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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조 시집 해설
청산을 휘돌아 흐르는 물길의 서정언어
박윤배 (시인)
1.
물길이 여덟 번을 고쳐흐르는 동안 삶의 언저리는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그래도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을 보석 같은 언어로 다듬어 낸 그 결과물이 곽태조 시인이 이번에 상재하는 시집일 것이다. 시인으로서 이미 수필집을 가지고 있는 그 이지만, 산문과는 다른 운문에서 만나는 언어의 결정체들은 그 빛깔과 농도가 다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자장은 큰 흡입력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순간의 정지를 바탕으로 그려낸 그의 체험들에 상상력이 보태어지면서 시 속에서의 시간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농경사회 대가족 중심의 세계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다양한 삶의 거처에 따른 변화들을 한꺼번에 녹여낸 것들이다, 또한 연조가 깊은 시인이 처음 세상에 내어 놓는 첫 시집임에 그 특징과 가치는 충분히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마치 100년에 가까운 역사책을 앞에 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짐작으로 나 가능했던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시간이 주는 변화의 흔적들을 타임캡슐에서 꺼내보는 감동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곽태조 시인의 시는 사회적인간이기 이전에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연친화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구의 시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무렵의 초창기 낭만주의적인 시부터 리얼리즘적인 시를 지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 까지 모든 시의 시론을 뭉뚱그려 놓으면 아마도 이 시집의 시들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시는 내면정서를 시적 매개물을 통해 쓴 시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등 이해의 통로로 들어가는 다양한 길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상태감정을 구체적 형상으로 바꾸어놓은 시인의 시들은 굳이 구지 따지고 보면 순수서정시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억지로 꾸며진 시가 아닌 살면서 만나는 상황에 울컥하면서 회상하고 추억하며 오늘을 견디고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의 정신은 오랜 세월을 흘러온 강물의 변화처럼 느끼고 바라본 안목에 의해 침묵이 되고 더러는 진술이 되고 있다. 이미 그의 혼령이 태동시킨 시의 씨앗은 시인에 의해 창조된 독립된 존재물이 되고 있다. “시의 감정은 수없이 다양한 정서를 띠게 되고 일상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곽태조의 메타언어에 초창기 순수시이론을 정립한 박용철의 말을 빌려 이해의 다리를 놓아보면 진실, 진정한 정서와 감각을 한 차원 더 넘어서는 언어적 표현에 충실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형상화 시켜야 한다는 순수시 이론에 가닿는다.
2.
시집의 시는 4부로 분류되어 있다. 오랜 시창작의 결과물인 한 권 분량의 시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민했었는데 부를 나누길 잘했다는 생각이든다. 전제적인 색깔은 순수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편안하게 1부는 동심의 시각으로 쓴 시들을 모아 놓았음을 알겠다. 세상에는 많은 시인들이 있고 나름 개성적인 시들이 있지만 그러한 시인들의 초심이 바로 때 묻지 않은 어린 눈에 비친 반영의 결과물들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는 호기심이 점점 확대되면서 삶의 그늘과 사랑 그리고 어둠의 구석들 혹은 마음의 상처들에게까지 미학의 촉수를 들이민다. 종국에는 겨우 일가를 이루고 다시 동심의 순박하고 단출한 언어 몇 줄을 남기지 않던가. 1부에 배치해 놓은 곽태조 시인의 시는 난해하지 않거니와 누구라도 이해가 되는 쉬운 언어를 매개로 시말을 이끌어 가고 있어서 사실은 해설을 붙인다는 게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다. 단지 세상을 경험한 폭이 크기에 다소 나이가 어린 독자들은 이런 시절도 있었나?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표제 시 <그만 하시라는 옛날이야기>도 손자 녀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옛날이야기 이거나 고리타분한 꼰대의 잔소리 혹은 꾸지람처럼 들리는 건 아닌지, 이미 시인은 손자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지 않아도 알고 있음을, 반어적인 표현한다, 다만 그런 장치를 마지막 한 행에 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어떤 소명 같은 의식이 한권의 시집을 남기고 있다. 회고된 풍광들은 거의가 시인의 따뜻한 심정을 비추는 진솔하고 담백하게 맑은 하나의 거울이다.
