형국이 삿갓과 닮았다. 백제 온조가 위례성으로부터 이 산 아래에 도읍함으로 이제 산꼭대기에 온조왕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산성은 신라 15대 경덕왕 때 돌로 쌓았는데 조선 인조 4년에 다시 쌓아 황성의 보장을 담당하게 했다. 이를 위해 수어청을 두었다. 아홉 군데 절을 짓고 승도를 보충하여 통괄사 1명을 두고 매년 초에 각도에서 승정을 선발하여 무예를 익히게 하고 이곳에 머물러 지키게 했다.
천마산은 개성 북쪽에 우뚝한 산으로 많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해 웅장한 기세를 떨치고, 성거산과 오관산이 좌우로 연해 있으니 그 중간에 대흥동천이 있다. 동천에 맑은 샘과 사나운 여울이 솟구쳐 나와 만 길 폭포를 드리우고 그 아래는 또 천 길 맑은 못을 이루니 곧 박연폭포이다. 그 위에 관음굴과 구담이 있으니 물 아래 흰 돌이 속까지 환히 트여 밝으며 암벽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군데군데 박혀 있고 수목은 울창하여 여름날에는 녹음이 가득하고 가을철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물 아래 거꾸로 비쳐 참으로 또 다른 세상을 이룬다.
숙종 조에 산성을 쌓으니 대흥산성이다. 밖에서 보면 위태하도록 험준하고 안은 고저가 없이 평탄하니 참으로 자연의 요새지라 아니할 수 없다.
송악은 처음 이름은 부소갑, 곡령(일명 송악, 신고, 청목)이니 곧 개성의 진산이다. 그 남쪽은 만월대로 고려 궁궐의 옛터요 그 북쪽은 자운동으로 자연이 그윽하여 고려 재상들의 별장이 많고 그 서북쪽은 영통동과 화담의 자연이 특별히 아름다워 서경덕이 은거하던 곳이다. 송악의 남은 용수산, 진봉산으로 철쭉이 피는 계절이 유명하여 유득공의 시에,
‘進鳳山中紅躑躅 春來猶自發層層’이라 하였다.
마니산은 강화도 남단에 있으니 이 산꼭대기에 단군의 제천당이 있어 높이가 10척이요 위쪽은 모가 나고 아래쪽은 둥글어 참성단이라 하고 그 동북에 전등산이 있다. 단군이 왕자 3인을 데리고 성을 쌓음으로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이라고 이름한다.
영평의 백운산과 적성의 감악산과 양주의 불곡산, 아차산, 수락산은 기보(畿輔)의 동쪽에 이어져 있고 지평의 미지산, 양근의 용문산, 마유산과 여주의 환희산과 죽산의 칠장산, 정배산은 동남에 솟았으며, 과천의 관악산, 청계산과 수원의 광교산, 석성산과 용인의 보개산과 안산의 수리산과 양성의 백운산은 강남에 대치하고, 부평의 안남산(계양산)과 통진의 문수산과 인천의 소래산, 남양의 해운산은 한강의 서남쪽 높고도 큰 산이다.
고양의 현달산과 파주의 파평산, 회음령과 교하의 심악산은 서북에 솟아 있고, 장단의 월봉산, 망해산, 풍덕의 덕적산은 임진강 서쪽에 나열해 있으니 덕적산 꼭대기에는 고려 최시중의 사당이 있다.
(하류)
경기도에 2대 하류가 있으니 남은 한강이요 북은 임진강이다. 한강은 옛날 이름으로 열수 또는 한산하(漢山河)니 그 발원지의 하나는 오대산에서 나와 강원도 정선, 영월, 평창 땅과 충북 영춘, 단양, 청풍 땅을 지나 충주 서북에서 달천(일명 단월강)과 합하고 원주 서쪽에서 안창수(安昌水, 일명 섬강)와 합하여 경기도 첫 경계지인 여주에 이르러 황려강이 되고 양근(陽根)군 남에 이르러 대탄, 월계탄이 된다. 대탄은 물속에 바위가 가로로 잘려 있어 물이 많으면 보이지 않고 물이 얕으면 파도가 솟구쳐 왕왕 화물선이 조난을 당하므로 고려 때 바위를 깨뜨려 보다가 공역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다가 조선 세조 때 다시 한번 시도하였으나 미진하니 그 험함을 염예(灩預)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양근 서북에서 춘천 소양강과 홍천강 하류 용진강이 만나고 광주 동에서 도미진(일명 두미천)이 되니 강가 석벽에 험한 벼랑길이 마치 실같으므로 세상에서 월계, 두미 양천(兩遷)의 험난함에 비교한다. 그 하류는 광진, 삼전도(三田渡, 송파강), 두무포 위에 옛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압구정이 있고, 삼전도에 저자도가 있으니 고려 한 종유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한성 남에 이르러 비로소 한강이라 일컬으니 장강(長江)이 물위에서 떠돌고 푸른 파도 만 이랑이나 된다. 이로부터 사평진(또는 서빙고), 동작진, 노량, 용산이 되니 강촌에 어가(漁家)는 연안에 즐비하고, 돛폭에 바람을 실은 배가 창파에 분주하다. 공경 귀족의 정자와 누대, 별장은 아래 위에 흩어져 있어 금빛, 푸른빛으로 맑게 비친다.
