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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린
시조시집 {저 하늘 목화밭들은 어느 누가 가꾸나} 출간
서주린 시조시인은 1941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과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건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군복무 후 국세청
국세공무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국세동우회 부회장이며 월간『국세인 광장』편집인을 맡고 있다.
2001년 계간《창작수필》에 수필가로,
2015년 계간《시조문학》에「시조문학작가상」을 수상하여 시조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창작수필문인회 부회장,
대한문학 운영이사를 역임하였고,
한국문인협회 및 시조문학문우회
회원,
송파문인협회와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송파수필작가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9년 「올해의 시조문학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자호는 청곡靑谷,
호는 우담佑譚과 덕산德山.
고려 말에
생성된 시조時調는 변주된 정형시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조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견딘 이유를 서주린의 첫
시조시집 {저 하늘 목화밭들은 어느 누가 가꾸나}를 읽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언뜻 정형定型이라는 시조의 형식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제약하는 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서주린은 양식적 틀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조를 창작하고 있다.
전체 3장으로 구성된 (평)시조의 틀을 그는 연과 행의 조정을 통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주한다.
이명 耳鳴의 고통으로 선경仙境을 읊은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상의
소리인가 외계인의 교신인가/
눈뜨면 들려와도 해독하기 어려워라/
강약이 다름에 따라 몸 상태를 알
뿐이다.//
낮이나 밤이거나 가리지 아니하고/
날아든 고목 숲에 매미가 울고
있다/
한평생 같이 살기를 작정한 듯
하여라
-
「이명(耳鳴)」
서주린의
시조는 제 몸속에서 울리는 소리인데도 해독하기 힘든 이명(耳鳴)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싶다.
귓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내 안에서 울리지만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인은 이명을 “천상의 소리”나 “외계인의 교신”으로 표현한다.
어느 것이 되었든,
이명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울리는
것이다.
경계 안에서 경계 밖에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고나
할까.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몸 상태에 따라 강약을 달리 하며 들려오는 이명을
시인은 한평생을 같이 해야 할 ‘바깥’으로 이야기한다.
이명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동시에 안에서 울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해독하기 어려운 이명을
온몸으로 느끼며 시인은 사물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시적 힘을 기르고 있는 셈이다.
이명과
함께 하는 삶은 달리 말하면 고통과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한다.
귓속에서 항상 매미 울음소리가 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명을 치료하는 이런저런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나이 들어 생기는 이명은 쉬이 치료하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이명은 더불어 살아야 할 병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든 이의 훈장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중요한 것은 이명 자체가 아니라 이명의 고통을
다스리려는 마음이다.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명이고,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교신이 이명이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이명은 시인을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어차피 시(조)는 고통을 승화하는 양식이 아니던가.
옛시조/
한 가락에/
선경을 넘나든다//
시흥이/
절로 나서/
지필묵을 당겼더니//
붓대는/
나가지
않고/
학이 먼저 날아든다
-
「풍류」
옛시조 한
가락을 읊으며 선경(仙境)을 넘나드는 시인의 모습은 무엇보다 이러한 이명의 시학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선경은 경계 밖에 있는 세계이다.
아무나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사람은 결코 경계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을 중심에 세운 것 자체에 이미 경계를 부정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경을 노래한 위 시에서 시인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에 주목한다.
사물에 언어를 부여하면 우리는 과연 사물을 지배하게
되는 것일까?
“붓대는/
나가지 않고/
학이 먼저 날아든다”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사물과
‘직접’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을 경계를 넘나드는 마음과 연결하고
있다.
‘붓대’를 든 시인은 선경에서 느낀 시흥을 언어에 담아 표현하려고
한다.
붓대=언어가 시인과 선경을 이어주는 매체가 된다는 말이다.
마음속에서 시흥은 넘쳐나는데 붓대가 나가지
않는다.
시흥에 걸맞은 언어를 찾기가
힘들어서다.
붓대만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시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학’이 날아든다.
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을
가리킨다.
어떻게 이런 대상을 볼 수
있느냐고?
