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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기능 |
경고의 기능 천재, 침공, 전쟁, 평등주의적 감정 도구적 기능 경제 및 기타 제도들에 필수적인 뉴스, 윤리화 사회적 기능 이슈에 대한 지위 부여, 의제설정 |
경고의 기능 도구적 기능 위상의 제고 오피니언 리더십, 지위부여, 의제설정 |
도구적 기능 파워, 의제설정에 유용한 정보 탐지의 기능 전복활동 및 일탈행위에 대한 인지 여론의 관리조정 감시청, 통제, 파워의 정당화, 지위부여 |
문화적 접촉에 도움 문화적 발전에 도움 |
역기능 |
국내 안정을 위협 ‘더 잘사는’ 사회들에 관한 뉴스, 공포감 촉발의 위험성, 사회계층간의 격차 |
불안감 자아매몰 무관심 마약중독적인 효과 |
힘에 대한 위험 현실 상에 관한 뉴스, ‘적’의 선전, 폭로 |
문화적 침범 이용 |
2) 사회화 기능
매스 미디어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나 규범 그리고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정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 주거나 혹은 그 사회에 새롭게 편입되는 사회 구성원에게 전수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매스 미디어의 이러한 기능을 사회화(socialization)의 기능으로 칭하거나 문화전수 기능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매스 미디어의 교육적인 기능과 문화적인 기능을 동시에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수행되는 사회유산 전수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매스 미디어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될 공통의 사회규범, 가치관 및 집단적 경험 등의 폭넓은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적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줄 수 있다. 실제로 매스 미디어가 전파하는 내용에는 어떠한 행위양식이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고, 나아가 어떤 것들이 장려되고 있는 가를 직․간접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에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동화되어 갈 수 있다.
이처럼 사회의 규범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이 사회화이며,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회화는 사회 전체가 동일한 규범을 토대로 통합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공통의 사회규범과 문화적 전통에 접촉하게 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적응을 도와준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러한 사회화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귀순한 북한출신들이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일탈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이유 중의 하나가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길들어진 가치관11)에 의해서 현재의 변화된 환경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을 재교육하거나 재사회화 과정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너무나 제한적인 사회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매스 미디어는 다양한 계층의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 교육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매스 미디어의 내용은 사회․정치․경제․문화 및 생활에 관계되는 모든 정보와 지식들을 망라하고 있다. 학교와 같은 제도 교육기관에서 미처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다양한 내용들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서는 취학 전 아동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일반적인 사항들을 반복 학습시키고 있고, 제도 교육을 이미 수료한 성인들의 경우에는 어학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내용을 제공함으로써, 능동적인 학습이나 우연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매스 미디어의 이러한 기능은 사회통합과 결속을 다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셋째,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회화는 사회적 일탈행위를 통제하는 동시에 사회규범의 윤리화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전통적으로 ‘효’ 사상을 중시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 매스 미디어들은 존속상해에 관한 범죄사건들을 상대적으로 매우 엄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일탈행위에 대해 범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움으로써 기존의 도덕과 가치관이 유지․강화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매스 미디어가 일탈행위를 공개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고 윤리를 재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사회 규범의 윤리화 기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내용들이 다소 규격화되고 있고 획일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하게 하거나 창의성을 저해하는 등의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매스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들이 주로 그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간의 차별성이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수용이 어려우며 대부분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화적인 요소만을 반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의 취향이 획일화되기 쉽다.
