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경상도는 강원도 남쪽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충청도·전라도와 경계가 맞닿았다. 북쪽에는 태백산이 있는데 堪與家의 말로는 하늘에 치솟은 水星 形局이라 한다. 태백산 왼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동해로 바싹 붙어 내려오다가 동래 바닷가에서 그쳤고, 오른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소백·작성·주흘·희양·청화·속리·황악·덕유·지리 등 산이 된 다음, 남해 가에서 그쳤는데 두 지맥 사이에 기름진 들판이 천 리이다.
― 이중환, 『擇里志』
1.
경상도라는 지명은 본디 경주와 상주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 중에 경상북도는 지형지리에 따라 네 개의 갈래로 나눠 볼 수가 있다. 첫째는 동해에 면한 동쪽 지역이고, 둘째는 소백산맥의 품 안에 든 서북쪽의 산간 지역이고, 셋째는 낙동강 유역에 넓게 자리한 중부와 남부 지역이다. 강원도에서 뻗쳐 내려온 태백산맥의 줄기는 경상북도에 진입하면서 키를 낮춰 동해안에 붙어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며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세워놓는다. 반면에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에 잇대어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은 강원도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구획짓는 지표산이다. 소백산맥의 산계에 속한 산들은 영양의 일월산, 청송의 주왕산, 영덕의 향로봉 들이 있고, 그밖에 통고산, 장군봉, 명등산, 등운산 등 1천미터 안팎의 산들이 이어진다. 경상북도의 서북 지방은 소백산맥이 들어선 탓으로 산세가 높고 험한 산간 지방이 넓다.
이 지역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동해안 쪽으로 흘러나가는데, 높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라 대개는 물길이 급하고 짧다. 그 하천들은 옥피천, 남대천, 오십천 등이다. 강원도의 황지에서 시작한 낙동강의 물길은 영양과 청송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서 지류들을 합수하며 비로소 큰 물길을 이룬다. 이 물길이 금호강과 합수하며 큰 강의 위세를 세우고 경상북도 한복판에 들어와서 물길을 크게 휘둘러 달성군 현풍면을 가로질러 경상남도 쪽으로 방향을 틀고 나아간다. 이 지역은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낙동강의 혜택을 톡톡히 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낙동강은 농업과 생활에 필요한 용수를 대주고 각 지방의 물산을 실어 나르는 뱃길 역할도 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신라를 그 뿌리로 삼고 있지만, 신라 이전에 여러 나라들이 군집해 있었다. 사로국, 비지국, 음십벌국, 다벌국, 초팔국, 골벌국, 압독국, 이서국, 조문국, 감문국, 사벌국 등이 그 나라들이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경주시와 월성군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사로국이 인접한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국력을 키워가다가 6세기에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꾸었다. 삼국이 신라로 통일되자 경상북도 지역은 통일 신라 권력의 핵심을 이루면서 특히 경주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8세기에 접어들며 통일 신라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고 크고 작은 민란들을 겪으며 나라로서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졌다.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일어난 신라의 경주 권력에 따돌림을 받아온 상주 지방의 농민 반란이 신라 패망에 불을 지피는 밑불이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50여 년간 후삼국 시대가 열리는데,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 의성, 안동, 달성 같은 지역에서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고, 결국 이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해서 고려 시대로 접어든다. 왕건은 호족을 규합하고 회유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지역의 호족들은 다른 지방의 호족들에 비해 우대를 받으며 호강을 누렸다. 고려 시대에 경상북도 지역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영해 박씨, 순흥 안씨, 성주 이씨, 경주 이씨, 상주 김씨 등의 신흥 사대부 출신 사람들이 중앙 권력으로 발탁되면서 정치와 학문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런 전통이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인의 대표적인 5대 성씨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정씨가 모두 경상북도를 근거지로 한 신라의 ‘삼성’과 ‘육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신라 이후 정치와 학문에서 모두 크게 번성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2. 박목월의 ‘경주’
박목월(1916 ~ 1978)은 경주 사람이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古都다. 불국사, 석굴암, 천마총, 황남 대총, 분황사 터, 황룡사 터, 첨성대, 안압지,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묘, 남산 등 신라 천 년의 사적과 명승이 도처에 즐비한 곳이 바로 경주다. 신라 말기에는 “불도를 너무 숭봉하여 사찰이 산골짜기마다 꽉 들어섰으며, 평민이 중이 되었다”고 이중환은 쓰고, “절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떼처럼 솟아 있다”고 중 일연은 쓰고 있다. 다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신라는 국운을 천 년 동안 누렸고 경주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옛날에 일컫던 鷄林 君子國이다. 지금은 東京이라 하며 부윤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고을 관아는 태백산 왼쪽 지맥 한복판에 위치하여, 刑家는 回龍顧祖 하는 지형이라 한다. 터가 서북쪽을 향해 펼쳐졌으며, 그 터 안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면서 큰 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쓰고 있다.
