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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3:21- 22) 알기 쉬운 삼위일체 교리
누가복음 강해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3:21-22)
예수가 하나님인 증거
성자 예수님이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는 요단강에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부와 성령 하나님이 현현하셨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동일한 장소와 시간에 각각 임재해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가장 확실하게 입증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긴 해도, 예수님이 그 교리의 핵심 주제이므로, 자기를 십자가 은혜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푸신 치유나 축사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들은 당시의 주술사나 바리새인들도 비록 그 권능이 훨씬 뒤떨어져도 비슷하게 행했습니다. 그런 이적은 사탄이 작동한 눈속임이거나, 의로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지 그들 스스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께서 신적인 능력을 갖추고서 말씀 한마디로 이적들을 일으켰습니다. 어쨌든 외적으로는 같은 모양새이므로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100%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부활은 인간이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하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의학적으로 죽은 상태였다가 다시 살아났어도 때가 되면 죽는 소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온전한 부활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살아계실 때,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마련된 인류 구원 계획을 이루려고 십자가에 자진해 올라가서 당신의 목숨을 성부께 기꺼이 바치셨고, 그 사흘 후에 당신께서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을 주고서 거두어가는 것은 생명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인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거꾸로 스스로 생명을 버렸다가 스스로 다시 얻었습니다. 십자가 대속 직전에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에게 생명을 부어 넣어서 소생시킨 이적도 당신의 부활에 대한 예시였습니다.
부활 하신 주님의 모습도 물질계 안에 묶여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공간의 장벽을 완전히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제자들과 사십일 간 교제를 나누며 천국 복음도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신령하게 변모된 모습으로 약 120명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부활과 공간적으로 지구를 완전히 벗어난 승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 승천 외에도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의미만 면밀히 살펴봐도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의로운 도덕 선생이나, 우월한 영적 능력을 갖춘 종교인으로, 즉 우리보다 아주 뛰어난 인간으로 한정 지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Lewis는 그래서 그분은 미치광이 아니면 하나님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 누구도 예수를 미치광이라고 말하지 않기에, 논리적으로는 기독교 외부에서도 사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현재 삼위 하나님은?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꿔 말해서 삼위일체를 온전히 믿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본문처럼 삼위 하나님을 분명히 구분해서 가르치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까 문제입니다. 거기다 지금 예수님은 더 이상 이 땅에 안 계시고, 또 성부와 성령의 역사도 인간의 오감으로는 전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삼위일체가 자신의 현재 삶과 크게 연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교리가 신자에게 실천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말만 앞세우는 구호 혹은 머리에 저장해놓은 종교 지식으로 그칩니다. 삼위일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려는 이유는 그 교리가 우리 삶과 절대 무관하지 않고 실제로 그 은혜와 권능 가운데 살고 있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여전히 삼위일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자신이 삼위 하나님과 각각 어떤 영적 교제와 동행을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삼위 하나님이 각각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공회원들이 그리스도인지 확실히 밝히라고 닦달하자, 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눅22:69) 십자가에 죽더라도 부활 승천하여서 천국의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실제로 스데반이 기독교 최초의 순교를 당하면서 성령이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라고 증언했습니다. 천국 입신의 체험이 있는 바울도 예수님에 대해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천국 환상에서도 어린 양이 보좌와 이십사 장로들 사이에 서서 성도의 기도가 담긴 금 대접을 가졌다고 전합니다. (계5:6-8) 성자 예수님은 지금 천국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해서 신자들의 기도를 받아서 성부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물론 성부와 성자가 좌정해 계시는 천국의 물리적 형상은 일절 알 수 없고 추측도 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의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은 이 땅의 물질로 만들어졌기에 성경이 말하는 규격과 식량대로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땅의 물질로 가시적 형체로의 재현은커녕 묘사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천국 갔다 온 바울도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고, 거기서 보고 듣고 온 영적 진리도 감히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고 실토했습니다. (고후 12:1-7) 계시록에서 요한이 묘사한 천국 모습도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서 단순히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하다는 사실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숫자로 셀 수 없는 하나님