이 같은 경향은 고급 문화나 전통 문화 혹은 민족 문화의 쇠퇴를 초래하여 다음 세대로 전승을 어렵게 만들며 나아가 쾌락 지향적인 저질문화를 양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북한의 경우, 이러한 획일화 현상은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다른 문화적 현상을 수용하기란 생각보다 까다롭고 힘겨운 측면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상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발생한 다른 가치를 부분적일이라 할지라도 수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장 전 과정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수용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릴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문화적 획일화 과정은 비판의식이나 자기방어기제 자체의 형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 문화권에 있는 수용자를 위해서 발사하는 전파나 메시지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치밀한 고려가 필요한 것이다. 즉 설득대상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이들의 성장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여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사회화 기능이 사회화 대상자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인간성을 침해하게 된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즉 매스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이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를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개별적인 능력에 맞추어서 적절하게 조정될 수는 없다. 만일 개인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어려운 내용일 경우, 즉 매스 미디어는 사회화 활동의 비개인화를 초래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를 이해하고 내면화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혹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매스 미디어의 이같은 기능이 통일과 관련해서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점은 국민들간에 합의된 대 북한정책 내지는 정부의 대북한 정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부나 국민들의 대 북한관에 따른 언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 가를 보다 정확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국민들간에 합의된 북한정책 내지는 정부의 대 북한정책이 무엇이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III. 한국과 독일의 차이 : 통일정책과 평화정책의 축
統一의 사전상의 의미는 사상이나 조직 그리고 체계 등 나뉘어진 것을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되게 함 또는 서로 관련되어 떨어질 수 없게 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平和는 평온하고 화목함 또는 전쟁이나 무력충돌 없이 사회가 평온한 상태12)라고 정의한다. 즉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통일은 수단이나 과정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는 ‘전쟁이나 무력충돌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방법론 즉 전쟁이나 무력 충돌 없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의미는 통일이라는 결과 즉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무력적 통일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평화적 통일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통일이라는 지향점을 갖지 않은 채 평화만을 당면의 목적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한 평화로운 상태에서 그 자연적 결과물이 통일로 갈 수도 있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전적 개념 정의를 뛰어 넘어서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내용은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과 독일의 대 북한정책 및 대 동독정책을 보아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통일정책과 평화정책13)이라는 기본방향의 차이점이 분명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 전의 동서독 관계와 현재까지 남북한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 가를 살펴보면서 통일정책과 평화정책의 축을 이루는 핵심적인 정책적 변화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서독의 평화정책
1. 서독의 동방정책 형성과정
1969년 10월 22일 빌리 브란트가 브란트가 이끄는 새로운 서독 정부의 출범은 통일과 관련된 독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란트 수상은 정권이 수립된 지 약 일주일 후 10월 28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아데나워 정부 이래 전개되어 온 서독정부의 대 동독정책에 획기적 변화를 추동하는 내용을 대 내․외에 천명했다.
즉, 새로운 대 동독정책과 함께 시작한 브란트 정부는 분단 초기의 아데나워 정권부터 일관되게 추진해 온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한 이른바 ‘동방정책’을 그 대안으로 채택한 것이다. 동독을 인정하고 유럽의 평화에 대한 서독의 정부 방침에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브란트 수상의 연설은 중대한 정책변화의 함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음 내용이 그 브란트 수상이 행한 연설 중 획기적 변화에 대한 입장 천명의 가장 중요 부분 중 하나이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독)이 수립된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독일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규제된 공존관계를 극복하고 협력관계로 전환되도록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독일 문제의 해결없이 유럽의 긴장완화와 유럽의 평화보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평화유지를 위해 독일문제 해결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14)
이상의 연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독정부와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국제법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독일 국가가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서로가 외국관계가 아닌 내적 특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15)
둘째, 무력행사포기에 대한 양독의 선언 교환을 포함한 대 소련과 교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셋째, 폴란드와 관계정상화 교섭의 현실적 불가피성을 설명하였다. 특히 무력행사 포기와 소련 및 폴란드와 협상의 필요성 등은 유럽 평화보장의 필요성에 입각한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브란트 정부가 천명한 ‘동방정책’의 주요 골자이다.