근래에는 경인, 경부 철도의 교량이 노량을 가로지르고 전차의 궤도가 용산까지 부설하므로 굉굉 은은한 기차, 전차의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인천 바다를 통하여 화물의 운송을 기선으로 빠르게 나르고, 강의 연안 곳곳에 서양식, 일본식 외국인의 집들이 반 이상을 점유하여 마을의 혼잡하고 시끄럽고 귀찮음이 지난날과 같지 않다.
용산은 곧 용호니 한강의 물줄기가 이 용산 남안으로 따라 흐르고 또 한 갈래가 북안 아래로 날카롭게 빨려 들어와 십 리 너른 호수를 빙 돌게 만든다. 소금창고, 모래 언덕이 서쪽으로 비스듬히 펼쳐지고 그 가운데 연꽃이 빽빽이 피어나 풍경이 절승이라 고려 때 왕과 귀족들, 나그네 시인이 이곳에 와서 머물며 이를 감상하였다. 나라가 안정되어 소금 염창사안이 어느날 갑자기 조수에 파괴되고, 바닷물이 용산에 들이닥치며 팔도 조운이 용산을 중심으로 정박하며, 만리창을 두어 각도의 공세미를 쌓아 두었다.
강이 용산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 갈래는 남안으로 시흥에 이르러 방학호를 이루고, 또 한 갈래는 서쪽으로 똑바로 흘러들어 마포와 서강이 되고 양천의 동쪽에 이르러 두 갈래가 합쳐져 양화도가 되니 그 동에는 옛날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고 모래섬과 모래 사장이 널리 퍼져 있다. 갈대숲에 목동의 피리와 어부의 노래 소리 들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또 서북은 공암진이 되니 예전에 형제가 한 배를 타고 건너다가 금덩이를 던졌다는 곳이다.
김포군에 이르러 고도강(孤島江)이 되니 바다가 가까움으로 물은 짜고 흐리다. 교하 서북에 이르러 임진강과 만나고 통진 북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고 서남으로 갑곶진이 되어 강화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갑곶의 남과 마니산의 북에 홍수로 무너져 내린 산맥이 수중에 가로놓여 문지방과 같으므로 손돌항이라 이르니 지난날 각도 세선(稅船)이 이곳에 이르면 조수가 드나드는 시각을 맞추어 지나가되 만약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좌초를 면치 못하였다.
임진강은 옛날에는 대수(帶水, 七重河)라 불렀으니 백제 온조왕이 패대이수(浿帶二水)를 건넜다함에 대수가 바로 이 강이다. 그 발원은 함경도 문천, 노령에서 나와 강원도 이천(伊川), 안협과 황해도 토산을 지나 경기도 삭녕군 남에 이르러서 우화진이 되고 연천군 서에 이르러 휴류탄, 장파도가 되고 마전군 남에 이르러 대탄강(양주)과 합류하여 종연이 되고 적성군 북에 이르러 구연강, 이진(배나루)이 되고 장단부 동에 이르러 두기진(일명 장단도)이 되니 양안에 푸른 바위가 개의 어금니 같이 출몰함이 6,70리에 이르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고려 태조가 일찍이 놀고 즐기던 곳으로 민간에서 아직까지도 부르는 ‘장단가’의 땅이다. 또 호로탄은 옛날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신라 칠중성을 공격할 때 병사들을 호로하에서 잃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임진 고현(古縣) 동에 이르러 임진도가 되니 그 험함이 마치 성 모양을 이루어 실로 서쪽 길의 요충지가 된다. 교하군 북에 이르러 낙하도(洛河 나루)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한강과 합쳐진다.
예성강은 한강, 임진강 2대 강 외의 작은 강이다. 그 발원지는 황해도 수안군으로 곡산, 금천을 지나 개성부 서쪽에 이르러 이포, 전포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이 강이 되니 고려 때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 내왕할 때 이 강에서 배를 띄움으로 예성이라 이름 붙여졌다. 전포(錢浦)는 당 선종이 상선을 따라 건너올 때 조수가 빠져 온통 진흙탕 길이 되니 그 진흙탕 길에 돈을 깔고 땅으로 올라왔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그 흐름이 또 벽란도가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해만과 도서)
제물포는 북위 38도 28분과 동경 126도 37분에 위치한 강화만 안쪽 한강 하구 동북 언덕에 있으니 한성과 그 거리가 80리이다. 개국 492년에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제일 먼저 개항한 곳인데 땅이 인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천항이라 이름 붙였다. 앞에는 월미도와 소월미도, 증도 등 작은 섬들이 둘러 싸고 그 안은 작은 항만을 이루고 그 밖은 외항이니 내항은 협소하여 2천 톤 이상 선박 출입을 금하고 각국의 군함과 큰 선박은 모두 외항에 정박하게 한다. 경인 철도를 부설한 후 1시간 여에 경성을 통행하니 운수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수륙의 화물이 부챗살처럼 모여 들어 상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 각국의 거류지는 일.청 양국인의 집들이 아주 많다.
