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에서 보여주었듯이
추사는 아주 완벽한 킹카였다
백마를탄 왕자란 바로 추사를 두고 한 말
조선 말기의 세상에서
그는 바로 환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형태의 인생을 그는 누렸다
두아버지가 있는데
한 아버지는 백부로서 후사가 없는 왕의 사위 부마다
생부는 판서를 지내는 대단한 세도가
막강한 경주 김씨의 실세중에 실세 였다
물론 여덟살의 나이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대저택의 실질적 주인이되였으며
백모인 이나라 공주를 어머니로 모신다
어마어마한 집안
백모 즉 양어머니는 이나라 공주님이시니
오히려 왕자나 태자보다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환상적인 환경에 태생을 둔 럭키 보이인데 게다가
인물이 너무 잘생겨서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 하게 하였다니
사대부 도련님의 전형적인 모습
머리마져 뛰여나 실력이 월충 먼 중국에서마져 감탄하니
아마도 지금 세상에 나오셨다면
짱이란 짱은 다갖춘 월드 스타정도
한류 열풍의 원조라 해도 조금의 손색이 없다
이런 환경을 힘입어 박제가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박제가는 누구인가 연암 박지원의 수제자 로서
조선의 성리학을 비판 하고 실학을 주장 북학의 대가
조선에 한획을 굵게 그은 대 제학이시다
아무튼
추사의 인간적 행운이란 어마어마 해서
지금의 세월에 보아도 정말 부러운 그런 사람이였다
그러니
조선 시대의 그 황량하고
영농 사회일뿐 아무런 기회의 사회적 기능이 없는 벌판에서
사람들은 추사를 얼마나 추앙 하고 동경 하였을까
추사는 만화처럼 암행어사의 직도 수행한다
조선은 그의 열풍으로 휩쓸리였을 것이다
지금의 욘사마 열풍이 전일본을 들끓게 한다 해도
추사 만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그레이드 자체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시절
충청우도에서 비인 현감 김우명을
부정한 탐관오리로 적발
삭탈 관직을 하는 실적을 올리고 임금에총애를 받은일이 있는데
호사 다마 라
이것이 훗날 추사를 두번의 유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줄이야
중국의 북경 (그당시 연경 )에서 추사는 스타 였다
중국이란 조선에서는 환상의 무대 그자체
그중 북경의 학자라면 그것의 힘이란 조선의 왕도 움직이는것
그 중국의 내노라는 학자들
옹 방강 옹수곤 완온 오승량 문인 화가 주학량
섭지선 이임송 이정원 김광제 홍점검 등등 무수히 많은
대청의 대 학자들은
추사를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었는데
대천재 추사의 이십대 초반에 일이다
대학자들은 거의가 오륙십대 칠십대도 있었으니
추사의 존재와 그 능력을 짐작 할만 하다
너무 미남인 추사의 모습에
조선의 사대부를 절절이 사모한 중국의 대학자 사이에
김정희는 스타중에 스타 대 스타였다
득의 만만 절대 지존 추사는
금석학을 들여와 진흥왕 순수비를 읽어낸다
이는 학자로서의 위치를 굳히면서
조선에 추사의 명성을 떨구는 일을 하는데
문자만이 학문의 전부 랄수 있는 그시절
수수께끼 같은 문자를 풀어낸 추사는 모든 세력들의 호응을 얻고
젊은 이들의 동경에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많은 신진세력과 그 유명한 이하응
흥선군이 그의 제자로 입문 글괴 그림을 배우며
조선 전체에 그이 영향력은 진동 한다
양주동 박사는 향가를 풀어내고
국보 제일호라는 칭송을 들어도 누구 하나거부 반응이 보인일 없듯이
금석학이란 그시절 지금의 컴퓨터 만큼이나 신기 한것
세상은
김정희로 인하여 아주 발칵 뒤집어 진다
엄청난 세력으로 등장 한다
여기서
안동 김씨와 경주 김씨의 세도 싸움이 그때 있음을 기억 하자
안동 김씨는 뜨는해이며
경주 김씨는 지는 해 였다
그리고 왕가의 이씨 들은 거의 결손으로 힘이 없었고
신정 황후 풍양 조씨의 대모 조대비 만이 안동 김씨와
이왕가의세략으로 대치 한다
그 와중에 동서의 당쟁도 치열
아무튼 세상은 아주 씨끌벅적 하였는데
추사는 덧없이 이 당쟁과 세력 싸움에 말려들게 된다
세력의 형성으로 인한
자의반 타의반의 그당시에 정세 때문 이었다
경주 김씨라는 이유때문에
제주도 유배가 있었고
풍양조씨와 의 안동김씨의 견제 때문에
추사는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그때의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이다
우리의 킹카는 다늦게 죽을 고생을 하게 된다
두번의 유배에서 인생의 모든 고난을 한꺼번에 맞으며
죽을 고생을 한다
백마를 탄 왕자님이
죄인이 되여 귀향을 가는 심사를
- 욕돤 행색이 제일 추하며 나무에 꿰여 회초리를 맞는것이 그다음이다
사십여일을 이꼴을 당하니 천만 사람이 죽이려 드는구나 -
이렇게 읊었다 너무 비참한 이야기이다
이때의 마음으로 추사는 봉은사에서
불도에 전념하는 말년을 갖는다
안동김씨는
세도 정치를 보전 하기 위하여
당대의 대 천재 스타 추사 김정희를
매질과 수모를 하면서 변방으로 내 몰았으니
조선 시대의 정치가들의 정서를 엿볼수가 있다
우리는 청나라의 말기 무력한 추사의 후원자들의
모습을 살핌으로서
정치적 힘이란
추사 김정희의 이런수모를 겪는것으로만으로도
얼마나 별볼일 없는것인지
느낄수도 있다
하여
이때에 비로서 세한도가 그려지는것이며
추사체라는 조선제일의 명 필체가 탄생 한다