시인이 지금 선경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는 언어에 매여 있지
않다.
자기를 중심에 세워 사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넘어 선경에 이른 존재만이
‘학’이라는 사물과 직접 만나는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사물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려면 언어의 눈,
달리 말하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눈을
내려놓아야 한다.
선경의 하늘을 나는 학을 보려면 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돌려 말해도 좋다.
「바람」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불어오는 바람을 설렌 마음으로 맞이하는 뜨락의 나뭇잎에
주목한다.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시인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고
느낀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에 시인도,
나뭇잎도 설레는 걸 보면,
한동안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리지 않은
모양이다.
시인은 “뜨락의 나뭇잎들이 나보다도 설렌다”라는 구절로 비를 맞이하는 나뭇잎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물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적 인식이라고 하겠다.
깊은
산/
등성이에/
바람을 등에 지고//
소나무/
가지마다/
옹이가 피어있다//
연륜이/
더해
갈수록/
꿋꿋함이 있어라
-
「노송」
배움이/
즐겁기에/
늦다 않고 시작했다//
시작(詩作)이/
버거워도/
만남이 반가워라//
오늘도/
글밭 찾아서/
나갈 채비 바쁘다
-
「면학(勉學)」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자연의 일이나 인간의 일이나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노송」을 먼저 보자.
바람을 등에 지고 산등성이에 서 있는 노송은 연륜이
더해갈수록 꿋꿋함을 더해간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노송이 더욱 더 꿋꿋한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무/
가지마다/
옹이가 피어있다”는 구절에 그 이유가 잘 나와 있다.
옹이는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를
말한다.
나무가 살아온 내력이 옹이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나무에 옹이가 피는 시간은 그러므로 나무가 온몸으로
바람과 맞선 시간을 품고 있다.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나무에 옹이가 맺히는 게
아니다.
옹이 하나하나에 시간을 견딘 나무의 생이 스며들어
있다.
노송이
온몸으로 시간을 견디며 살았듯,
「면학」에 나오는 화자(시인)
또한 즐거운 배움을 위해 늦은 나이에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고 싶다고 해서 자연스레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엄청난 생의 고투를
겪어야 한다.
오죽하면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표현이 나돌겠는가.
시인은 시를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시작(詩作)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사물들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도 글밭을 찾아 나갈 채비를 하는 시인의 모습은
시를 쓰는 일이 곧 사물들이 사는 세상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송은
온몸에 옹이를 맺어 한 생을 견디고,
시인은 시작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 서슴없이
글밭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겨울나무」에 표현된바 그대로,
돌아올 봄날에 꽃을 피우려면 낙엽 진 나무들은 하얀
옷을 입은 채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어야 한다.
새눈을 틔우기 위해 동통을 앓는 겨울나무처럼 시인 또한
다가올 봄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길을 걷는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건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 생명이 내보이는 이 진실을 잘 알고
있다.
소나무는 시간 속에서 바람과 맞섬으로써 비로소 노송이
되었다.
시인이라고 다를까?
시인 역시 시간 속에서 시간과 맞섬으로써 비로소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시인’이 되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시작은 어찌 보면 “부처님 말씀을 듣고도 해탈하기 어려”(「산사에서」)운 상황과 비슷한 일인 듯도 하다.
말씀으로 이를 해탈의 길이라면 그 누가 이 길에 이르지
못할까?
중요한 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닌지도
모른다.
말씀으로 이해할 게 있고,
말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부처님 말씀과 해탈 사이에 드리워진 멀고도 가까운
거리는 시인이 사물과 이루는 가깝고도 먼 관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인은 말씀과 해탈의 경계에서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미묘한 문을 발견한다.
물론 그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은 해탈에 이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다만 시인은 오늘도 온몸에 옹이가 질 정도로 면학하고
또 면학할 따름이다.“고요히/
비우고 또 비우”(‘시인의 말’)는 시적 삶을 시간 속에서 날마다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서주린 시조시집 {저 하늘 목화밭들은 어느 누가 가꾸나},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