남양만은 남양 서쪽 바닷가에 있으니 마산포라 불리기도 한다. 인천항과 같이 해수를 안고 있는데 만의 안쪽 수심이 깊어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다.
화량만은 마산포 남에 있으니 옛 첨사가 진을 두었던 곳으로 바위 맥이 바닷속으로 이어져 높이 솟고 굴곡이 져 선박의 왕래가 불편하다.
용포는 조수 간만이 심하여 다만 배를 묶어 정박해 둘 뿐이다.
내포는 경기, 충청 양도 사이에 육지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아주 큰 만이다. 그 남은 아산, 면천의 땅이니 만의 안은 심히 넓어 군함이 왕래는 하되 정박은 어렵다.
강화도는 남북이 백 여리요 동서가 50리이니 서남은 바다를 면하고 동북은 강이 두르고 있는 한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북은 풍덕, 승천포를 사이하여 강안(江岸)이 모두 절벽으로 절벽 아래는 진흙 뻘이라 배댈 데가 없고 오직 승선포 대안과 갑곶진 두 곳에만 간신히 뱃길이 통하니 이 두 곳만 지키면 그야말로 하늘이 만든 요해지(要害地)이다. 이는 고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해 강화로 이도했을 때 감히 침범치 못한 걸 보면 자명하다. 그 땅이 요해지이기에 막영을 설치하고 방어를 엄히 하였는데 인조 정축년 방어가 허술해졌을 때 청병(淸兵)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때 청장이 통진 문수산에 올라 온 섬의 지형을 감지했기에 수비에 실패하게 되니 숙종 조에 문수산성을 쌓게 하고 영조 무렵에 북쪽 연미정으로부터 남쪽 손돌항에 이르기까지 강성(江城)을 축성하고 강가 진흙 뻘을 토석으로 메워 강안을 견고하게 하니 인마가 통행하고 선박의 왕래가 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3년에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교동도는 강화도 서방에 있으니 길이는 30 리요 폭은 10 리이다.서북으로 비끼어 황해도 백천, 연안, 용매 여러 섬과 마주 보고 있다. 섬 전체가 모두 바위로 되어 있고 중앙에 화개산이 있으니 이전에 통어영을 설치하고 경기, 황해, 평안 3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방비하였다.
영종도는 길이 20 리요 폭이 10 리이니 강화도 동남에 있어 첨사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이제 고종 13년에 일본 전함과 대포를 쏘던 곳이다. 섬 안에 백운산, 석화산이 뾰족하게 솟아 있고 산기슭에 밭과 들이 약간 있다.
연평열도는 대연평, 소연평, 경배, 장도 ,만형도 등을 아우르는 말이니 대개 교동 서해 중에 흩어져 있고
대부도, 소부도는 화량만 10 리에 있다. 전도가 비옥하여 벼곡식이 넉넉하고 물고기,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그 바닷속에 바위 줄기가 굴곡져 있어 해수가 심히 얕다. 병자년 강화가 함락되었을 때 호병이 추격하자 섬 사람들은 바위 줄기를 타고 달아났는데 호병은 그걸 모르고 뒤를 따르다가 모두 물속에 함몰되었다.
대부도 서쪽 30 리에 영흥도(연여 또는 제비섬)가 있으니 옛날 고려말에 종실 익령군 기(琦)가 나라의 위급을 알고 성을 고치고 왕실을 버리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는데 그 자손이 아직까지 생존하여 말을 기르며 산다. 익령군이 기거하던 집 3간을 봉쇄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연평 서편에 벌이어 있는 여러 섬들은 수심도, 독협도, 선협도, 풍도, 황자도 등이니 푸른 덩굴들이 창창 번성하여 소와 말의 목장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해중에 암초가 무수하여 선박의 내왕이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도회.승지)
한성은 본래 백제의 고도로 고구려 장수왕이 취하여 남평양이라 하고, 신라 진평왕이 취하여는 신주(新州)라 하다가 또 북한주, 한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한양군이라 고쳤다. 고려 초에 양주라 하였고 성종이 좌신책군이라 하고, 문종이 승위 남경이라 하고, 충렬왕이 한성부라고 고쳐 불렀다.
조선조 태조가 북은 백악과 삼각산을 뒤로 하고, 남은 목멱산(남산)을 마주하고, 동은 타락산과, 서는 인왕 여러 봉이 둘러싸고 보호하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한강이 그 남을 흐르니 산하의 형세가 실로 전국에서 가장 종요로운 곳이다.
태조 5년에 8도 백성을 뽑아 경성을 석축하니 그 둘레가 9,975 보(步)요, 높이가 4백 척 2촌, 문을 세움에 남은 숭례문, 북은 숙정문, 동은 흥인문, 서는 돈의문이고 동북은 혜화, 서북은 창의, 동남은 광희, 서남은 소의문이다. 백악의 남에 경복궁을 세우니(태조3년) 궁성의 4문은 남은 광화, 북은 신무, 동은 건춘, 서는 영추문이다.