닭모이 뿌리실 때
구구구 뿌리신 눈물을 밟고
계림숲 그늘로만 걸어가신 할머니
새벽별 내려와 깊이 잠들며
첨성대에 홀로 앉아 계셨습니다.
― 정호승, 「慶州할머니」
정호승의 「慶州할머니」에는 옛 왕조가 낳은 설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계림, 새벽별, 첨성대 들은 그 설화로 안내하는 이정표와 같은 것들이다. 그 설화의 끝자락에 닭모이를 구구구 뿌리는 “경주할머니”가 살아 있는 것이다. 정호승이나 요절한 이경록의 첫시집들에서 드물게 경주를 노래한 시편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 글을 쓰는 동안 이경록시집 『이 식물원을 위하여』가 내 서가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석하지만 결국 오래 전 기억에 남아 있는 이경록의 ‘경주시편’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경주 시인’의 으뜸 자리에 설 이는 박목월이다.
박목월은 이 경주에서 나고 자란 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경주로 돌아와 일제 말기 청년 시절에는 금융조합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이 문학에 뜻을 두고 해방 이듬해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靑鹿集』에 실린 초기시를 쓸 무렵이다. 박두진·박목월·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정지용의 추천에 의해 『文章』지를 통해 등단한다. 조지훈이 1939년 3월호에 「古風衣裳」으로 초회 추천을 받고, 같은해 6월호에 박두진이 「香峴」·「墓地頌」 등으로 추천받는다. 박두진이 같은해 9월호에 「落葉頌」으로 두 번째 추천을 받을 때 박목월도 「길처럼」·「그것은 年輪이다」로 초회 추천을 받는다. 1939년 12월호에 조지훈이 「僧舞」로 두 번째 추천을 받을 때 박목월도 「산그늘」로 두 번째 추천을 받는다. 이듬해 2월호에 조지훈이 「鳳凰愁」로, 박목월이 「가을어스름」·「年輪」 등으로 추천을 끝맺는다. 이렇듯 뒷날에 청록파 시인들로 불리게 되는 이들 시인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문단에 나온다. 정지용은 박목월을 추천하면서 “北에는 素月이 있었거니 南에 朴木月이가 날만하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박목월은 한 글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의 경주를 불모의 땅이라 비유하지만 초겨울의 해질 무렵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쓸쓸했다. 경주 박물관 옆길은 북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쇠리쇠리한 초겨울의 영혼이 으스스해 오는 어둡사리 속에 북천내로 나가는 길은 자갈 한 개마다 희뿌옇게 추위 속에 퇴색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길을 나는 그야말로 키가 헌칠한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낡은 오버자락을 휘날리며 오고가곤 하였던 것이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추위 속엣 색주집 문전에 켜지는, 새록새록 켜지는 등불의 그 서러운 빛줄기 ― 그것은 억만리 밖에서 비쳐오는 한 줄기의 서러운 불빛처럼 내 눈동자에 걸리게 되었다.” 박목월에게 경주는 나고 자란 고향일 뿐만 아니라 인격과 정서의 고유성이 형성되는 원체험의 공간이라고 할 만하다.