이처럼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은 동독에 대한 현실적인 정책을 통하여 양 독일간에 심화되는 대립을 완화하고 긴장상태와 갈 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이것은 1966년 이래 특히 미․소간의 관계와 동․서독 관계 전반에 걸쳐서 추구되어 온 긴장완화 노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독정부는 증대하는 독일민족의 분열위기에 대처하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바탕으로 당시의 소련 및 폴란드와 대 동독관계에 대한 잠정협정 형태로 조약을 맺음으로써 양독이 안고 있는 당면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결방법 모색에 있어 가장 일차적인 것으로 서독은 동독을 또 하나의 독일국가로 인정하고, 또한 당시에 존재하던 유럽 국경선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지역 전체와 베를린에 대한 美․英․佛․蘇 등 4대국의 책임이 그대로 존속되며 독일민족이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재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평화는 결코 독일민족의 문제만이 아니고 유럽의 제국가들의 문제임을 재인식하여 평화유지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태도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할 내용은 서독이 동독을 또 하나의 독일로 인정하는 대목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것 처럼,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그리고 키징어 정부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까지 서독은 결코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서 대우하거나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소련점령지역(SBZ)' 또는 ’중부독일(Mitteldeutschland)' 등으로 호칭하면서 하나의 사회주의 집단 정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특히 키징어 수상이 집권할 때는 ‘독일의 다른 부분(Ander Teil Deutschland)'이라고 호칭하므로써 동독의 국가적 독립성을 완전히 부인하였다.16) 그러므로 ‘하나의 국가’로서 동독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과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69년 10월 28일에 있었던 이러한 서독 정부의 대동독․대유럽정책에 대한 입장 표명과 현실 인정을 바탕으로 소위 ‘동방정책’이 그 구체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브란트 정부의 정책선언에 대한 중대한 반응이 약 한달 후인 1969년 12월 초 모스크바에서 나왔다.
당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서독정부의 현실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되 서독정부가 동유럽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먼저 동독을 국제법상의 ‘하나의 국가’ 로 정식 승인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동독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함으로써 독일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소련의 전략이 내재된 것이었다. 그 후 동독의 울브리흐트 서기장도 서독 정부의 현실주의 정책을 환영하면서 ‘기본조약’을 위한 동․서독간의 접촉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양독간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가장 중요한 주춧돌인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이 형성되는 데, 1972년 초 양독 하원에서 독소독(獨蘇獨) 폴란드 조약이 비준된 후 5월 17일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 지침이 되는 서독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의 제10항을 보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은 대독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긴장 완화 원칙과 우호적인 이웃으로서의 원칙이 동서독 국민과 기관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동독을 인근 우방으로서의 우호관계로 이끌어 나갈 것을 분명히 했다.
동유럽 국가들과의 조약 및 미․영․불․소 4대국 협력이 발표된 후인 1972년 6월 15일 바르 특사는 동독의 콜 대표와 첫 번째 의견교환을 시작했고, 서독 내각은 바르 특사에게 8월 9일 공식협상을 지시하는 결의했다. 이에 동독은 동서독의 즉각적인 유엔 동시가입과 공식협상 개시 이전의 외교관계 수립 및 대사교환을 요구했으나 서독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 후 동독이 이러한 전제 요구조건을 철회하였고, 그에 따라 동서독 대표는 동등한 자격․유엔헌장의 원칙 존중․무력 행사 포기․독립성 인정을 바탕으로 한 관계 개선 협의를 1972년 8월 16일에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은 해인 1972년 11월 8일 동서독은 기본조약 문안을 공동으로 작성하는 데 성공하였고, 1972년 12월 21일 이 기본조약은 동베를린에서 서독의 에곤 바르와 동독의 미하엘 콜 두 대표간에 서명 발효되었다.
2. 상호 인적․ 물적 교류
먼저 인적교류 상황을 살펴보면, 양독간 체결된 교통조약과 기본 조약을 근거로 인적 교류가 제도화되어 통독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도 연간 1천만명 이상의 동서독인이 상호 방문했다. 동서독의 인적 교류는 서독인들이 동독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교부받아 이산가족이나 친지를 방문하는 경우가 주종을 이루었고, 그 수가 연간 740만명에 달하였다.
동독으로부터는 340만명이 서독을 방문하였는데, 대부분이 노인들이기 때문에 ‘연금생활자 방문’이라고 불리었다. 동독은 동독인의 서독 이주를 처음에는 합법적으로 허용하였다.