정전은 근정전이요, 기타 사정, 연생, 경성(후에 강령전으로 고침), 교태, 함원 등 제전과 청연, 융문, 융무, 경회 등 여러 누대가 있으며, 경복궁의 동에 창덕, 창경 2궁이 있으니 맑은 샘과 흰 바위돌과 푸르른 소나무 삼나무 숲은 옥류천과 어울려 궁궐 정원에서 제일이다. 경복궁 서남쪽에 경운궁이 있으니 옛날 월산대군의 집이다. 선조 계사년에 용만으로 순행했을 때 궁궐이 불타 없어졌기에 잠시 머무르던 궁으로 이제 광무 원년에 거처를 옮기니 정문은 대한문이요 포덕, 영성, 평장 등 문이 있다.
성안을 5서(署) 49방(坊)으로 나누니
중서는 징청, 서린, 수진, 견평, 관인, 경행, 정선, 장통 등 8방이요
동서는 숭신, 연화, 서운, 덕성, 승교, 연희, 광덕, 천달, 흥성, 창선, 달덕, 인창 등 12방이요
남서는 광통, 회현, 명례, 대평, 훈도, 성명, 낙선, 정심, 명철, 성신, 예성 등 11방이요
서서는 인달, 적선, 여경, 황화, 양생, 신화, 반송, 반석 등 8방이요
북서는 광화, 양덕, 가회, 안국, 관광, 진장, 명통, 준수, 순화, 의통 등이다.
가구(戶)는 4만2천 6백30호요
인구(口)는 19만 6천 4백 여명이다.
태묘는 창덕궁 동련화 방(坊)에 있고 영녕전은 태묘의 북에 있으며 태사태직(太社太稷)은 경복궁 서쪽 인달 방에 있고, 원구(원형제단)는 경운궁 동남에 있고 문묘는 창경궁 동에 있으며 각 관아와 공관은 광화문 앞에 좌우로 벌려 있으니 육조 거리라고 이른다. 육의전과 각종 상점은 종루 거리를 중심 삼아 좌우에 벌려 있으니 동 흥인문까지, 서 돈의문까지, 남 숭례문까지는 모두 여섯 군데로 통하여 왕래가 잦은 큰 거리가 되니 상점이 즐비하고 수많은 물품이 구름처럼 쌓이어 동남 양대문 안에는 매일 아침 시장을 열어 일용 잡물을 판매한다.
최근에는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종로로부터 동대문 밖 청량리까지, 서문 밖 서강까지, 남문 밖 용산까지 전기 철도를 부설하여 오고가는 전차가 밤낮으로 인마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상점의 앞머리에 전등과 장명등을 시설하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북악의 삼청동은 성제정이 바위에서 쏟아져 나와 맑고 차가움이 성안에서 제일이다. 그 동쪽 백록동은 삼나무가 울창한데 취운정이 있고 바위돌 사이에서 샘물이 솟아 나고, 서는 백운동이요 그 서쪽의 인왕산에 필운대가 있어 샘과 바위가 절묘하게 어울어져 있다. 문충공 오성 이항복의 반선처가 그곳에 있다. 청학동은 목멱산 아래에 있으니 노인정, 홍엽정 등 높은 벼슬아치의 별장이 많고 노인정 서쪽은 구 남별영이니 이제 장충단을 지었고 그 아래는 국초 묵사(墨寺)의 유허지요 그 서쪽 언덕은 왜장대니 이제 일본인의 공원지로 빌려 주었다. 남문 밖 연지는 막혀 통하지 않아 몇 이랑 모난 연못만 겨우 남아 있고 서문 밖 연지는 호반에 반송이 있었으므로 반송지라 부르니 고려왕의 피우처(避雨處)요, 동문 안 연지는 메워져 없어져 버렸다.
개천(開川)의 근원은 인왕산으로 동으로 자수궁과 옥류동 누각동 등 여러 다리의 물을 모아 남으로 금청교, 종침교, 승전색교의 물을 지나 송사교에 이르러 좌로 북어교 물을 지나 굽어져 동류하고 삼청동 물과 합류하여 중학교에서 남류하다가 혜정교와 운종가 남교(속칭 모교)를 지나 대광통교와 곡교, 장통교와 통운교(속칭 철물교) 물과 합해지고 수표교, 하량교, 영풍교, 태평교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간다.
개성(송도, 송경)은 신라 때는 송악군이요 고구려 때는 부소갑, 백제에서는 동비홀이니 고려 태조 2년에 서울로 정해진 후 4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이다. 경성과의 거리가 160 리요, 임진강 서북 40 리에 있다. 그 북 송악이 천마산으로부터 맥을 받아 웅장하고 깊고 그윽하며 성과 요새로 에워 싸임이 수십 리에 달한다. 송악의 아래는 만월대이니 소위 종제전이라 하는 곳이다.