박목월의 초기시에 중요하게 쓰인 체언들을 살펴보면 『靑鹿集』(1946)에서는 밤, 눈물, 구름, 길, 산길, 산울림, 그리움, 그늘, 늦가을, 슬픔, 꿈, 안개, 아지랑이, 달빛, 달무리, 밤비둘기, 별, 어스름, 저녁비둘기, 애달픔, 안타까움, 한나절, 느름나무, 오리목, 산수유꽃, 모란꽃, 木果木, 박꽃, 靑노루, 암노루, 꾀꼬리 등이고, 『山桃花』(1955)에서는 해으름, 그림자, 보랏빛, 눈물, 산그늘, 水晶그늘, 밤, 밤비둘기, 물소리, 바람소리, 해종일, 진종일, 달밤, 반달, 달, 밤길, 달안개, 진달래꽃, 살구꽃, 모란 배꽃, 桃花, 매화, 오얏꽃, 목련꽃, 사슴 등이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박목월의 초기시의 두 축으로 토속성과 자연지향이 표나게 두드러진다. 청록파 시절의 시인에겐 “牧丹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 仙桃山 / 水晶그늘 / 어려 보랏빛 / 牧丹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牧丹抒情」)이나, “山은 / 九江山 / 보랏빛 石山 // 山桃花 / 두어 송이 / 송이 버는데 // 봄눈 녹아 흐르는 / 玉같은 / 물에 // 사슴이 / 내려 와 / 발을 씻는다.”(「山桃花·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향은 곧 자연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고향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소망은 곧 자연에 귀의하여 그 품에서 살고자 하는 꿈과 겹쳐진다. 향토적 서정의 풍경을 보여주는 박목월 초기 시의 자연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시공을 넘어 선 자연이다. 그 자연에 구비치는 것은 流轉하는 삶에의 향수와 슬픔이다. 자연에서 시작한 박목월은 후기로 넘어오면서 차츰 현실적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데, 그 현실의 갈등이나 초극의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사람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이를 그려내는데 주력한다.
밤차를 타면
아침에 내린다.
아아 경주역.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
천년을 한가락 미소로 풀어버리고
이슬 자욱한 풀밭으로
맨발로 다니는
그 나라
백성. 고향사람들.
땅 위와 땅 아래를 분간하지 않고
연꽃하늘 햇살 속에
그렁저렁 사는
그들의 항렬을. 姓받이를.
이제라도
갈까 보다.
무거운 머리를
차창에 기대이고
이승과 저승의 강을 건너듯
하룻밤
새까만 밤을 달릴까 보다.
무슨 소리를.
발에는 足枷.
손에는 쇠고랑이.
귀양온 영혼의
무서운 형벌을.
이 자리에 앉아서
돌로 화하는
돌결마다
구릿빛 시뻘건 그 무늬를.
박목월, 「思鄕歌」
「思鄕歌」는 상징적 응축이라는 면에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다소 은유의 깊이가 낮아서 직설적이거나 설명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고향을 차분하게 관조하기에는 그 직정적인 감회가 너무 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고향과 타향의 뚜렷한 대립 구조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집”이다. “집”은 보호와 안식처, 고정적이고 고요한 체류, 그리고 변함없는 정서의 지표적 定位의 공간이다. 고향을 수식하는 자욱한 풀밭, 맨발, 연꽃하늘, 햇살, 姓받이들 등의 이미지들은 자연과의 교감, 억압없는 자유, 심정적 안정, 동화와 친화, 상호유대 등을 암시한다. 시인은 고향을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타향은 감옥, 형벌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것을 “발에는 足枷. 손에는 쇠고랑”이라는 이미지로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타향에서 산다는 것은 “귀양온 영혼”의 삶을 사는 것이며, “무서운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이 많은 사람들을 고향에서 도시로 내몰아 실향과 이향을 겪게 하고, 그것이 결국은 본래적 자기를 잃고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겪으며 그 후유증으로 향수병을 앓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철학자들 중에서는 현대문명 속에 살게 된 대다수 20세기의 인간들을 실향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고향이 정주와 안정적인 체류인 반면에 타향은 늘 떠돎과 불안정한 유동을 그 본질로 한다. 이 시의 화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향을 떠나와 살면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타향과 고향 사이에 가로놓인 실제적인 거리는 “밤차를 타면 아침”에 도착하는 거리지만, 그 심리적 거리는 그 보달 훨씬 더 커서 “이승과 저승의 강을 건너”는 일 만큼이나 요원하게 느껴지는 거리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래적 윤리와 규범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존재 본질 속에서의 內住를 회복하는 일이다. 고향을 이미 “거기 있는 것”이지만, 아울러 “앞으로 있어야 할 것”, “만들어져야 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향은 지향해야 할 하나의 피안이며 실존의 이데아인 것이다.
이 자리에 앉아서
돌로 화하는
돌결마다
구릿빛 시뻘건 그 무늬를.