동독인 가족의 서독 이주를 허용한 일은 동독의 정책방향과 동서독간의 정치관계 변화에 따라 그 규모가 좌우되어 왔는데 1972년 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전 1970년대 서독인의 동독방문은 년 100만명 수준이었는데 조약이 체결되면서 200만 명을 넘어섰고, 1986년에는 300만 명 이상의 서독인들이 동독을 방문했다. 동독인들도 초창기에는 연금생활자들에 한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으나 해가 갈수록 방문자 수가 늘어나 1980년에 160만 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인적 교류 진작에 양독 기존의 기본 입장을 살펴보면 서독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없는 통일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분단이 가져다준 불편을 최소화하고, 통일 이후에나 달성할 수 있는 상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대 동독 접근정책의 결실이 인적 교류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동독은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고 실리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인적 교류에 임하였다. 실제로 동독은 인도주의적 사항에 대해 융통성이 있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실상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였으며, 인적 교류조건 완화와 관련하여 서독으로부터 획득되는 경제 이득은 국가 발전 계획의 자원이 되어 동독의 대외 신용도를 높혀 주었다.
다음으로 물적 교류 상황을 살펴보면, 양독은 동서 냉전이 고조되던 1951년 9월 ‘베를린 협정’을 체결하여 양독간의 무역을 ‘內獨 貿易’으로 규정짓고 경제교류를 활성화시켰다.17) 특히 경제교류는 교통조약․기본조약․보건협정․체육의정서 등의 정치적 합의에 고무되어 매우 활발하게 진작되었다. 무역의 경우 서독은 정치적 배려를 하였고 이에 따라 양독간의 무역관계가 극히 균형잡힌 형태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 결과 서독은 동독의 대 서방진출 창구 역할을 하였고 동서독 교역은 ‘內獨貿易’으로서 지위를 향유했다. 이는 동서독의 경우 국가간 무역이 아니라 지역간 교역이기 때문에 국가간 무역의 경우에 발생하는 관세장벽이 없었다. 따라서 서독에서 동독에 수출하지 않고 공급하며, 동독에서 수입하지 않고 구입함으로써 물품세가 전혀 부가되지 않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독은 서독이 신용보증 기반을 닦아 놓은 ‘독일제품’이라는 표시를 계속해서 사용하였으며, 무역에 대한 세제상 특혜를 받으면서 서독을 통해 대 서방 진출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서독의 차관은 동독의 대 서방 외채에 대한 기한 내의 원리금 상환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동독의 대외 신용도를 높여주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이러한 것들이 양독간의 물적 교류를 증대시키고, 긴밀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고, 물적 교류에 전제되는 양독일간의 인적, 정보적 교류와 교통교류의 대량화를 유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18)
결국 이러한 인적․물적 교류의 전반적인 상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를 수 밖에 없다. 즉, 독일의 통일은 통일정책보다 ‘동방정책’이라고 하는 ‘비통일․평화정책’이 주효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상대방인 동독의 현실적인 요구를 받아들여서, 분단과 동독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집권체제의 안정화를 꾀하는 것 즉 상대방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고 이러한 양보의 결과가 방문․교통․언론교류19)․교역의 확대를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교류가 확대됨으로써 동독 측에서는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실익을 실질적으로 챙길 수 있었던 반면 서독 측에서는 상호방문의 확대와 교역의 증대를 통해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해결한다던가 서독의 복지와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설득하는 정신적인 실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인적․물적 교류의 팽창과 교통․통신의 동서독 교류가 빈번해 질수록 양독 간의 관계가 그만큼 밀접해지고, 그 이면에는 양독 모두가 그러한 교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할 만한 대차대조표상의 흑자에 관심이 작용했다는 것은 현재 한반도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그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에 진지한 관찰을 요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3. 평화분위기 조성을 위한 정상회담
동서독간에 접근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네 차례에 걸친 동서독 정상회담이다.