고려 궁전의 유적이 500여 년 계단 초석과 다듬어진 돌들이 옛날 같이 남아 있는데 근래에 들어 많이 훼손되었고 특히 철도 건설 용도로 문지도리가 마구 깨뜨려져 다만 1단의 돈대뿐이다. 그 북에 다래정이 있고 대 뒤에 있는 자하동은 샘물이 그윽하고 꽃나무가 번창 화려하여 아침 전 풍경이 지금까지 비슷하니 채홍철 기영회 중화당의 옛터이다. 자하곡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는 문헌 최충의 구재당고 여기에 있다.
선죽교는 성 동쪽에 있으니 충신 는 정몽주의 순절한 곳으로 혈흔이 얼룩얼룩 다릿돌 위에 있어 풍우에 씻기지 않고 남아 있다. 또 탁타교(야교)는 고려 태조가 거란의 공물로 낙타 50 필을 이 다리에 매어 두었던 곳이다. 그 동남에 남산은 최충헌의 옛 집터와 공민왕의 화원 팔각정을 세웠던 옛 터가 완연하고 성 동남에 용수, 진봉 양산이 있으니 진봉산은 진달래가 아주 유명하다. 그 동쪽은 취적봉이요 봉우리 아래는 옛날 천수원이니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던 곳이다. 예왕 때에 화가 이녕의 ‘천수사도’는 송나라까지 유명하다. 성 동북에 산대(山臺)가 있으니 의왕이 재난을 만난 곳이다. 이 대의 서북에는 영통동과 귀법사가 있고 그 북에 현화령을 넘으면 곧 대흥동천이다. 성안에 목청전이 있으니 조선 태조의 옛집으므로 태조 영정을 봉안하였다.
양온동에는 태사 강감찬, 목은 이색의 구택 터와 두문동이 있다. 그 서문 밖 만수산 기슭에는 고려 7능이 있고 한 고개를 넘으면 여기가 청석관이니 십 리 깊은 계곡이 굴곡지고 구불구불 돌아간다. 계곡 양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일대 장계(長溪)가 쏟아져 흘러간다. 한 사람이 고개를 지키면 만 명을 막아낼 수 있는 요충지라 지난 날 청 태조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이곳에 이르러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동북쪽 백치(白峙)로 진로를 바꾼 곳이다.
광주(한산주)는 백제 온조왕의 옛 도읍지이다. 경성 동남쪽 40 리이니 인조 3년 병인에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고을을 옮겨 기보보장(畿輔保障, 서울 가까운 곳을 보호하고 뒷받침함)하였다. 또 승병을 두어 완급을 준비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그 제도를 폐지하였다. 서쪽 무락산 바위 위에 한 그루 낙락장송이 당간 같이 서 있으므로 3품 관직을 주었다.
수원은 경성 동남으로 거리가 90 리이니 삼남 통로의 인후부(咽喉部)이다. 북은 광교산을 지고 있고 동남은 광주, 용인, 안성, 진위 등 여러 산이 멀리 연해 있고 서쪽은 남양만을 임해 있으니 이곳 역시 형승이 빼어난 도회지이다. 정조 13년에 화산(華山)에 융능을 옮겨 유수부를 두어 다스리게 했으며 성가퀴를 세우니 둘레가 10 여 리요, 용두각, 소라각 등 유명한 정자가 성위에 벌여 있고 망루의 견고하고 치밀하며 장엄하고 화려함이 각 도의 으뜸이다. 성내에 행궁과 화녕전이 있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건능은 융능 서쪽 언덕에 있다. 남문 밖으로 융능에서 북문 밖 지지현(遲遲臺)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에 어로를 수축하고 소나무, 버드나무를 길 옆에 줄지어 심어 여름날 녹음이 가득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지나는 사람들이 더위를 모른다. 또 서둔지가 있어 연꽃, 마름, 가시연 등으로 경치가 빼어나며 살지고 연한 잉어가 이곳에서 나 서둔잉어라 하여 유명하다. 언덕 위에 교구정은 유수가 서로 교체하던 곳인데 지금은 경부 철도 정거장이 연못가에 세워졌다. 유수 감영을 폐한 뒤 관찰부 관할이 되었다.
강화도(강도, 심부)는 경성 서해 중에 있고 거리는 120 리이다. 동북은 강물이 빙둘러 에워싸고 서남은 바다에 임해 있다. 마니산이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관청이 있으니 석벽이 빙 둘렀고 성안에 인가가 즐비하다. 이곳에 행궁과 병영, 무기고를 두었으니 오래 전부터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에 피난하여 이곳에 왔기에 강도(江都)라 불렀으며 그 궁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종과 희종의 능이 있고 남쪽에 있는 전등산은 단군의 삼랑성(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있는 옛 성)이니 그 산사에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대장경을 송나라에서 구해다가 이곳에 보관하였고 인조 정묘에 오랑캐 난을 이곳에서 피하여 강도(江都)로 이궁하니 승격이 되어 유수 감영을 두었다.
