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예술의집합체,불국사(2)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경주의 불국사입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외국인이 절반 이상으로 세계인의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려한 소문과는 달리 실제 방문 해보면 경내가 좁다는 느낌에 다른 유명 절과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이고 그냥 절인데 하며 실망하는 관광객도 많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불국사는 연못 위에 지어진 절로 못의 크기가 동서는 40m, 남북은 30m, 깊이는 2~3m 정도의 커다란 못이 절 앞에 있었으니 못 위에 지은 절이며, 지금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보다 도난 당한 문화재가 훨씬 많은 절이며 지금의 크기보다 8배나 더 큰 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물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절의 모습은 어떤 절이었을까요?
불국사 절 마당으로 내려오면 최고의 포토 위치가 선뜻 눈에 띕니다.
바로 청운(靑雲)교와 백운(白雲)교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로 다리에 교(橋)자를 붙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푸른 구름,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위에 문을 자주색 안개를 뜻하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했을까요?
역사를 돌려 연못이 그대로 있었다면 김대성 재상과 아사달의 원대한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안개가 낀 모습은 불국사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불국사 원래 모습인 연못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연못이 있다면 석가탑이 연못에 비춰져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성 재상은 신라에는 최고의 석공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백제 출신의 최고 석공인 아사달을 초청하여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굴암의 건축을 맡겼는데 완공하기까지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젊은 석공 아사달은 신라에 오기 석달 전 혼례를 올렸는데 부인 아사녀는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결국은 경주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러나 불국사가 완공되기 전에는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는 방침에 따라 혹시나 볼일이 있어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기다리는데 이를 알게 된 어느 스님이 석가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비칠 것이라며 기다리라 하였는데 결국 아사녀는 기다림에 지쳐 연못 속에 그림자가 있으리라는 환각에 연못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 후 연못을 영지라 하였고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고 하여 무영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전설은 사랑과 희생, 정열을 담은 석가탑의 모습으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한 시대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안의 사랑과 감정까지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연못은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에 없으니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연못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더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운교의 끝자락이 연못에 잠길 정도였으며 당간지주 바로 앞까지 연못이고 좌우로는 범종각에서 좌경루 앞까지 찰랑찰랑한 맑은 연못일 것입니다.
물은 석굴암에 흐르는 감로수가 내려와 매일 신선한 물로 한겨울에는 따뜻함을, 한여름에는 차가운 물이 흐를 것입니다.
사찰의 크기도 지금보다 8배나 큰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그 후 100여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970년대 들어와 재건축된 불국사는 주춧돌이 있던 자리에만 겨우 복원한 것으로 영조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시절에 약탈해간 문화재는 그야말로 싹쓸이를 하다시피 하였습니다.
2007년 극락전 현판 뒤에 숨어있는 나무 돼지를 어느 관광객이 발견하였는데 이는 불을 상징하는 뱀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를 이곳에 숨겨 놓아 다시는 불타지 않는 절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극락전 앞 마당에 황금돼지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관광객들이 엉덩이와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어 이젠 반질반질한 돼지가 되었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수난도 있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경외의 대상으로 강점기 시절 모든 조선사람의 출입을 막고 다보탑을 자기들 마음대로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석탑 내부에 있어야할 사리함이 없어지고 원래 있어야 할 사자상이 4개였는데 3개는 없어지고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 하나는 입 주변이 손상된 사자상으로 온전한 3개는 약탈해가고 하나만 남긴 것입니다. 비로전 사리탑도 일본의 우에노 공원 한켠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회수해 온 것입니다. 만약 지금과 같이 운송수단이 발달 하였다면 석가탑, 다보탑뿐만 아니라 석굴암까지도 모두 가져갔을 것입니다.
일본인만 약탈해 간 것이 아니라 1966년에는 석가탑에 있던 사리함을 도굴꾼들이 훔쳐가려고 탑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탑을 복원 중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신라의 인쇄술이 세계 최고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다보탑에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 또한 세계가 놀랄 수 있는 보물이 분명할 것입니다. 문화재청에서 사자상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자 진짜는 감춰두고 가짜 사자상을 반환하였는데 일본측 얘기로는 자신들도 다보탑에서 가져간 사자상이 어떤 사자상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요. 분명 약탈자의 집 마당 한구석에 굴러다니고 있지만 그 후손들에게 약탈해온 것이라 말할 수 없거나 모르고 있거나 조상의 약탈을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거나 할 것입니다.
비로전과 극락전의 불상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체 남아 있었던 것은 당시 왜적의 선봉장가토기요마사가 불국사에 당도하기 전 스님들은 귀중한 불상을 감추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불상은 신라시대 그대로의 불상이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대웅전의 불상은 왜적에 의해 소실되어 조선시대에 다시 만든 불상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조금 눈을 크게 뜨고 비로전과 극락전의 불상과 대웅전의 불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 있는 일입니다. 신라 때 불상은 어깨가 곧게 펴져 있는 사자상을 닮은 반면 조선시대 불상은 어깨가 처진 느낌이 듭니다.
신라인의 기상은 불국사의 구조에도 잘 녹아 있습니다.
사진을 남기기 좋은 포토존으로 내려가면 불국사의 최고 핵심인 연와교와 칠보교로 이어진 극락전이 있고 백운교, 청운교로 이어진 대웅전이 있습니다.
불가에서 대웅전은 현생을 나타내고 극락전은 내세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건물의 크기를 보면 내세의 극락전보다 현생의 대웅전이 훨씬 큽니다. 불교가 가진 내세보다는 현생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신라인의 생각이 그대로 절의 크기로 나타낸 것입니다.
불국사를 중창할 당시 신라는 길고 긴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로 들어선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창조력과 문화는 최대의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국사의 석가탑은 백제 출신의 아사달이 지었으며 사찰의 기초인 석축은 고구려의 그랭이 공법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런 기술력은 당나라 시안에 64m의 목탑이 있었지만 신라에는 82m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감포의 감은사지에는 바닷물이 절 앞까지 들어오는 감은사와 감은사 탑이 세워졌고 세계 유일의 인공석굴인 석굴암이 있습니다. 이는 문화적 자신감으로 불교를 전래해준 인도나 중국보다 훨씬 앞선 기술로 신라의 예술적 감각과 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향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위해 불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아닐까요? 불국사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역사이고 자랑입니다.
어떤 목적으로든 불국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 지울 수 없는 소중하고 진한 감동을 가져 올 것입니다. 불자라면 불자의 생각으로, 불자가 아니라면 우리 조상의 위대한 유물로 품격 있는 신라 건축의 화려함과 정신적 의미를 담아가면서 우리 문화에 대하여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