브란트 서독 수상이 1970년 3월 19일 동독 에어푸르트를 방문하여 슈토프 동독 총리와 만난 제 1차 정상회담은 동서 진영간의 긴장 완화 정책에 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동서의 데탕트 추세는 분단된 동서독간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두 진영의 선봉에 선 양독은 유럽 평화의 저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제 1차 회담은 서로 상이한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원칙과 개념상의 차이 때문에 정상회담 자체로서는 구체적인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20) 단지 2차 회담 개최 원칙에 합의하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1차 회담이 끝난 뒤 2개월만인 1970년 5월 21일 2차 회담이 개최되었다. 특히 2차회담은 평소에 동독이 서독에 대하여 동등한 자격 인정 및 국제법상의 외교관계 수립을 시종 촉구하여 온 바가 있어 서독은 기회균 등의 관점에서 동독의 신속한 2차회담 개최 요구를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제 2차 회담에서 서독측은 대표인 브란트 수상이 양독간 협의에서 가장 중요한 당면문제가 될 기본조약 20개 항을 제시하였다.
한편 동독측 대표 슈토프 총리는 서로 상이한 이념에 따라 조성된 두 개의 민족임을 강조하고 국제법상 독립된 국가로서의 관계 수립을 촉구하였다. 그는 또한 전반적인 서독 정책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함으로써 회담을 난항에 빠뜨렸다. 2차회담에서 동독의 태도가 강경하게 된 것은 자국의 입장을 밝힌 후 분단의 책임과 결과를 서독에 전가하려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1차회담 시에 동독 국민들이 서독 수상을 환영하는 시위를 벌인 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차회담보다 더 경직된 분위기에서 진행된 2차회담에서는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고, 다음 정상회담 개최 때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만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
1차와 2차 회담이 데탕트 추세 속에 개최된 데 반하여 3차회담은 동서 진영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1981년 12월 11일부터 3일간 동독 베어벨린에서 개최되었다. 2차 정상회담 후 10여년 만에 일이다.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 핵무기를 독일 땅에 배치함으로써 동서독은 각기 국가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긴장 완화 조성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당사자간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 3차 정상회담은 미소간의 관계 악화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동서독이 강대국간의 대화를 중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진행되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및 폴란드 자유노조 사태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가까스로 개최된 회담에 걸맞게 독일 민족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었으며, 3일간에 걸친 친선행사 등 양국간의 정상관계를 유래없이 자랑한 것이 특징이었다.
슈미트 서독 수상은 3차회담에서 기본조약의 성의 있는 이행, 헬싱키 유럽 안보협회 회의 의결사항 준수, 소련 핵무기 위협 및 세계 평화 정착을 위한 양독의 의무 등을 강조했다. 한편 호네커 동독서기장은 긴장완화 및 유럽 평화유지 노력의 필요성과 현실에 맞는 정책을 강조하였고, 미국의 핵 군비 강화를 비난하였다. 제 3차 회담은 양독의 정상이 각 분야에 걸쳐 이미 체결된 조약과 협정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성숙된 단계의 동서독 관계를 인정하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제 3차 정상회담 개최 후 6년 만에 서독의 수도 본에서 실현된 제4차 정상회담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양독간의 일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겸 사회주의 통일당 서기장 호네커의 1987년 9월 7일부터 5일 간에 걸친 서독 방문은 국토 분단 후 처음으로 동독 국가원수 겸 실권자가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양독 관계 뿐만 아니라 동서 진영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1981년 호네커가 서독의 초청을 받은 이후 1983년․1984년․1986년 세 번에 걸쳐 양독간의 과도한 결속을 저지하려는 소련의 방해로 방문계획이 취소되었으나, 4차회담은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방․개혁정책에 고무되어 실현된 것이었다.
제 4차 정상회담에서 콜 서독 수상과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양독간의 환경보호․과학기술․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3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986년 5월에 체결된 문화협정과 함께 모든 분야에서 협력할 법적 근거를 마루리 지었다. 이는 통일이 달성되었을 때 상태를 사실상 국민들에게 마련해주려는 양독의 의도가 표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토통일 문제․베를린 장벽 철거 등 당시 실현 불가능한 문제의 거론은 회피하였고, 그 대신 평화보장․유럽 국경선 불변원칙 준수 등 관례적인 사항에 합의했으며, 청소년 교류․관광․방문․통화유통․스포츠 교류 등 기존 협력관계 확대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하였다.
제 4차 정상회담은 양독이 각기 명분을 최대한 살리면서 분단국간에 협력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협의함으로써, 평화정착과 국민의 불편 제거를 위한 관계 발전이 본 궤도에 진입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상회담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 다음의 표이다.