그 동남 손돌목은 가장 험한 물길로 암초가 많고 밀물 썰물이 거세 선박의 내왕이 극히 위험하다. 강 안쪽으로 포대를 설치하였는데 고종 8년 미 군함을 격파했던 곳이다. 손돌목, 덕진진은 충장공 어재연 장군이 순사한 곳이기도 하다. 동쪽 문수산성은 프랑스 군함이 대패한 곳이다. 본 섬의 형승이 실로 서해의 요충지이며 경성의 목구멍과 같기 때문에 자주 격전지가 되었다. 동남 영종도는 지난날 일본 군함과 포격을 주고받던 곳이다.
인천은 옛날 미추홀이니 비류왕의 고도이다. 동북은 소래산이 빙 둘려 솟아있고 산세가 웅줄하다. 서남은 인천만을 임해 있고 부 남쪽엔 문학산(일명 남산)이 있으니 산꼭대기에ㅣ 비류왕의 남은 터가 있어서 세상에서 에분성(비류왕이 성을 내고 죽었기에)이라 부른다. 그 아래 바닷가에 미추왕능이 있고 제물포항은 월미도와 갑도가 둥그렇게 싸 안아 군함과 상선이 항상 폭주하고 무역이 번성하며 시가에는 각국 상점이 즐비하다. 세관과 관청, 경찰서와 각국 영사관 등이 산재해 있으며 최근에는 월미도에 부교를 가설, 왕래가 아주 편하다. 섬 안에 등대가 기상대가 세워져 있다.
여주(황려, 영의, 여흥으로도 불림)는 경성 동남 190 리에 있다. 관아가 여강 남안에 있어 경성과의 수로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상업이 아주 번성하여 충청도와 강원도 양도의 요충 지점이다. 시가가 넉넉하고 풍요롭다. 강 가에 청심루와 강한사, 강북에 신륵사가 있다. 신륵사(일명 벽사)는 명승 나옹화상이 머물던 곳이다. 강월헌의 풍경이 아주 멋지고 또 남쪽 언덕에 마암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 황려마가 출현했다 하는데 목은 이색의 시에,
捍水攻高馬巖石
浮天勢大龍門山
이라 하던 곳이다. 서북 성산에 세종 영릉이 있다.
장단(장임, 임단)은 옛날 임둔의 땅이다. 경성 서북 140 리 있다. 백학산(백악)을 등지고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려 공민왕이 천도할 요량으로 신궁을 만들고 새서울이라고 했다. 그 북쪽 보봉산에 화장사가 있으니 옛날 명승 지공(指空)이 이 절에 머물러 총림을 크게 일으켜 패엽경(貝葉經)과 전단향(旃檀香, 일명 牛頭香)을 남겼다. 그 동남은 고려로부터 조선조까지 능침과 공경대부의 총묘가 많음으로 사람들이 북망산이라 부른다. 그 서쪽 경계에 오관산은 오석봉이 빼어나며 높고도 둥글며 관 모양과 흡사하다. 그 아래 영통동이 있어 그 형승이 기이하고 절묘하여 효자 문충이 목계곡(일명 오관산곡)을 부르던 곳이다. 보현원은 도원역의 물이 빙빙 돌아내려 깊은 못을 이룬 곳이니 의왕 때 정중부가 문신을 던져 넣고 조정침(朝廷沈)이라 이른 곳이다.
고랑포는 장단 동북 40 리에 있으며 임진강 가에 있는 제일의 시장이다. 파주, 연천, 적성, 마전, 양주 등 여러 군의 화물이 이곳에 모였다가 나가기 때문에 사람과 물산이 넉넉하고 풍성하다. 상선이 폭주하여 큰 시장을 이룬다. 또한 적벽의 경치가 유명하다.
풍덕(정주, 해풍, 덕수)은 개성 동남 15 리에 있고 북은 부소산, 남은 백마산, 동은 임진강이 에워싸며 흘러 조강(祖江)이 되고 서는 개성 벽란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고종 37년에 궁궐을 백마산 남에 세우고 우소(右蘇)라 부르니 곧 임해궁, 수강궁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곳이 승천포인데 강화의 북안(北岸)과 상대하여 배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부소산에 경천사가 있으니 절 안에 있는 13층의 옥탑은 인물을 조각하여 제작한 그 정교함이 국내에 짝이 없다. 세상에 원 승상 탈탈이 원찰을 짓고 이름난 장인을 모집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그 절 동쪽에 침향석이 생산되고 동쪽 30리에 덕적산이 있으니 그 아래는 옛날 덕수현(덕물)이다.
경성의 동으로 흥인문 밖은 곧 양주 땅으로 동은 포천이요 포천의 동은 가평, 북은 영평인데 이를 동교(東郊)라 부른다. 서로 돈의문을 나서서 사현부터는 고양 땅으로 고양의 서는 교하, 북은 파주, 파주의 동남은 적성이니 이를 서교(西郊)라 부른다. 이 모두 임진 이남과 한강 이북에 있는 기전(畿甸)의 땅이다.
양주(창화, 견주)는 낮은 산들이 울릉불릉 중첩하여 금대, 묘적, 아차, 왕방, 천마, 소요, 소라, 덕암, 주엽, 아미, 수락 등 여러 산이 동북으로 연달아 있고 동남으로 천장, 문수, 불암, 천보, 도봉 등 여러 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 동남은 한강과 임해 있고 북은 대탄강이 흐르니 황성을 병풍이나 장지처럼 가리고 있다.