죽도 세끼 못 먹어
부황난 사람을 본적 있다 했고
너는 춘궁기 찐보리
덜 대낀 밥도
배부르게 못 먹었다 했다
삼베 보자기 덮은 대소쿠리 꽁보리밥
여름 찬물에 말아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고
누가 뀐 구린 내에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했지
초가을 급히 베어 만든 찐쌀
방귀 질 나자 보리 양식 떨어진다는 건
가을 들판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
조밥 기장 배추뿌리 물김치
주린 배를 채웠다 했지
피자 통닭 시켜주어도
봄날 입맛 없다며 밀쳐내는 손자 녀석
이제 옛날이야기는
그만 하시라는 듯
먹지 않고도 배부르다 한다
-<그만 하시라는 옛날이야기>전문
피자나 통닭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 시인이 떠올리는 배고프던 시절의 음식들, 춘궁기 찐 보리쌀이나 꽁보리밥, 조밥, 기장, 배추뿌리, 물김치 등은 아마도 시인의 뇌리에 남아있는 한시절의 음식들이다. 요즈음에야 이런 음식들이 건강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지만 어린 손자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다. 먹거리 대상 또한 세월에 따라 바뀌었듯이 시인들의 시도 시절의 입맛에 따라 바뀌었음에도 곽태조 시인의 동심 안에 각인된 맛있는 음식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손자 아이는 옛날이야기 그만하시라는 것 아니겠는가. 시인은 그만하시라고 해도 시인은 하고 싶은 것이다. 한 핏줄로 이어진 관계이니, 더더욱 손자와 눈높이를 같이하고 싶은 것이다. 어른의 마음이 아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대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복잡 변화무쌍한 현대 사회의 정황들 모두 어리고 맑은 심성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 1부의 시들이다.
바람 되고 싶은 내 마음을
청 보리밭 위로
띄우고 싶다
몸을 떠나 종다리로 떠도는 마음이
새벽 녘 선운사 풍경소리 듣다가
공양 간 보살 졸던 고개 들 때
마지막 남은 동백꽃에 부리를 묻고
공양드리고 싶다
먼 바람소리도 잘 들리는 소녀의 귀에
책갈피 넘기는 소리
들려주고 싶다
푸른 구름 업고 고개 넘을 때
눈 비 골고루 뿌리게 하여
잠든 개구리
깨우고 싶다
센 물결에 이랑 만든 4대강
캄캄한 수초 대궁 흔들어
깊은 시름 줄줄이
지저귀고 싶다
-<종다리 마음>전문
헛간으로 밀려나 쓸모를 잃은 가마솥도 어머니 젖가슴으로 비유되고 국시 꼬랑댕이를 턱 괴고 기다리던 어린 자신을 국수에 대한 기억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또한 상추쌈은 샘가에서 함께 등목을 하던 고향의 아이들(동무들)이 그려지는가 하면 진달래꽃을 보면서 봄날 저물 무렵 화전을 부치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종다리, 개미, 새벽, 종소리, 호박순에 대한 기억 등등이 생생하게 서정시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렇듯 1부 시들이 동심의 시각에 투영된 시들이라면 2부의 시들은 책상머리에서 회상으로 쓴 시들이 아닌 현장체험을 통해 시인의 내면 의식을 투영시킨 시들로 보인다. 우선 팔공산 갓바위 아래 식당가에서 먹는 수제비에서 관봉석조여래좌상에 드리는 공空을 뭉클하게 만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수제비에는 할머니 손 냄새가 들었다는, 솔바람 설법이 귀에 쟁쟁하다는 직관에 이른다. 시의 소재들은 촉각에서 청각으로 미각으로 옮겨가며 공감각화 되고 있다. 산비탈 초입 식당가에서 새알수제비를 먹는 체험이 이미지로 바뀌면서 시는 억지스럽지 않게 완성도 높은 空사상에 이르고 있다.