고향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부름에 응할 수 없는 사람은 타향적 현존의 불행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일 수밖에 없다.「思鄕歌」이 마지막 연은 고향을 그리면서도 갈 수 없는 화자의 마음을 “돌”에 비유한다. 그 돌의 표면에 돋는 “구릿빛 시뻘건 그 무늬”는 무엇일까 ? 바로 고향에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화자의 마음에 새겨지는 고통의 무늬일 것이다.
蔚山接境에서도 迎日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마른 논바닥 같은 얼굴들.
奉化에서 春陽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億萬年을 산 듯한 얼굴들.
人蔘이 名物인 豊基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척척 금이 간 얼굴들.
다만 聞慶 새재를 넘는 길목에서
히죽이 웃는 그 얼굴은
시뻘건 生土같았다.
― 박목월, 「生土」
고향과 가까운 지명들을 나열하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들에서 느끼는 감회를 소박하게 술회하고 있는 시다. 울산, 영일, 봉화, 춘양, 풍기, 문경 등은 경상남도에 속하는 울산을 제외하고는 전부 경상북도에 있는 지명들이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른 논바닥같은 얼굴들”, “億萬年을 산 듯한 얼굴들”, “척척 금이 간 얼굴들”이 친숙하고 애틋한 것은 고향 사람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시뻘건 生土”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살며 만드는 것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고향이 지리적 장소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를 통해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상적 고향이 구비해야 할 또 한 가지 요소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간의 상호 유대성이다. 이 상호 유대의 수립에는 앞서 말한 자기 정체성의 확보가 선결 요건이 된다. 익명성과 은폐의 방식으로는 유대성이 형성될 수 없고 타자성만 있을 분이다. 고향에서는 타자됨으로 인한 고독이 어느 정도 극복되어야 하고, 또 고립적 생활 방식이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상호 개방적이어야 하고, 이런 개방이 진정한 내적·외적 유대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은 상호간의 선한 관심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더불어 삶’과 ‘섬김’의 고차원적인 윤리가 요구된다. 말하자면 타향에서의 지배적인 삶의 원리인 이기주의와 고립주의가 각자의 삶에서 폐기되어야 한다.
익명적 존재로 살아가는 타향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이기주의와 고립주의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럴 수 없다. 고향에서는 누구나 그 이름과 家系와 혈통이 단박에 드러나기 때문에 기명성에서 이루어지는 당당한 자기됨의 삶을 꾸릴 수밖에 없다. 고향에서는 자신의 정체와 뿌리가 환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고립적 생활 방식이 지양된 상호 개방적인 삶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향이 삶의 본연의 자리라는 점에서 고향 바깥을 떠돌아만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은 가족과 공동체, 혹은 자민족 중심주의 국가에서 분리되고 배척당하는 난민, 추방자, 혼혈인, 이주노동자, 이방인, 망국민들이 공통분모로 가진 離散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고향은 있으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방외인으로 떠도는 유태인이나 재일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Diaspor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를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 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이 곧 소멸과 잠적을 하고야 말리라는 음울하고 불길한 어조를 담고 있는 시는 전형적인 실향자의 의식을 노래한다. 이 시에 드리워진 실의와 체념, 덧없음과 피로감의 그림자들은 실향이 만든 정서적 응어리들이다. 이 시의 화자가 보여주는 황폐한 내면은 실향이 만든 “병리 현상”에 의해 속속들이 침윤되어 있는 듯하다. 실향자의 말은 메아리가 없는 저 혼잣만의 공소한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중얼거림은 소통의 가능성이 배제된 화법이다. 정주의 삶을 갖지 못한 채 길 위에서 떠도는 삶이란 항상 달디단 잠과 안락한 휴식이 유예된 험하고 고달픈 삶이다. 고향 상실이란 그 자체로 참된 세계에서의 배척이자 따돌림이다. “이기주의와 배타주의가 있는 곳에 고향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선한 관심’과 ‘더불어 삶’, 그리고 ‘섬김’에서 타향적 군집 사회에서 빚어지는 각종 병리 현상은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실향이 만든 고독과 소외, 현존의 쓰라림은 오로지 고향으로 귀환할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향은 너무 멀리 있다. 시의 화자는 “돌아갈 수조차 없이 /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 온 이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귀환 불가능성이 고립의 내면을 낳고, 이 고립의 내면이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탄식과 절망을 배양한다. 그것은 희망의 계기, 희망을 세울 만한 端初点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바로 이 지점이 기형도의 저 도저한 허무주의의 발생학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는 거점이다. 실향자의 의식에 치명적으로 감염된 이 젊은 시인은 끝끝내 그 병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미 그 피로의 기색은 너무나 짙고 “일생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나쁜 예감은 번져 저의 “황폐한 내부”를 가리기 힘들어 했다. 기쁨은 흘러가버리고, 기억은 차츰 희미해진다. 삶에의 어떤 숭고한 봉헌을 위한 한 점의 힘도 의욕도 없이 모든 것을 “길 위에서” 잃고 기진했음으로 이 시의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니 듣는 이 없는 길 위에서 혼자 뜻없이 “중얼거”린 말은 곧 이 세상에 남기는 유언이었던 것이다.