검암산은 조종 능침의 땅으로 10능을 봉하였고 주엽산은 세조 광릉을 봉했으며 회암(천보산), 망월(도봉산), 수락사는 저명한 사찰로 회암사는 인도 승려 지공이 이르기를 산수의 형세가 천축 아란타와 완연하다 함으로 고려 명승 나옹화상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 그 크고도 으리으리함이 전국 제일(무려 162칸)로 고려 왕자 원경의 필적이 있으니 金使(?)가 보고 이르기를 소순(蔬筍)의 기(氣)가 있다고 하였다.
포천(청화, 견성) 재벽동은 조선 태조가 미천하던 때 농장이 있던 곳이고 송우장은 북로를 통한 시장으로 화물이 모여드는 곳이다.
가평(병평)은 검봉산과 화학산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고 신연강이 동에서 흘러 안판탄이 되고 옛날 조종 폐현(심천)이 있으며
영평은 백운산이 빼어나 한 모서리가 마치 관을 쓰고 있는 듯하며 그 중 백운동은 골짜기가 넓어 주루평(注婁坪)이 있고 그 위에 우뚝 응봉이 솟아 있다. 군 동쪽에 풍류암과 서쪽에 창옥병(蒼玉屛)은 경개가 절묘하다. 산벼랑이 깎아지른 듯하여 둘레가 수백 척이고 바위빛이 비취빛이어서 창옥이라 이름 붙였다. 백운 시내가 그 아래를 지나고 남쪽으로 청학, 백학 양대가 있으며 백운천의 하류에 화적연이 있어 바위가 물속에서 쑥 내밀어 수백 척 솟아 올라 높고도 험하여 볏가리를 쌓아 놓은 듯하다. 그 아래는 물이 용솟음치며 깊은 소를 만든다. 그 서쪽에 백로주가 있으니 수중에 석봉이 우뚝하다. 대체로 영평은 산수가 빼어난 고장으로 경기도 오른쪽에 유명하다.
고양(고봉)은 장령, 고령, 회음령 등 여러 산이 동북으로 빙 둘러 있다. 동쪽 벽제역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패전(그 아우 여매가 죽은)한 곳으로 지금도 밭 가운데서 칼, 창검, 탄환이 발견된다. 그 남 20리 강 언덕에 옛 행주(왕봉, 덕양)산성이 있으니 예전 계사년에 도원수 권율이 왜병과 죽기살기로 싸워 크게 이긴 곳으로 그 아래 최립이 글을 지은 대첩비가 있다. 그 서북은 견달산이니 고려 공민왕릉과 시중 최영의 묘가 있다. 묘 위에 풀이 나지 않으므로 ‘적총’(赤塚)이라 한다. 그 동 효경현에는 국조 5릉(경릉, 창릉, 효릉, 희릉, 예릉)을 봉하였다.
파주(파평, 영평, 곡성, 서원)은 장산을 서쪽에 두고 임진강을 끼고 있으며 북에 우포가 있다. 강 언덕에 옛 궁궐터가 완연하다. 이곳은 징사 우계 성혼의 은거지이다. 산수가 맑고도 빼어나며 임진 동쪽 언덕에는 이이의 별장 화석정이 있고 남쪽 보시동에는 공릉을 봉하였다.
교하(굴화, 선성)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으로 금단, 심악, 월롱산이 둥그렇게 솟아 있다. 낙하도, 임진강의 하류이니 군 서쪽에 이르러 금척진이 되고 적성(옛날 칠중성)은 감악산이 그 동쪽에 마주하여 바위 봉우리가 큰 이빨 같이 솟아 있다. 산꼭대기는 2,300여장(丈)으로 3장의 돌단 위에 옛 비석이 오래되어 글씨가 긁히고 깎여 떨어져 나갔다. 그 옆에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사당이 있고 그 서쪽 봉우리 아래 운계폭포가 있다. 용두산은 사면석벽이 구연강에 높이 솟아 있다.
임진강 위쪽 연안은 장단과 마전이고 남쪽은 연천, 삭녕으로 마전은 임단이라고도 한다. 미두산, 염창산이 동서로 이어 있고 징파도가 그 남쪽으로 흐른다. 숭의전을 세우고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을 제사하며 고려 공신 16인을 배향하였다.
연천(장주, 마연, 장포)은 마전 동에 있다. 보개, 오봉, 견불산이 우뚝 솟아 푸르고 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르니 휴류탄, 징파도의 풍경이 빼어나다. 동남은 마하천과 대탄강이 있으니 이곳 역시 산수가 빼어난 고장이다.
삭녕(삭읍, 승령)은 연천의 서쪽, 장단의 북에 있다. 강원도 안협과 황해도 토산의 사이에 쑥 들어온 땅이다. 동북 말탄산(효성)은 철원, 평강의 경계와 연접하고 붕이, 영원, 검질, 수청산 등이 둥그렇게 이어 있으며 마룡연, 손청탄, 우화진이 동남으로 흐르니 형승이 훌륭하다.
