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 양자산) 산중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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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 산중옛길
양자산 산적마을 이야기
고구려유민 산적들의 마을 산중옛길의 시작
신라(新羅.기원전 57년~935년)는 한반도의 동남부
경주를 본거지로 시조인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제56대 경순왕까지 993년간의 왕조를 이은 나라다.
세계적으로도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했었는데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540년~576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가 고구려땅이었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지배자가 되자 고구려의 유민들은 양자산의 북쪽 기슭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의 분지로 피신해서 터를 잡았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낯 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산적행위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후, 이들은 화전(火田)을 일구고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내는 한 편, 다랭이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경기도 양평 강사면 ‘산중마을’의 시작이자 역사다.
지금의 행정구역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와 신화리,
화양리 일대가 이들 고구려 유민들의 본거지로
이들의 영원한 고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이 땅에 조선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키고자 관직을 뒤로하고
은둔하기 위해 모여든 ‘절개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고장이지만,
불과 반 세기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양평군의 오지에 속했다.
군청소재지에서는 큰 강 건너 편,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찻길이 있고
큰길이 있는 양평읍내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양평장보다 더 큰 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염티고개를 넘어 먼 길, 퇴촌을 거치고
광주(廣州)까지 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확 달라 졌다.
집집마다 갖고 있는 자가용차로 잘 뚤린
길을 타면 전국 어느 곳이나 이웃 같은 세상이 되었다.
(계속)
(1)
국보 제186호가 출토된 땅 신화리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킨 절개의 고장
통일신라시대의 강상마을을 한번 생각해 본다.
1976년 신화리에서 경지정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고증을 거친 후,
‘국보 제186호 양평신화리금동여래입상
(楊平新花里金銅如來立像)’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크게 꽃피웠던 성지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더 이상의 불교유적을 찾지 못했지만,
엄청난 불교유적을 발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저술한
‘역사의 연구’에서는 인류문화의 발상지는 큰 강가라고 했다.
범람하는 강물의 ‘도전’에 사람들의 ‘응전’이 바로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첫댓글 선배님 정말 수고 많으셨읍니다.
나의 고향이지만 그런 역사를 모르고 있었읍니다. 너무 소중한 역사를 찾아 소개해 주심에 감사드림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자주 갔든 곳이고 초등학교 동창이 2명이나 있었든 마을이고 1960년대에는
밀가루 사업으로 계단식으로 농지를 만들어 농사 짓든곳인데 이제는 울창한 나무숲이 되었엇읍니다
선배님 덕분에 산중을 자주 가게 되어 지난 5월 17일 다시 갓다 왔고 쉬일간 다시 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