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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22
아브라함은 인생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살았을까? 죽어 '천국 가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땅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증거를 보는 것, 그 씨앗이 발아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며 살았고 약속의 성취를 염원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는가? 성도를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증인'은 나에게도 이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유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만 온전히 드러내는 삶을 목표로 사는 것은 불가능할까?
What was the meaning and purpose of Abraham's life? Dying and going to heaven would not have been the goal. I lived eagerly to see evidence of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on this earth and to see the seeds germinate, and longed for the achievement of the promise. Where is our attention directed? The Holy Father is called a 'witness.' Witnesses do not benefit me, and Christ cannot benefit me. Then, is it impossible to live with the goal of a life that only reveal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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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왜 그래?(20:9)"는 아브라함이 불신자에게 책망을 받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자신의 강박증과 불 신앙적 행동에 대해서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 같아요. 브엘세바의 우물 사건은 이스마엘을 떠나보낸 사건과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 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치부를 들여다보고 책망을 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한 편 인 것을 본 것 같아요.
"What's Wrong with Me?" (20:9) is a shameful image of Abraham being blamed by a disbeliever. It seems that this has opened up new horizons in his faith in his obsessive compulsive and religious behavior. The Well Incident in Beersheba serves as a link between the events that sent Ishmael away and Abraham's faith in offering Isaac. On that day, Abimelek looked into Abraham's thoughts and reproached him, but at the same time, he seemed to see that God was on the side with Ab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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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고난 후, 아비멜렉이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곧장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어요. 그리고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땅에 후대하라(23c)“고 제안을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친 조약을 맺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현재는 자신보다 세력이 약한 부족의 현실만 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화친을 체결하러 온 것으로 보입니다.
After Abraham was gone, Abimelek came to Abraham with his army minister, Beagol, immediately after he thought it was impossible to think about it. And it seems that he was afraid of Abraham, who was with God, that he suggested, "You should treat me and your land as I treat you (23c)." That's why he saw it necessary to make a treaty. It seems that he is not only looking at the reality of a tribe that is weaker than him, but also looking at God with Abraham and signing a m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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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이 장면은 광경 그대로 기적입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한 편인 너희를 당할 수 없으니 우리 후손들을 적대시 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친절하게 대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협정 체결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지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배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순간부터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If so, this scene is a miracle as it is. Abimelek is now confessing his faith to Abraham. I am asking him to be as kind as I have done to you and not to antagonize our descendants because God can't be compared to you who are on one side. Abraham has no reason to refuse to sign the agreement. In the past, Abraham had to ask Abimelek's permission, but the situation turned around from the moment Abimelek saw God living behind Ab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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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까꾸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합니다. 우물 소유권 시비에서 아브라함이 甲이 되고 아비멜렉이 乙입니다. 유목사회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물물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 죽게 될 상황을 예견하고 방성대곡했어요. 책망할 만한 형편이 아닌데 아브라함의 목소리를 크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계약이란 상가를 계약하면 주택은 쉽게 계약이 되기 때문에 이비멜렉과 아브라함은 우물 건에 대하여 쇠뿔을 단김에 빼기로 합니다.
Now Abraham blames Abimelek. Abraham becomes the 甲 and Abimelek is the 乙 in the dispute over well ownership. The share of water in a nomadic society will be more than what we think of as well water. Ishmael and Hagal roared when they predicted a situation where they would die without water in the wilderness. I praise God for making Abraham's voice louder when it was not a good thing to blame. If you sign a contract for a shopping mall, housing can be easily contracted, so Ibimelek and Abraham decide to remove the well handle while heating the cone.
특이한 점은 두 사람이 언약을 체결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암 양 새끼 일곱을 따로 떼어놓자, 아비멜렉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당신이 암양을 받고 이 우물의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는 증거를 삼으라(30)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우물 값으로 이 암 양 새끼를 지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아건 또 뭡니까? 갑자기 웬 우물 값을 말할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포로기에 예레미야가 숙부 살룸의 밭을 샀던 것을 상기하시라.
