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3 : 7 , 21
제목: 무화과나무잎 옷과 가죽옷
일시: 2011. 3. 6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주일을 맞아 권목사가 말씀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 주일예배 준비를 하지만, 최종적으로 손질하는 것은 헤어스타일과 양복이다. 다들 집을 나설 때도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마지막 체크를 했을 것이다. 왜 옷을 입는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첫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벌거벗고 말씀을 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둘째, 보호를 하기 위해서이다. 나름대로 기초를 튼튼히 했고 여름, 봄 가을 양복을 입지 않고 겨울양복을 입었다. 하이쭝도 제대로 없는 예배당 아닌가! 세째,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중학교때에 추리닝을 입고 교회에 간 적이 있다. 체육사에서 맞춘 것인데, 그것을 사기 위해 돈도 모으고 결단하여 산 옷이었다. 살색 베이지색이고 옆으로는 검은 줄이 두줄이 있는 것으로 몸에 딱 맞아서 멋지게 느껴졌다. 그것을 교회에 입고 갔는데 전도사님한테 무척 혼났다. “니 운동하러 왔나” 옷은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입어야 할 적절한 예복이 있는 것이다.
II. 아담과 하와의 타락스토리
옷은 인간의 타락스토리의 첫 번째 테마이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증거가 옷이었다. 옷은 오늘날처럼 멋진 패션으로 입는 것이 아니고 사실 인간 타락의 심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그들에게 “너희들은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했을 때 첫 번째 그들에게 나타난 증상이 죽음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즉은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는데 남자는 여자가 준 남은 것을 먹다보니 목에 걸려서 목에 성대가 튀어나왔다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목에 씨가 걸려 목을 움켜잡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증상은 부끄러움이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
사실, 그러한 증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서 예견되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안 써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절로 튀어나온다. 빨개 벗었어나요? 부끄러워했나요?라고 누가 물어봤나? 그러나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들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상태를 말해주기 때문에 그렇다. 타락한 이후에는 즉각적으로 벌거벗은 부끄러움이 나타나고 본능적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구절이 나올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도 감이 좋지를 않았다. 꼭 반드시 죽게 되도록 먹을 것 같지 않는가! 그러더니 25절에 와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꼭 뭔가를 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곧 부끄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설 수 없다. 왜냐하면 수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은 어둠에 있기를 바란다. 부끄러움을 느낀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안 띄기를 바라는 것이다.
III.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즉각적으로 행한 것은 옷을 만든 것이다. 7절을 보라.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하나님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들의 벗은 몸으로는 나설 수가 없었다. 타락하여 수치를 갖게 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둠속에서 있었다. 하나님은 영광을 주셨지만 그들은 수치를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은 범죄하여 불의하였지만 하나님은 흠이 없으신 의로운 분이시기에 이제 그들은 함께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지어 만든 것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된 옷이었다.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눈을 피해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러한 자신의 옷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그것을 입는다고 부끄러움이 없어질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만든 옷이 그러하다. 그것으로 수치를 가릴 수 없다. 무화과 나뭇잎이 어떻게 생겼는가? 넓적한 잎도 아니다. 손가락을 핀 것처럼 허술하고 아주까리 잎 같기도 하고 열대지방 파파야 나뭇잎 같기도 하다. 그리고 수분이 다 빠지고 나면 잎이 말라 또르르 말려 올라가거나 바스락해서 금방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고 부스러질 것이다. 그러면 또 무화과잎을 구해서 옷을 해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옷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옷이다. 부끄러움을 가릴 수도 없고 추위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뜨거운 햇빛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다. 형편없는 옷이다.
오늘날 옷의 재질이 무엇인가? 누에에서 나온 비단일 수 있고 나뭇잎에서 뽑아낸 실일 수 있다. 인조견일 수 있다. 화학제품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재질이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가릴 만한 것이 없다. 우리가 돈으로 떡칠을 한다 해도, 명예로 우리를 포장한다 해도, 선행으로 옷을 입는다고, 심지어 교회안에서의 목사와 장로 집사의 직분으로 옷을 입는다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우리가 성공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우리의 미모와 학벌과 경력과 이력서를 제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수치를 감출 재질이 되지를 못한다. 우리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서 옷을 해서 입지만 곧 헤어질 옷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보호를 받을 수 없다.