팔공산 갓 바위 아래
집단시설 지구에서 떠먹는 수제비에는
관봉석조여래좌상에 드리는 공이
단돈 삼 천 원에 뭉클하다
가루를 뭉쳐 싹싹 비빈 수제비
우리 할머니 손 냄새가 반죽에 그대로 들어
나이 수만큼 먹어야
아무 탈 없이 자란다는 솔바람 설법이
귀에 쟁쟁하다
내 아랫배 불룩하게
채워지는 공
몸 안에 든 수제비는 점점 굴러가며
눈 덩이처럼 커지나 보다
-<공空 수제비>전문
팔공산 갓바위, 계룡산 떡갈나무, 공원, 낙동강, 돌하르방, 백두산, 진골목 미도다방, 비슬산에서, 의자의 내력, 칠보산, 태종대, 통영바다, 해질녘 치악산 등등의 공간이 시의 배경이 된다, 누구나 아는 장소들 이지만 시인이게는 색다른 어떤 영감을 주고 있는지. 발길을 따라 가면서 시인의 생각을 골라 읽는 재미는 눈 밝은 독자의 몫이다.
3부에서는 날씨나 기후 절기에 따른 시인의 민감한 미학적인 촉수는 어떤 언술로 드러나는가. 오전, 오후, 저녁, 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적 배경과 쨍쨍한 날, 흐린 날, 비오는 날 등등에 따라 기상캐스터보다 더 민감한 시인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지구에서 인간이 오랜 영장류로서의 위치를 지켜오면서 본능적으로 중요했던 것이 기상일 것이고, 농경사회에서 태어난 시인이고 보면 더더욱 날씨와 관련된 반응들은 서정시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곽태조 시인 또한 그러한 민감한 반응들을 3부의 시 여러 편에서 녹여내고 있다.
담장 위를 훌쩍 넘어온
꼭대기 간지러운 미루나무 그림자가
닭장 둥지 알 품 듯 구름을 품어
저절로 낮달은 부풀어 올랐다
삽살개 귀 베고 눕자고 졸랐다
모녀 누운 대청마루에 와서
감나무에 붙은 매미 향해 드러내는 늙은 치아
살며시 손부채 내려놓은 나는
나무의 뿌리처럼 잠들 것이다
마당에 파놓은 작은 연못
늘어선 갈대 속에 눈감은 송사리들
통통한 아랫배 속에도 들어가 볼 것이다
낮달이 가끔 기웃거려 삐꺽거리는 봉창
제풀에 놀란 삽살개는 꼬리를 감추기도 했지만
사랑채 할아버지 목침 뒤집히는 소리는
용케도 아는 것처럼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내 낮잠은
털갈이하는 삽살개
가려운 등도 살살 긁어 주리라
-<낮잠>전문
바람도 자던
연분홍 치맛자락
두견화전 봄놀이 나온
부녀자들이 펄럭펄럭
너도 나도 나비춤을 닮아 갈 때
바다 건너 들판 넘어
지지베베 돌아온 제비들
나래 옆에 겹겹이 끼고 온 박씨
등 너머 새 흥부네 집 찾아
솟구치며 노래한다
어미 배는 자꾸 불어나는데
언제 새집 지어 쉬게 할까
숫 제비 애타는 사랑도 지지베베
써레질 논흙 한입 입에 문 제비부부
쉴 새 없이 논둑을 드나들어
처마 밑에 둥지를 튼다
치맛단 부푼 부녀자가
화전을 뒤집어 굽는 동안
젖어있던 제비집
절반은 말라 간다
-<삼짇날>전문
위 시 <낮잠>은 계절이나 시간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면서 제목이 이미 낮잠이니, 점심을 먹은 후의 오수에 든 시간일 것이고 계절적인 배경은 아마도 여름의 막바지 일 것으로 추측된다. “꼭대기 간지러운 미루나무 그림자가 / 닭장 둥지 알 품 듯 구름을 품어”와 “감나무에 붙은 매미 향해 드러내는 늙은 치아 ”로도 여름의 막바지 가을옷 갈아입는 삽살개를 연상하기까지 전혀 이해에 불편함이 없다. 또한 제목이 이미 삼짇날인 위의 시는 또 어떠한가? “두견화전” “써레질 논흙 한입 입에 문 제비부부”가 삼짇날의 정황과 맞물리면서 “치맛단 부푼 부녀자가/ 화전을 뒤집어 굽는 동안/ 젖어있던 제비집/ 절반은 말라 간다”라는 알레고리로 마무리하는 시인의 언어조합능력은 기후나 기상이 주가 되는 게 아니라 시의 배경에 계절의 아우라를 두면서 맥박이 살아 있는 서정시의 백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겨울 수채화>, <가뭄>, <감자이야기>, <거룻배 갯벌에 발목 잡히듯>, <고향 잎산><군불>, <늦가을 그림자>, <복더위> <봄비의 악보> 등등의 시들도 제목이 주는 울림은 평이해도 시안에 들어가 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직관과 알레고리의 장치들을 숨겨놓고 있다. 이렇듯 기후에 관련된 기억들을 떠올리는 그의 시들은 과거의 회한이 과거로만 남지 않고 현실의 상황과 대비, 혹은 대조되기도 하면서 제 각각 온도와 습도를 달리하고 있음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4부의 시들은 1,2,3 부의 시들과 이미지 조합의 측면에서는 연장선상에 있는 시들이긴 하지만 연륜에 의해 나름 일상의 삶을 깨달음에 경지로 바라보고 일갈하듯 시말로 내뱉은 시들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현실고발적인 요소도 있다. 고집이나 아집이 아닌 제시로 볼 수 있는 정도다. 아마도 교훈적인 목소리를 높였다면 서정시로서 읽는 재미는 반감 될 수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하도 많다