한강의 동은 양근, 지평이 용문산 동서에 나뉘어 있다. 양근은 여강과 신연강이 용진에서 합류하고 홍천강이 북쪽 40리에 있으니 역시 용진의 상류이다. 백은탄, 병탄, 악탄, 대탄이 있어 물결과 여울이 위험한 곳이다. 월계의 벼랑에 난 돌길은 극히 위험한 길이다.
지평은 동북으로 강원도 원주, 홍천을 이웃하며 서쪽 백운봉 아래 장생동이 있으니 그 가운데가 아주 넓다. 여강 서쪽은 이천, 음죽이다.
이천은 남천(南川)이라고도 한다. 원적, 설봉, 양각, 대덕 등 여러 산들이 고리처럼 둘러 있다. 복하천이 북으로 흐른다.
음죽은 설성, 영악, 백족산이 벌여 있으며 천민천이 남류하고 그 남에 만불지(萬佛池)와 추택(秋澤)이 있어 순채를 생산한다. 남은 충주와 경계를 이룬다.
한강의 이남은 과천, 시흥, 양천, 김포, 통진 다섯 군이 연강 서남 언덕에 있다. 부평, 안산, 남양은 서남 연해에 있고 진위, 양성, 안성, 용인, 양지, 죽산 여섯 군은 한강 동남에 있다. 과천은 관악, 청계의 경치가 좋으며 그 정상에 오래된 절이 있다.
시흥은 옛날 금주(또는 금양, 곡양)이니 동쪽의 호암산에 궁교(弓橋)와 사자암, 도화동이 있으며 금지산, 삼성산이 동북에 벌여 있다.
영등포는 경부 철도 정거장의 시작점으로 외국인의 가옥이 즐비하여 거칠고 황량하던 포구가 혼잡하고 시끄러운 시장이 되었다.
양천은 증산과 선유봉이 철관포에 솟아 있으며 김포는 고도강이 북류하고 굴포가 있다.
이 네 군은 모두 넓은 논에 물이 그득하며 풀이 무성한 넓은 벌은 거칠지만 서울의 부호들의 별장이 산재해 있다.
통진은 조강의 연안이다. 문수산성이 있어 강화의 보호처가 되고 그 동쪽 동성산 아래에는 당산 고현의 터가 있다. 또 그 남 수안산 아래에는 수성 고현의 터가 있다. 전류참(顚流站)은 동쪽 경계에 있으니 인가 없는 들판이 펀펀하고 넓으며 여염집이 물고기 비늘처럼 늘어서 있다.
부평(부토, 장제, 수주)은 옛날 안남, 계양의 땅으로 북에 고양산이 있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고려 이규보가 망해지(望海志)를 지었다. 황어가 풍성하게 생산된다.
남양은 옛날 당성(영제, 익포)이며 익주라고도 한다. 해변에 석경(石鏡)이 생산되며
안산(연성)은 옛날 장항구(노루목)이니 수리산이 우뚝하고 여월음도(여암도?)는 조운의 중요한 길이요 초지량에는 병영이 남아 있다.
진위(부산연달, 금산송촌)는 천덕산이 양성과 경계를 이루고 양성(적성)은 소사천이 남류하며 서쪽 백여 리에 괴태길곶이 있으니 수로가 똑바로 나 있다.
안성(백성)은 경성과 거리가 150리이다. 남에 서운산이 있으니 그 남서봉에 기우단 세 우물이 있으며 그 아래 목동지는 둘레가 수(數) 리에 걸쳐 있다. 그 동에 연화지, 곡지가 있다. 안성장은 삼남 대로의 요충지로 물화가 구름처럼 모여 들어 경성으로 통하니 가게와 점포가 아주 번창하다.
죽산(개산, 음평, 연창, 죽주)은 안성 동쪽 20리에 있으니 남쪽은 충북 진천과 경계를 이룬다. 칠현산이 있고 그 가운데 칠장사는 고려 장사처요 그 북 정배산은 한 봉우리가 불쑥 솟아 바위를 이고 넓은 들판에 특별한 모양으로 서 있어서 죄지어 죽은 자의 매장지로 삼았기 때문에 조피산(朝避山)이라고도 불렀다. 수정산, 쌍령산, 구봉산은 그 서북에 둥글게 솟아 있어 안성, 양지의 경계가 되며, 죽주 고성은 고려 때 송문주가 몽고병을 포격하여 대파한 곳이다.
양지(추계, 양량)는 광주 남서쪽 10리에 있으니 정수산, 성륜산이 있고
용인(구성, 거려)은 양지 서쪽에 있어 보개산, 부아산, 석성산, 선장산이 동남쪽에 막아 서고 금령천이 그 아래 흐르며 금령 시장은 호령(湖嶺, 호남과 영남)의 큰 길이다. 죽산, 백암 시장과 거리가 가까워 물화가 많이 모여들어 자못 번창한 정황이다. 처인(處仁) 고성은 고려 때 중 김윤후가 몽고와 크게 일전을 벌인 곳으로 적장 발대를 화살로 쏘아 죽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