삼위 중에 신자가 실감할 수 있고 또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하나님은 당연히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이 땅에 남으신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이 땅에 강림하신 후, 사도들로 대담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 또 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약속하신 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성령의 첫째 역할은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서 주라고 시인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고전12:1-3)
그래서 성령은 신자들이 결성한 모든 공동체에 함께 거하시며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바울은 성도들 간에 당파를 만들어서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고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고전3:16) 성령의 인도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들 자존심과 욕심만 앞세우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니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에 먹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또 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믿게 한 후에 그의 내면에 영원토록 거해서 주님을 따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음행을 저지르는 교인을 향해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8,19)라고 야단쳤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증거해야 할 교회이자,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음행은 특별히 성령이 내주하신 자기 몸을 더럽히므로 그 몸이 대변해야 할 그리스도와 교회를 직접 오염시킨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모든 신자와 그들의 모임에 내주해 계신다면, 하나님을 숫자로 셀 수도 없지만 굳이 그래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은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강림했습니다.(행2:3) 그렇다고 성령님 120여 분이 그 방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각 사람에게 따로 임했으나 성령은 그 권능과 속성에서 절대 서로 분리되거나 차등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관계에서도 당연히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수년 전에 소천하신 팀 켈러 목사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요1:1)에서 하나님에게 ‘a(하나)’나 ‘the(그)’ 같은 관사가 안 붙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관사가 붙으면 복수의 하나님들 중 한 분이 됩니다. 여기서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 말씀이 단순하게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도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일절 관사를 붙이지 않은 것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계와 달라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영계에서 삼위일체로 태초부터 존재해 계셨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본질에서 영원히 동일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뉘어서 사역하는 역할과 그 상호 관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신학적으로 정리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지금 성부 하나님은 천국 보좌 중앙에, 성자 예수님은 그 보좌 우편에, 성령님은 이 땅에 계신다고만 증언합니다.
물론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실체를 맞대면하여서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통하는 물리적 원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겠지만, 그곳에서도 그곳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보고 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이곳으로 강림할 때는 신자들은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합하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비한 존재로 바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령은 모든 신자의 바로 곁에서 또 그 내면에서 보호 인도하실 것입니다.
삼위일체도 믿는 세상 사람들
논리적으로 따지면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만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므로, 또다시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세상 사람들도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한 셈이 됩니다. 지금 말꼬리 잡는 언어유희를 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잘 따져보면 세상 사람들도 사실상 삼위일체 교리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의도하고 계획하여서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또 스스로는 전혀 추측 예상치 못한 때와 방식으로 죽습니다. 요컨대 아무리 똑똑하고 건강하다고 우쭐대어도 절대자에 의해 피조된 버러지와 다름없는 존재로서 물질계에 아주 잠시만 있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그 짧은 생애에 온갖 고난과 문제를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은 그 외적 상태만 보면 태어나자마자 늙기 시작하다가 병들어서 죽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 힘들고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가노라면, 누구나 종교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의지할만한 절대적인 힘을 찾기 마련입니다. 큰 능력으로 자기를 도와주거나 주도해서 고통에서 구출해 줄 초월적인 존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께 기도하면 바로 곁에서 듣고서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탐구하거나 상상하는 절대자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항상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기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신 나서서 의롭게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가정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비록 그 형상이 많이 왜곡 파괴되었어도 그 흔적이 도덕성과 종교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라고 가르친 대로입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섬기는 종교나 신이 없어도 모든 인간은 아무리 본인이 부인해도 자기만의 믿음을 가진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평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치던 자도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붙들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또 생전에 그런 기도도 하지 않은 철저한 무신론자도 죽기 직전에는 심판받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습니까?