국화도 시시 철철 핀다
군자의 절개를
닮았다는 국화
이제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다
첫서리 맞으면서
만향을 뽐내던 국화
차와 술에
꽃잎을 얹던 국화
안쪽이 닳은 운동화
발가락 자리에 남긴 국화
달성공원 서쪽
담 끝자락에서
마른 국화 섶 곁
한 사내도
낮잠 든 국화다
-<노숙>전문
3.
달관했다는 말은 세상을 오래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집요하게 하나의 일에 오래 매달렸다는 뜻도 아니다. 시 쓰는 일로 평생을 보냈다 해서 세상에 빛처럼 남길 좋은 시를 수백 편 쓴 이도 없다. 현학적인 언어들을 버무려 적당히 조립을 잘 한다고 해서 무게를 지닌 시가 탄생되는 것도 아니다. 앞서간 많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허상의 그늘을 쫒다가 뒤늦게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달관의 경지 아니겠는가. 시는 결국 짧으면서 단발마적일 때 완성되는 것이다. 작고한 시인 중에 김춘수 시인이 그러했고 오규원 시인도 마지막에 남긴 시는 짧았다. 시단의 원로 시인인 고은 시인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모두 태어나면서 시인이고, 마지막 임종하면서도 시를 쓰고 간다고 했다. 태어날 때 “으앙!” 울음으로 시를 쓰고 죽을 때는 “윽” 숨을 내려놓는 그게 시라는 말처럼 달관으로 가는 길은 쉽고도 어렵운길이다. 고된 삶의 길을 사랑과 상처와 욕망과 절망의 늪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붙잡고 있던 안개 같은 것들을 내려놓으면서 어린아이처럼 맑아지는 것이다.
시창작의 시작과 끝 또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곽태조 시인의 시는 맑다. 맑아서 순수서정시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호칭 앞에도 순수서정시인이라고 붙이는 게 맞겠다는 확신이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을 보면서 확연히 느껴졌다.
일찍이 미국시인 로버트 펜 워랜(Robert.Penn.Warren)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배제하면 순수시라고 했다. 1) 관념, 진리, 일반화된 의미 2) 명확하고 복잡한 ‘ 지적인’ 이미지 3) 아름답지 않고, 불유쾌한 혹은 불투명한 재료 4) 정황, 이야기 식의 논리적 전환 등등에서 말하고 있는 요소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곽태조 시인의 시는 정서적 노출이나 수사적인 소음에서도 나름 외과 의사적인 칼을 들이대고 있다.
형상화된 이미지로 이야기 하려는 태도는 결국 설명이 배제된 압축된 형태를 요구한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상징성 암시성을 어떻게 이미지 안에 수용할 것 인가?에 대한 고민이 보태어진다면 좋겠다는 조언을 드린다. 다양한 경험을 설명하듯 다 말하지 않으면서, 이미지와 결합시키면서 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머리 싸매고 끙끙 앓는 과제 일진데, 오늘날 우리 시가 산문으로 흘러가는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싫어하는 시인들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새로 태어나는 손자들은 옛날이야기를 듣기 싫어해도 꼭 붙들고 들려주는 시인이 있어서 다가 올 유구한 강물 같은 역사는 또 청산을 휘돌아 더 낳은 내일을 열어갈 것이다.
첫댓글 곽태조 선생님..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