예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각고가 가져다 준 명작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이는 추사의 글씨를 천하 제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두 작품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가지고 명작이며 명필이라고 해야 할런지 답답하다
우선 추사체란
요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시각 디자인이나 응용 미술에서 흔히 보는 글씨 디자인인것
색다른 느낌이 풍기며
시선을 끌기에 충분 하여 광고 효과가 있다고는 본다
명필이란
차라리 휘여 갈기듯 흘려써서 전지에 감싸인 느낌이
학자 스러운것 아닐까
추사체를 볼때
광고 선전에 능한 배우를 보는듯 한것 학자연 하지는 않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능력의 한계이 겠으나
그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사실 그렇다
세한도는 어떠한가 ?
그것은 세한도가 추사의 말년의 모습을
잘 보여준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역시 김정희 하면 세한도 이다
밋밋한 인생이야 마로 행복한것
추사는 말년 이라 말하였다고 하기는 하나
세한도는
백마를 탄 우리의 킹카가 그린 그림으로는 전혀
정말 전혀 아니 올시다이다
스타 김정희의 일생과는
정말 반대의 모습인것이다
이그림은 첫 느낌이 쓸쓸 하다
신비스러운 광경에서 쓸쓸한 겨울의 바깥 풍경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것 같으다
초라 하지는 않지만
애잔하고 소슬한 서글픔이 맴돌고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가난함도 엿보인다
이를 청빈 낙도라 한다
스승 박제가의 그림에도 이런 풍경이 있다
하얀 집대신 하얀 소가 있는 목우도 이다
박제가는 서출로서
아주 우울한 인생을 소유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훌륭하였으며 재능이 특출
청나라를 여러번 다녀 옴 으로서 진보적 생각을 한다
과감한 개혁파 였다
그역시 마지막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스승의 생각이 나서 추사는 이그림을 그렸을까
너무 두그림은 닮았다
추사는 스승의 죽음을 두고
하늘이 무너짐을 느꼈다 하였다
세상의 부귀 영화를 다누린 사람이
청빈 낙도의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사상을 그렸다고 할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다 나로써는 의심스럽다
추사도 자신을 거부 하였다고
생각해도 인간에 대한 신뢰성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오히려
장승업 처럼 꽃과 나비 새와 나무를 그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매화를 그린 그림이 많이 있다
추사는 난과 매화를 조선에서 따를사람이 없을만큼
잘 쳤으며 매화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대원군의 난도 그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추사의 대표작으로
세한도를 꼽으며 불세출의 명작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이유가 필요 한것이다
본인 추사도 과연
이그림을 자기의 대표 작이라고 말할까
말기에 우울한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수는 있는데
그러나
후세의 학자연 하는이들은 그의
전기에 작품에 대하여 말한 바가 없다
김정희를 추앙한 무리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한도에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추사를 따르던 세력은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경주김씨와 연결된 왕족 이씨들
다른 하나는
그의 스승 박제가와 나눈 사상의 줄기로서
서출과 중인 계급의 피고자 하는 개혁세력
그것이
대표적 인물로
운현궁의 봄 이하응 아닌가 한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 현주소에서
필요한것은 민중의 결집이였고
그것을 누린것은
집권층이였으며
그것의 도구는 엄청난 민족적 국민 스타
추사 김정희 였다 이렇게 본다
이미
세상사람도 아닌 시대의 인기스타
검소와 내핍 그리고
청빈과 절개가 충정이 전부였던
그 시대적 캐릭터에
제대로 맞아 떨어진 그림
세한도 그리고 김정희
조선의 사대부의 희망이며 상징적 존재
조선말기의 사상이였다
추사는 시대가 요구 하는 인물이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언제나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고 독자의 것
한번도 추사는 세한도를 자신의 대표작이다
이렇게 말 한적이 없다
그래도 그것은 추사의 대표작이며
불후의 명작이 되였다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지
첫댓글 제주도 산방산 아래 대정고을에 추사적거지, 그곳 앞뜰, 뒷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수선화가 생각납니다. 추사도 제주 토종수선화를 무척 좋아했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