결국 절대자에 대해 한 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 본 인간이라면 큰 능력으로 초월해 계시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바로 곁에 계시면서 인생사에 적극 개입해서 도와주는 자여야 한다고 정의 내립니다. 요컨대 초월과 개입과 내주, 이 셋은 절대자의 필수적인 기본값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믿고 섬길 절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놀랍고도 흥미롭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대변한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비판 조롱하면서, 따지고 보면 종교를 가졌든 안 가졌든 자기들의 종교관 내지는 신관이 바로 그 교리를 변호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천국 보좌에서 이 땅과 인간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활동 가능 영역을 완전히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죄에 찌든 십자가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직접 주도했던 ‘여호와의 사자’도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이 현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성자는 인간 역사에 개입하여 창세 전에 세워진 거룩한 계획을 실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 개인과 그들의 모임의 바로 곁에서 모든 일을 보호 인도해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내주해서 교제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요컨대 성부는 ‘초월’의 하나님, 성자는 ‘개입’의 (일일이 간섭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통치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 성령은 ‘내재’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천국에 계시니까 개입하면서도 초월하신 존재입니다. 또 성령이 이 땅에서 신자와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므로 내주하면서도 개입하는 존재입니다. 천국 보좌에 계신 성부 하나님도 인류 역사를 거룩하게 다스리고 계시므로 초월하면서도 개입하는 존재입니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듯이 세 분 하나님이 초월 개입 내재 세 특성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 위격이 있다고 계시한 뜻은, 하나님은 실제로 초월과 개입과 내재하시는 방식으로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리를 신자들로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성경의 삼위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절대자의 이상형에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바라는 바대로 당신을 끼워 맞춰준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태초부터 영원히 세 위격으로 역사하십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 특유의 종교성이 기독교의 성경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스레 그렇게 인식하도록 이끈 것입니다.
뒤틀어진 삼위일체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은 또 다른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절대자에게는 초월, 개입, 내주가 필수값이라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그 셋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하나씩, 혹은 둘씩 따로 떼서 믿고 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관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성경이 정확히 진단한 대로 거짓의 아비 사탄에 미혹되어서 자신에게도 속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현세대는 초월적인 절대자만 믿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절대자가 세상을 창조한 후에 물질계가 저절로 운행될 수 있는 법칙만 부여해 놓고 손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물질의 상호 합성 작용이라는 진화론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신관(神觀)이,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부름, 확대 발전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 절대자라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만 해놓고 손을 놓았다면 죽음 이후의 심판과 구원도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남들보다 착하게 살면 심판은 면할 거라고 안심 내지는 방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죽음이 닥치면 거의 모두가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전지전능한 능력을 동원해서 역사에,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인생에만 개입해 주는 절대자만 믿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절대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다가 위급한 일만 생기면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부족한 이방 족속도 자기들 신에게 간구한다고 가르친 그대로입니다.
그런 자는 자신에게 절대자의 큰 능력만 필요하지,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관심 없습니다. 평소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 급할 때만 주문 같은 기도를 하니까 참 하나님이 응답해 줄 리는 없으므로, 자기들 말을 잘 듣는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나 민족마다 고유의 신을 믿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들 나라와 백성만 부강하게 해주는 절대자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개입해 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뜻입니다.
내주하는 절대자만 숭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신 안에 있다는 그럴싸한 주장은 성경과 가르침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신과 인간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예배, 찬송, 기도, 묵상 등 종교 행위를 최대한 경건하게 반복해 나감으로써 초자연적으로 신비한 감정을 맛보려고 합니다. 약물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정신적 엑스터시를 꿈꾸는 뉴에이지가 그러합니다. 나아가 내주하시는 신적 존재와 영적으로 깊이 교제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진리만 깨닫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이 셋을 전혀 합리적이지 않게 뒤섞어서 이상한 신관을 만들어 내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만족하거나, 자신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은 초월의 성부와 개입의 성자와 내재의 성령 하나님 셋으로 분명히 구별되는 위격으로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한 가지 계획과 뜻대로 완벽하게 역사하셨고 또 역사하실 것이라는 기록입니다. 셋 중 하나 혹은 둘만 역사해선 죄송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불구자 하나님이 되어 인간의 고난과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셋이 함께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되다.