차수 |
일시 |
수상名 |
특징 |
합의내용 |
1차 |
1970. 3.19 |
서독 브란트 |
-상호 정치이념에 대한 원칙과 개념 차이 확인 |
2차 회담 개최 합의 |
동독 슈토프 | ||||
2차 |
1970. 5.21 |
서독 브란트 |
-기본조약내용이 될 20개항 제시 |
다음 정상회담을 위한 상호 ‘생각할 시간’의 필요성 합의 |
동독 브란트 |
-국제법상 독립된 국가로 동독 승인 요청 -분담의 책임을 서독에 전가 | |||
3차 |
1981. 12.11 |
서독 슈미트 |
-기본조약의 성의있는 이행 -유럽안보회의 의결사항 준수 -소련 핵무기 위협 비난 -세계 평화정착을 위한 양독의 의무 강조 |
-旣체결된 협정 및 조약 유지·강화 -동서독 관계 상호인정 |
동독 호네커 |
-동서진영간 긴장완화 -유럽평화유지 노력 -미국의 핵 군비 강화 비난 | |||
4차 |
1987. 9.7 |
서독 콜 |
-소련의 방애 공작으로 3차례 방문 취소 이후 동독수상 최초 서독방문 -평화보장·유럽국경선불변원칙준수 -청소년교류·관광·방문·통화유통·스포츠 등 교류 확대문제 논의 |
-환경보호·과학기술·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
동독 호네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독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이들 정상들의 만남은 상징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상호관계의 확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이들의 만남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또한 발전하면서 평화구축이라는 서독의 당면의 목적과 경제발전과 성장이라는 동독의 경제적 이해 등에 기여함으로써 자연히 그 결과물로서의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21)
2) 남한의 통일정책
남한의 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부터 김영상 문민정부의 통일정책까지 개괄하면서 대 북한 통일 정책을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남한의 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의 근본적인 기조는 UN총회에서 인정한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헌법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영토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암묵적으로 통일의 기본적인 정책은 ‘북진통일’임을 내외에 표방하였다.
1960년 자유당 정부가 4.19의거를 통해서 그 생명을 다하고 제 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남한의 통일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즉 통일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은 ‘북진통일’에서 ‘평화통일’로 바뀌었던 것이다.22) 이는 남한이 북한을 ‘괴뢰’로서가 아니라 대화의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새로운 대 동독 정책과 함께 시작한 브란트 정부는 초기의 아데나워 정권부터 일관해 온 할슈타인 원칙에서 벗어나 이른바 동방정책23) 표방하는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밟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제 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통일에 대한 정책기조는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일관된 통일 정책을 추진하기 보다는 남한 역대 정권의 통일정책에 있어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정국전환용으로서의 통일정책의 전형이 이 시기에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 3공화국과 제 4공화국을 거치면서 4차례 정도 통일정책의 변화를 겪는데 먼저 제 3공화국 출범 초기의 ‘제 2공화국의 정책 계승’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 지는 ‘평화정책’이다. 그리고 이어 ‘선경제개발 후통일’이라는 기조에서 나타나는 ‘승공정책’이다. 그리고 이 정책은 1960년대 후반기의 일관된 대북정책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신데탕트시대를 맞이하면서 새롭게 대두되는 ‘대북한 평화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유신헌법을 시작으로 1970년대를 내내 지배하게 되는 ‘멸공정책’으로 전환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 3공화국은 출범초기 제 2공화국의 대북한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제 3공화국의 대북한 평화정책의 기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적인 재수정을 시도한다. 사실상 제 3공화국이 집권하면서 제 2공화국의 대 북한 평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천명하였지만, 가난을 극복하고 국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 과제임을 주장하면서 先건설․後통일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조가 나중에 제 3공화국의 대북 정책을 확정하게 되는 바 소위 ‘승공통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반공정책이며, 북한을 ‘괴뢰집단’으로 간주한 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으로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북교류에 관련된 그 어떤 주장이나 발표도 ‘반공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남한의 대북한 정책은 집권 후 세번째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독일과 상당히 유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즉, 닉슨독트린이 공표되면서 국제정세는 신데탕트 분위기와 다원화 현상이 맞물려 남한 통일정책의 기본노선도 이에 조응하는 분위기로 변화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UN중재를 통한 남북문제 해결이며 내부적으로는 勝共統一이라는 그 때까지의 기조가 남북문제는 남북한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하며 상호 인정해야 한다는 기조로 대북한 정책이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1970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서 8․15선언이 공표된다. 남한은 북한을 공식적인 협상의 상대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8․15선언의 주요 골자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4․19이후 처음으로 있는 대북정책의 획기적 변화였다.