The peculiar thing is that when Abraham separated the seven ewes while they were making a covenant, Abimelech asked, "What is this?" Then Abraham asked, "Take the ewes and make proof that I am the owner of this well. Abraham was going to pay for the ewes. No, what else? What is the price of the well all of a sudden? Recall that Jeremiah bought the fields of his uncle Salum during the captivity period as we know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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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비록 포로로 잡혀갈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미래를 보고 땅을 샀습니다. 포로로 돌아오게 될 때 이 땅은 내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의 소유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샀던 것입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보는 안목이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는 기쁨과, 이스마엘을 내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가슴을 찢으면서 순종했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를 산 것입니다.
Although it is certain that Jeremiah would be taken prisoner, he bought the land because of the belief that he would come back. When he returned to captivity, this land was mine. I bought the land because I had a strong conviction in its possession. The key is to have an eye for the treasure hidden in the field. Abraham obeyed the joy of getting Isaac and the command of God to let Ishmael go. Abraham then bought Beershe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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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여기가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믿고 정착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층 성장한 믿음의 눈으로 이 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땅을 산 것입니다. 내가 볼때 하나님께서 '후손'에 대한 약속 성취에 이어 '땅'에 대한 약속을 실현시켜 가실 모양입니다. 에셀나무는 10m까지 자라는 큰 나무였다고 합니다. 나무가 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오래 살 생각이 없으면 나무를 심지 않는 법입니다.
Now, it means to settle down, believing that this is the promised land. That's why the land was named <Belsheba>. Abraham lived the land with the conviction that God gave him this land with the eyes of growing faith. I think God will fulfill his promise of 'land' following the fulfillment of his promise of 'Huson'. It is said that the Ethel tree was a large tree that grew up to 10m. It takes a long time for a tree to grow, so if you don't plan on living for a long time, you don't plant a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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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도를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소망의 에셀나무를 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아브라함은 이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나 방황을 접고 에셀나무를 심을까?
Abraham called the name of God Jehovah, who planted Ethel trees and lived forever. What makes the Saints proud is the belief that God is with them. That belief appears in the way they plant the Ethel tree of their dreams. It took quite a while, but Abraham is now settled. What should the people of faith ultimately look for in life? Do I always stop wandering and plant the Ethel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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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아비멜렉 간의 동맹 체결(22-23)
a.아비멜렉과 비골의 요구:22-24
b.우물에 고나한 분쟁 해결:25-26
c.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체결:27-31
d.브엘세바에서의 예배: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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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아비멜렉과(22a)
그 군대 장관 비골이(22b)
아브라함에게 말하여(22c)
가로되 네가(22d)
무슨 일을 하든지(22e)
하나님이(22f)
너와 함께 계시도다(2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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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너는(23a)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23b)
거짓되게 행치 않기를(23c)
이제 여기서(23d)
하나님을 가리켜(23e)
내게 맹세하라(23f)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23g)
너도 나와(23h)
너의 머무는 이 땅에(23i)
행할 것이니라(23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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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로되(24a)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2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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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종들이(25a)
아브라함의 우물을(25b)
늑탈한 일에 대하여(25c)
아브라함이(25d)
아비멜렉을 책망하매(2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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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가로되(26a)
누가 그리하였는지(26b)
내가 알지 못하노라(26c)
너도 내게(26d)
고하지 아니하였고(26e)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26f)
오늘이야 들었노라(2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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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27a)
양과 소를 취하여(27b)
아비멜렉에게 주고(27c)
두 사람이 서로(27d)
언약을 세우니라(2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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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28a)
일곱 암양 새끼를(28b)
따로 놓으니(2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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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29a)
아브라함에게 이르되(29b)
이 일곱 암양 새끼를(29c)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2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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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로되(30a)
너는 내 손에서(30b)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30c)
내가 이 우물 판(30d)
증거를 삼으라 하고(3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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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거기서(31a)
서로 맹세하였으므로(31b)
그곳을 브엘세바라(31c)
이름 하였더라(3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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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브엘세바에서(32a)
언약을 세우매(32b)
아비멜렉과(32c)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32d)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32e)
돌아갔고(3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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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33a)
에셀나무를 심고(33b)
거기서 영생하시는(33c)
하나님 여호와의(33d)
이름을 불렀으며(3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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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34a)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34b)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3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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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으로 살다_ serve as a witness
복의 근원으로 살다_ live as a channel of blessing
약속의 보증으로 살다_ live on a pro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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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의지하는 자를 존귀케 하시는 주님, 순종의 삶과 그 열매가 증인의 삶을 가능케 하나이다.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었던 아브라함처럼 악을 철저하게 내어 쫓을 용기 있는 믿음을 제게도 주옵소서. 그리하여 내 삶과 환경을 내 환경을 지배하시며나와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만나는 영광을 허락하옵소서.