3. 유치환과 백석의 ‘통영’
경상남도는 가야의 옛터인 한반도의 동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해를, 남쪽으로는 남해를 끼고 있다. 서북쪽은 소백산맥에 가로막히고, 남동쪽은 바다에 면해 육로로 나아가는 길은 끊겨 있다. 서부 산지는 가야산, 황매산, 덕유산, 기백산, 백운산 들이 뾰죽한 봉우리들을 곧추세우고 있고, 산 아래로는 계곡과 좁은 분지가 펼쳐지는데 합천·거창·함양·하동·산청 땅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중앙부의 산지에 솟은 산들은 서부 산지에 솟은 산들에 비해 낮다. 1천미터에 못 미치는 자굴산, 방어산, 적산봉, 와룡산 등이 이에 속한다. 낮은 산지와 낙동강과 그 지류들이 얽혀 있는 이곳에 창녕·의령·진양·사천·고성·의창 지역이 자리하고 있다. 동부의 태백산맥에서 가지를 쳐서 뻗은 태백 산지에 속한 산들은 중앙부의 산지에 솟은 산들보다 높아진다. 간월산, 영취산, 신불산, 가지산, 원효산, 천성산 등이 여기에 속하고, 밀양·양산·울주 지역이 이 산들을 끼고 펼쳐져 있다. 경상남도의 지형은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두루 다 끼고 있는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산을 끼고 계곡과 분지로 이루어진 산간 지방, 낙동강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평야와 저습 지역, 그리고 들쭉날쭉한 굴곡 해안이 많은 남해안 지역 등이 그것이다.
바다 소리가 市街에 들리고
山허리 測候所에 하얀 旗폭이 나부낀다.
비인 개[浦]는 멀리 치웁게 반짝이고
이 몇 날을 돌아오는 배가 없다.
― 유치환, 「港口의 가을」
통영은 태깔이 아름다운 섬 126개를 거느린 남해안의 항구 도시다. 통영에 따린 한산도에서 전라남도 여수까지 이어지는 이 백리 뱃길을 일러 한려수도라는 하는데, 그 풍광이 나라 안에서는 으뜸으로 꼽히는 뱃길이다. 이 한려수도는 1년 중에 250여일 정도가 청명한 날씨를 보이는데, 이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떠 있는 비진도·매물도·학림도·오곡도·연대도·저도·연화도·욕지도·추도·사량도·곤지도 등의 섬들은 봄에 보면 꽃밭에 핀 꽃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삼천포 출신의 시인 박재삼은 그런 봄바다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1
화안한 꽃밭 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 핀 것가 꽃 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았닥 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2
우리가 소싯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남평 문씨 부인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쳤더란다.
확실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 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 훔쳐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닳아 마음닳아 젖는다 것가.
3
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희나비 같네.
― 박재삼, 「봄바다에서」
박재삼(1933 ~ 1997)은 일제 때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부에서 태어났지만 1936년 가족이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시에 자리를 잡고 자란 시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세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삼천포로 왔기 때문에 삼천포는 박재삼에게 문학적 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눈부신 꽃비늘로 반짝이는 삼천포 앞바다의 풍경과 그곳에서의 유년체험은 시인의 상상력의 원천을 이루는데, 「봄바다에서」는 남해의 봄바다를 “화안한 꽃밭”에 비유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에 더 있는 섬 또한 너무나 수려해서 이승 저 너머의, 한 번도 보지 못한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떠 있는 섬으로 상상되는 것이다. 봄바다에서 밀려오는 물결은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친, 다시 말해 바다에 빠져죽은 “남평 문씨 부인”의 비단 치마 자락에 비유된다.