그 세 속성이 항상 완전무결하게 역사하지만, 특별히 그 사실을 인간에게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입니다.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이며 죄에 찌든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실지 성자 예수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성자 하나님이 죽기까지 죄는 저주하여서 당신의 죽음으로 그 죗값을 갚으셨고, 그와 동시에 그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죄인은 아무 조건과 차별 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초월의 절대자만 있으면 인간이 죄를 짓든지 말든지, 나아가 그 죄를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괴로워하든지 말든지, 평생 자기 힘으로 노력해 보라고 놓아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까닭입니다. 또 만약 개입하는 절대자만 있으면 이 땅에 와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형벌을 내릴 것인데, 저부터 당장 벌받아 죽어 없어졌을 것입니다. 내주하는 절대자만 있으면 네가 신이 되어 세상과 죄에서 초월하거나,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여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초월과 개입과 내주의 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함께 역사한 은혜의 구원만이 인간에게 유일하고도 완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의 자리에까지 당신을 낮추시어 죄의 오염과 죄책을 해결한 후에, 죄인을 살려서 새 생명을 주신 후에 죄인과 함께 거하면서 거룩하게 살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초월과 개입과 내재를 항상 함께 충족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세상 만사를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나 그 모임으로나 완전히 선하게 보호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이시며, 당신께서 먼저 그 사랑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셋을 다 충족시키는 절대자를 소망하는 까닭도,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지는 못해도 자기들 삶이 고달프고 메마른 것이 참되고 온전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삼위일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는 뜻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고달프게 살고 있는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였기 때문이기에 십자가에서 인간의 죗값을 다 해결하고서 하나님과 화목 시켜야만 인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을 공급해 주는 근원이신 그분을 거역 대적하니까 절대적 선과는 멀어졌습니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해도 허망하고 갈급해졌습니다. 나아가 모두가 자기만 높이려고 하니까 결국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서 경쟁하며 다투기에 인간 사회에 온갖 문제와 고통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탄에 미혹되어서 자기만 높아졌기에 인간은 자신들의 고통의 진짜 원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들 판단과 행동이 잘못되었기에 그것만 고치면 된다고 믿습니다. 재화를 공평하게 배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서 공산주의 실험을 했으나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을 발달시켜서 AI와 로봇이 인간이 할 일을 대신해 주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 믿습니다. 절대자의 존재마저 완전히 부인되었기에 어떤 문제든 인간이 시작해서 인간이 끝내려고만 합니다.
그나마 절대자를 어렴풋이 믿는 자들도 믿음의 목적은 그 힘을 빌려서 현실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세 속성 중에 하나만 믿는 것입니다. 초월해 계시면서 제발 나를 혼자 버려두시면 내가 잘 알아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힘든 일이 생기면 기도할 테니까 그것만 개입해서 해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현실을 초월한 종교적인 사람은 내주하는 신과 교제하면서 혼자만의 정서적 영적 절정을 맛보려 합니다.
신자와 삼위일체
지금껏 불신자들을 탓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혹시 눈치챘습니까? 초월과 개입과 내주의 하나님 중에 하나 혹은 둘만 믿으려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창조주는 믿겠는데 십자가 예수님은 아직 실감하지 못합니다. 초월한 하나님만 믿으니까, 매사를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정작 자신이 십자가에 올라가 죽었어야만 했던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예수의 숭고한 희생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 교리만 믿은 것, 아니 믿어보려고 노력합니다. 불신자 시절의 셋 중 하나만, 특별히 초월의 하나님만 집중적으로 믿던 인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풍요 출세해지는 데에 적합한 하나님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골라서 믿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나 믿음의 선진들의 인생에 개입해서 큰 이적을 일으켜 주셨으니까, 큰 일이 생기면 어서 빨리 도와달라고 기도는 합니다. 평소에 신자답게 사는 일에는 관심 없고 오직 고난 해결사로만 그분을 대우합니다. 심지어 내주하는 하나님만 붙들고서 말씀과 기도에는 아주 능숙하나, 자기 수양에만 집중하는 신자도 간혹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선교 명령에는 관심이 없고 그마저 초월자 하나님이 대신해서 다해 주리라 믿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잘 모르니까 삼위일체 교리도 자기 신앙생활과 별로 관계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가장 충만하고도 강력하게 역사한 시기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십자가 전후의 초대 교회 때입니다. 초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뜻은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스데반은 물론 그 처형을 주도한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에 사도가 되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천국의 영광만 바라보며 어떤 환난에도 오히려 즐거워하며 십자가 복음을 땅끝까지 전했습니다. 그 일로 핍박받으면 너무나 영광스럽게 여기며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초월의 하나님, 개입의 하나님, 내주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며 거룩하게 역사해 주셨기에 현실의 고통과 문제는 물론 죽음도 그들에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삼위일체가 단순히 교리를 넘어서 삶의 능력이 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목숨을 다하여 숫자로 셀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입니다. 이전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청산하고 실제로 주님을 따르려는 순전한 믿음으로 범사에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면, 이미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1/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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