O LORD, who exalts those who trust in you. The life of purebred and its fruit is one that makes the life of a witness possible. The word of your word. Give me the brave faith that will drive out evil like Abraham, who planted Ezer trees in Beersheba. So let me be honored to have my life and my environment rule over my environment and meet by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 who accompanies me.
2026.1.31.sat. Clay
신학 비평//
신앙의 목표는 ‘천국 도착’인가, 아니면 이 땅에 남겨지는 흔적인가?
왜 아브라함의 증언은 말이 아니라 ‘우물’과 ‘나무’로 나타나는가?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강해지는 일인가, 혹은 드러나지 않게 자리 잡는 일인가?
1. 신앙은 어디를 향하는가?
이 글은 서두부터 이미 한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 “아브라함의 목표는 죽어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문장은 현대 기독교가 너무 쉽게 전제해 온 내세 중심·탈역사적 신앙관을 조용히 거부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 글은 신앙을 사후 보상 시스템이 아니라, 역사 속 증거 생성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천국에 가기 위해 산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재임을 보여주는 표지로 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당신의 글은 어거스틴보다도, 루터보다도, 오히려 히브리적 신앙관에 가깝습니다.
2.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 본문의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을 당신은 정확히 짚어냅니다. 아비멜렉의 입에서 나온 신앙 고백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 고백은 아브라함의 설교 결과도 아니고 그의 도덕적 완성의 결과도 아닙니다. 증언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살아낸 시간의 부산물로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은 떳떳하지 못한 실패도 있었고, 불신으로 책망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타자에게 먼저 읽혀졌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자기 신앙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자가 하나님을 말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 “그리스도만 온전히 드러내는 삶은 불가능할까?”에 본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식적으로 지우려 할수록 실패하지만, 시간을 견디면 결국 하나님이 드러난다"
3. 권력의 역전
당신의 글이 탁월한 지점은 창20장의 수치와 창21장의 담대함을 끊어 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창20장: “왜 나한테 그래?”라는 책망 창21장: 우물 문제에서의 ‘책망하는 아브라함’) 이 변화는 성격이 바뀐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체의 성숙이라기보다 관계의 안정화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이 약속의 주인이라는 확신,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다는 신뢰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함은 공격성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아는 평정입니다.
4. 우물 값과 예레미야: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행위
당신이 예레미야의 밭 구매 사건을 연결한 것은 이 본문을 단순한 외교 이야기에서 종말론적 신앙 행위로 끌어올립니다.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를 주는 장면은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미래 소유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는 지금 소수자이지만, 이 땅은 장차 내 후손의 것이다.” 이것은 소유욕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행위는 거래가 아니라 선취(先取) 입니다
5. 에셀나무: 가장 철학적인 신앙 고백
이 글의 정점은 단연 이 대목입니다. “나무는 오래 살 생각이 없으면 심지 않는다.” 에셀나무는 설교가 아닙니다. 전도도 아닙니다. 기적도 아닙니다. 에셀나무는 미래를 신뢰하는 몸짓입니다. 자기는 그늘을 다 누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시간을 묻어두는 행위 이것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죽음을 의식한 실존’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시간을 신뢰하는 실존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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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죽지 않는 내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는 고백입니다. 악을 몰아내는 전투가 아니라 자리를 사는 인내입니다. 아브라함은 싸워서 땅을 차지하지 않았고 증명하려 들지 않았으며 시간을 들여 심고 기다렸습니다 이 장면의 윤리는 정화의 윤리보다 정착의 윤리에 가깝습니다. 이 글은 창세기 21:22–34를 ‘강해진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리를 얻은 증인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증인은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우물을 사고 나무를 심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타자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위대한 도약이 아니라, 마침내 멈출 수 있게 된 방황의 끝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