통영은 본디 1900년까지 고성군에 딸려 있다가 행정개편이 될 때 ‘통영군’으로 승격이 되어 제금이 났다. 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 수군 통제영의 줄임말인 ‘통제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해군의 편제에는 맨 윗자리에 수군 절도사, 그 아랫자리에 첨절제사, 다시 그 밑자리에 만호로 되어 있다. 수군 절도사는 무관으로 정3품 당상관이다. 이 편제는 조일전쟁이 일어나던 1592년까지 지켜졌다. 그 조일전쟁에서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이 왜적을 크게 꺾어 공을 세우니 선조임금이 수군 편제에도 없던 경상도와 전라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두루 지휘할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를 만들어 이순신을 앉힌 것이다. 삼도 수군 통제사가 머물 통제영이 자리잡은 곳이 통영 권역에 있는 한산도였다. 통영은 한때 충무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는데, 이는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에서 따다 붙인 이름이다. 통영은 토박이들의 발음에 따르자면 ‘토영’이거나 ‘퇴영’이다. 앞엣 소리는 국어음운학의 체계에서 동음생략에 따른 音價이고, 뒤엣 소리는 동음 생략에 앞혀소리가 얹혀진 것이다. 통영에서 나는 이름난 공예품들에는 그 생산지 표기원칙에 따라 물건이름 앞머리에 반드시 ‘토영’자가 따라붙는다. 그 유명한 통영갓은 ‘토영갓’이고, 나전 칠기는 ‘토영 자개’이고, 장롱이나 상은 ‘토영 상’·‘토영 소반’이고, 놋쇠나 백통으로 만든 장식들은 ‘토영 장석’이다.
‘통영 시인’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韓醫였던 柳焌秀의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의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 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하고, 그때 잔학한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가 나중에 바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東萊高普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延禧專門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이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하는데,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유치환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난 것은 1940년 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때여서 너나 할것없이 궁핍했던 시절이다. 하얼빈에서도 마차로 하루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 煙首縣이라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그 소도시의 네 거리에는 효수당한 匪賊의 머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 걸려 있었는지 말라서 소년의 얼굴처럼 작고 검푸렀다. 흑룡강에서부터 불어온 황량한 바람이 그 비적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곳에 가형인 동랑 柳致眞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 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다. 이듬해 자금 융통이 필요했던 청마는 이듬해 귀국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베일 듯 추웠고, 대기를 부옇게 지우며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에 청마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는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의 광막한 벌판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 !”였다. 청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는데, 그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달 뒤에 해방이 되었다.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청마는 ‘柳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신 집어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5일 ‘統營文化協會’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동향 출신인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강습, 시민상식 강좌, 농촌 계몽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단체였다.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南쪽 먼 浦口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世代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隆熙二年 !
그래도 季節만은 千年을 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南風에 자라고
푸른 하늘에 石榴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 밤 열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煩文縟禮 事大主義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新月같이 슬픈 제 族屬의 胎班을 보고
내 스스로 呱呱의 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命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둘메라 이름 지었다오
― 유치환, 「出生記」
유치환의 시에서 ‘통영’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시를 찾기는 힘들다. ‘통영’을 노래한 시로 찾아낸 게 위의 「港口의 가을」과 「出生記」다. 유치환은 제가 태어난 해를 “隆熙二年”이라고 했다. 놀라워라, 그러니까 유치환은 舊韓末 사람이다 ! 이렇듯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임금 자리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외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南쪽 먼 浦口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까지 불어 닥치는 때에 태어났으니, 유치환은 스스로를 가리켜 “상서롭지 못한 世代”라고 했던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흉흉해도 계절의 아름다움까지 덮을 수는 없다. 유치환이 태어난 때는 “지붕에 박넌출 南風에 자라고 / 푸른 하늘에 石榴꽃 피 뱉은 듯 피어” 있는 계절이다.