그리고 이 여세는 1971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이 제의됨으로써 남북한이 한 자리에 공식적으로 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대화의 시대’ 개막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어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는 한반도 내의 이산가족 뿐만 아니라 남북의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말 그대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세의 간섭없는 자주통일
-무력사용을 배제한 평화통일
-이념을 초월한 민족의 대단결 도모
이는 남북한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합의해서 발표한 소위 ‘3대 통일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제4공화국부터 박정희정권은 다시 한 번 대북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아니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통일이 안보의 논리에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민주화 운동 탄압을 위한 논리로 변질․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통일이 장기집권을 위해 악용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기득권유지를 위한 정칙적 이해관계에 따라 1974년 8월 15일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3대 원칙이 발표되는 데, 이것이 ‘남북상호불가침조약’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평화의 정착→
성실한 남북 대화와 다각적인 교류 및 협력→
상호 신뢰 회복→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 자유 총선거 실시→ 통일 실현
하지만 근본적인 대북정책의 기조가 승공통일 더 나아가 ‘멸공통일’을 주창한 제 4공화국의 이러한 대북한 관련 선언은 국면전환을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술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 5공화국에 접어 들면서 남한정부는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로 통일정책에 임하였다.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1982년 1월 22일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는 남북간 통일 장애요인의 제거와 신뢰조성을 위한 과도조치로서 ‘휴전 협정 체제’를 유지하면서 ‘남북한 기본관계’에 대한 ‘정전협정’을 체결하며, 이를 위한 ‘남북한 당국 최고 책임자 회담’ 제의와 ‘20개 시범실천사업’ 제의, 그리고 공산권 거주 동포들의 자유로운 모국방문 등을 제안했었다.
이러한 통일방안은 그 때까지 유지해온 소극적인 태도를 적극적으로 변화한 정책이었다. 소위 ‘先실질관계 개선, 後통일’에 입각한 동서독 평화정책 모델을 모방한 상당히 적극적인 남한 정부의 태도변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 분단과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관계의 신뢰회복과 관계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인적 교류와 물적 교류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1984년 9월 남한은 북한이 제의한 수재 물자를 받아들였고, 1985년 9월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공연이 현실화된 것이다. 또한 남북경제회담․국회회담․체육회담 등이 개최되었다. 적어도 1986년 1월 20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모든 교류에 대한 중단의사를 표명하기 전까지는 분단 이래 가장 빈번한 상호교류 관계를 지속시켰던 시기가 제 5공화국 시절이었다.
1988년 하계 서울올림픽이 치루어지는 해에 등장한 대통령 노태우의 제5공화국은 소위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북한에게 제의하였다. 1988년 7월 7일 소위 7․7선언인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에 대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대북관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7․7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계의 남북동포 교류 추진
-이산 가족 방문 및 생사확인
-남북 직접교역 및 문호개방
-우방의 대북 교역인정
-남북경쟁과 대결외교 종식
-북한의 대일․대미 관계 개선 협조
-남한의 대중․대소 관계 개선
또한 한국정부는 1990년 4월 20일 확정발표한 ‘남북교류 협력 중점 추진대책’에 의하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서 비정치․비이념 분야부터 상호교류 및 협력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기본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는 독일이 통일 분위기에 대한 남한 정부의 새로운 대북한 제의의 일환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정권들 처럼 진정으로 통일을 위해 북한과 관계를 개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이고 선언적인 의의 이상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남한의 대북정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겪어왔다. 남북한 상황이 호전되는 시기에는 포용력 있게 북한을 안고 나가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하고, 또 대립과 갈등의 시기에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고립 대상으로 설정하기도 하는 등 그 변화무쌍에 국민들은 상당히 혼란스러워 했고, 또한 정부 당국자들도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것이 문민정부가 이끌어 온 대북정책의 모든 것이었다.