IV.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절망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의가 인간의 타락 직후에 나오게 된다. 21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옷을 해 입히신 것이다. 인간타락의 심벌로 수치를 가리고자 한 노력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허접한 그 옷을 벗겨버리시고는 당신께서 만드신 옷을 입히신 것이다. 그것은 가죽옷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1절에 그렇게 한 구절로 간단하게 나오지만,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인간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만든 자신의 옷 무화과나무잎의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가죽옷은 하나님의 해결책이었다. 가죽옷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동물이 희생되어야 한다.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줄 동물이 죽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이 동물의 가죽이 어느 동물인지는 이 단계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이 입히신 동물가죽은 구약의 소, 양, 염소 등의 제물을 의미하고 결국 구약의 희생제물들이 예수님을 상징하듯 결국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옷은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이 옷을 입은 것이다. 아담과 하와 그 속에는 인류가 들어있다. 인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그때 그 옷은 영원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옷이 되는 것이다.
V.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만든 무화과나무잎 옷을 버리고 동산 나무뒤 어둔 그늘에서 숨을 필요 없이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나올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벌거벗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에서는 지성소로 표현된다. 수치스러운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대면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제사에서 하나님을 뵈어야 하는데 누가 하나님을 뵐까? 제사장이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순번이 되면 지성소 안의 휘장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보았다. 그들이 들어갈 때는 허리에 줄을 매고 오래 있어도 소식이 없으면 끌어내었다고 한다. 혹 하나님께 회개하지 아니하고 범죄한 일이 있으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휘장은 보호막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 안 지성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이제는 지성소 안에 훤히 보이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옷 입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전의 휘장이 없이도 주님이 우리의 휘장이 되고 주님이 우리의 옷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주님으로 옷 입는다는 것은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9, 20을 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주님이라는 옷은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가 성소에 담대히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 피는 성소의 휘장과 같아서 우리는 그 휘장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다.
지난 주 말씀의 제목이 무엇인가? 빌립보서 3장 9절의 말씀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다른 표현은 주님을 옷 입는다는 것이다. 그분으로 옷입을 때 우리의 수치는 영원히 가리워지고 하나님과 함께 다시 그 에덴동산을 거닐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시기에 우리의 허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신다.
VI. 그러면?
오늘날의 예배는 나의 무화과나무잎 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가죽옷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드린다. 선데이 복장이 있다. 그날은 가장 좋은 옷으로 입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다. 독일에서는 음악회장에 갈 때 최고로 입는다. 할머니들 보면 빨간 옷에 멋지 모자를 쓰고 소녀같이 입고 온다. 그리고 겨울에는 왠 외투를 그렇게 입고 오는지 남자들이 받아주고(일부러 받아주기를 바라서 입는 사람들처럼) 한다. 가다로베에 맡긴다. 저는 시간 끌고 혹시 잃어버리면 어떠할까? 줄서기가 번거러와서 그냥 추워도 목도리만 하고 간다. 그런데 주일날은 잘 오지도 않는 것 같고 와도 옷도 선데이 복장이 아닌 것 같고 해서 의도적으로 대충입는다. 우리는 주일날 가장 예쁘게 멋지게 입을 필요가 있다. 성전에 나올 때 사회자들과 순서 맡은 자들은 양복을 입고 예복을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복장만 봐도 어느 소속인 줄 알아야 한다. 어린이 세계지도에 보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옷이다. 얼굴을 보아서는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옷으로 세 나라를 구별을 한다. 생긴 것이 비슷하니 다른 방법이 없다. 한국사람은 한복을 입히고 일본사람은 기모노를 입히고 중국사람은 치빠우라는 중국전통의상을 입힌다.
우리는 구분이 안 되면서 사는가? 옷을 입어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예수님 닮아... 주를 따르면... 야....호! 이게 예수 스타일....
예수님 닮아 주를 따르면 주의 제자...
예수 패션으로 살라. 예수님으로 옷입으라. 예수 스타일로 살라. 예수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