나를 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유치환이 태어난 “융희2년” 무렵의 나라 형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 임금이 재위하던 시기인 1864년에서 1907년까지 사이에서 1897년(고종 34년)을 광무 원년으로 삼았는데, 광무는 대한제국의 연호이다. 1907년 7월에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임금이 양위를 받으면서 그해 8월부터 곧바로 卽位年稱元法에 따라 모든 공문서에서 융희라는 연호를 쓴 것이다. 본디 조선 왕조는 선왕이 죽지 않고 왕위를 물려줄 때 유년칭원법을 쓰지만, 그 예법을 무시하고 순종 즉위와 함께 곧바로 그 해를 융희원년으로 반포함으로써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것이다. 일제는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순종을 왕위에 앉혔다. 순종의 어머니가 바로 일제가 보낸 자객에 살해된 명성황후이다. 이미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순종이 즉위한 융희 1년(1907년)에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한다. 일본은 같은해 8월1일에 한국군을 해산하고, 이듬해인 융희 2년(1908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허락을 받아낸다. 외교권에 의해 사법권마저 빼앗긴 조선은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에 날인함으로써 나라로써 모든 권한을 잃어버린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망하고, 조선은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국권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는 이 암울한 시대에도 서울에서 먼 통영의 한 중산층 집안에서 “어진 생각”만을 하며 태교를 하는 어미와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을 읽는 젊은 의원을 아비로 두고 태어난 유치환은 그래도 행복하다 하겠다.
통영하면 또 한 시인이 얼른 떠오른다. 시인 백석이다. 백석은 본디 北關에 속하는 함경북도 정주 사람이다. 그런데 이색적이게도 한반도 남쪽 끝에 있는 ‘통영’에 관한 기행시편을 3편이나 남기고 있다. 「통영」시편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 한 편에는 “천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한편에는 “난”이라고 나오는데, 두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각각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녯날엔 統制史가 있었다는 낡은 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않은 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 이 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 저문 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나렸다”(「統營」) 이 시에 따르자면 백석은 통영의 한 객주집에서 “千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났다. 이 시가 나오고 3년 뒤에 발표한 「야우소회」라는 시에 마음속에 각별하게 남은 정다운 것들의 목록을 하나씩 언급하는데, 그 목록에 “천희”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나의 정다운 것들 가지 명태 노루 뫼추리 질동이 노랑나뷔 바구지꽃 메밀국수 남치마 자개짚세기 그리고 千姬라는 이름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밤이로구나”(「야우소회」) 낡은 항구의 객주집에서 우연히 만난 처녀를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처녀의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고, 천희라는 여자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 사람이라는 얘기만 나온다.
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는 이 갓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갓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것만 갓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 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統營」
백석이 쓴 「統營」은 통영에 바치는 헌사이자 구원의 여인이었던 “蘭”에게 바치는 사랑의 시다. 1연에서 6연까지는 통영에 관한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1연에 따르자면 화자는 구마산에서 뱃길로 통영으로 들어오고 있다. 화자는 한려수도를 거쳐 통영으로 들어오며 바라본 통영의 첫인상을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고 한다. “갓”은 통영 갓인데, 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될 만큼 이름 높은 공예품이다. “고당”은 고장의 관서 방언이다. “갓갓기도 하다”는 “갓 같기도 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소리내어 읽으면 “갓”이라는 어사가 반복되면서 만드는 흥겨운 울림이 있다. 가벼운 말장난이다. 가벼운 말장난이 만든 그 흥겨운 울림을,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두 구절이 받아, 돌연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낡은 항구의 풍광을 유쾌하고 명랑한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거리와 바다에서 “쾅쾅”·“뿡뿡” 울리는 소리들은 어떤 기대로 한껏 부풀어 들떠 있는 화자의 마음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7연에서 그 기대와 설렘의 까닭이 비로소 소상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아닌 “蘭”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리란 기대 때문이다.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것만 갓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 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화자가 만나려는 “난”이는 “明井골”에 살고, 명정골은 “山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대한 이런 묘사는 이곳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고색창연한 곳이며, 결속과 유대가 두터운 공동체의 뿌리가 착근된 곳임을 암시한다. 이 시가 보여주는 장소의 구체성과 감미로움은 이미 6연에서 드러난 바가 있다. 장소는 그것의 외관이나 경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일본말을 잘 하는 황아장수 영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하는 처녀들, “錦”이나 “난”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들과 같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상이 드러남으로써 풍부한 실감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화자는 “난”이를 못 만난 것 같다. 그래서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 “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겠다. 잔뜩 기대를 품고 왔다가 길이 엇갈려 연인과 만나지 못한 화자의 못내 쓸쓸한 심사가 내비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