결국 문민 정부 또한 이전의 정부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대북한 문제를 국면 전환용이나 각종 선거의 승리를 위한 민심 위협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이제까지 남한의 대북한 정책에 대한 내용들은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이다.
공화국 |
특징 |
정책기조 | |
1 |
남한은 UN총회가 인정한 한반도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강조 |
북진통일 | |
2 |
북한은 ‘괴뢰’가 아닌 ‘대화의 정치적 실체’로 간주 |
평화통일 | |
3 | 4 |
1 |
제2공화국의 대북정책 계승 |
평화통일 |
2 |
선 경제개발 후 통일 |
승공통일 | |
3 |
신데탕트시대 도래, 남북한 문제는 남북의 당사자 해결 원칙 천명, 북한을 공식적인 협상 상대자로 인정, 7·4남북공동성명서 발표 |
평화통일 | |
4 |
유신헌법제정, 통일문제가 안보논리에서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 |
멸공통일 | |
5 |
선실질적 관계 개선 후 통일 원칙 표명, 정전협정에서 휴전협정으로 변경 모색, 인적·물적 교류 실현 |
민족화합 민주통일 | |
6 |
제5공화국 대북정책 계승 |
민족화합 민주통일 | |
문민정부 |
무원칙·무소신, 정국의 변화에 따른 급격한 대북정책의 변화 |
? |
결론적으로 인적․물적교류가 확대되어야 남북간의 신뢰가 쌓이고 이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간 정치․군사적 관계개선과 긴장완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논의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남한 정부의 통일정책이 상당부분 대국민 여론 환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과 북한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외교적 명분 쌓기의 일환으로 진행된 측면이 강하다는 평가는 실질적으로 통일의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환시킬 수 없는 남한 정부의 대북한 정책에 대한 한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북한과의 협상이나 협의를 통해서 제기되고 제안되는 것이 아니라, 대북정책은 일방적이고 선언적인 발표형식을 고수하였다. ‘받아 들이고 안받아들이는 것은 북한의 몫’이라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북한을 가능한 한 설득하여 남북의 동반자 시대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실질적인 통일에의 의지보다는 정권유지와 정권의 위기 극복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통일정책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적당한 사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3) 남한의 통일정책과 독일의 평화정책의 비교
남한의 대북한 정책이 통일정책이었다는 점과 서독의 대동독 정책이 평화정책이었다는 점은 분단 상황이라는 동일성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결과 뿐만 아니라 각각 추진한 정책이 다르다는 차이점 때문에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이점이란 남한은 통일정책을 구사했다는 것이고 서독은 평화정책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평화정책과 통일정책을 칼로 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가 분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론이나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제 1공화국 시기에 추진하였던 ‘북진통일’을 포기하고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제 2공화국부터 추진해 온 ‘평화통일’을 대북 정책의 기본 원리로 채택한 마당에 평화정책과 통일정책은 하나이거나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 또는 ‘동일성’을 주장하는 발상은 평화도 안이하게, 통일도 안이하게 사고하는 비현실적인 사고나 이상적인 사고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측할 수 있는 가까운 장래에는 평화와 통일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표요, 양자택일해야 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평화정책은 분단의 현상(status quo)을 인정하고, 유지함으로써 집행 가능한 정책이다.
즉 실질적으로 동독을 인정하고 정상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 충실했던 서독의 대 동독 정책에서 보았듯이 남한도 북한을 국제 사회에서 고립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당당한 일원으로, 그리고 남한과의 관계 또한 적성국가가 아닌 하나의 동반자, 또는 이웃 나라로 철저히 그리고 분명히 인정하는 선에서 모든 교류나 정책이 추진되는 것이 평화정책이다.
이에 반해 통일정책은 분단의 현상을 부정하고, 파기할 수 있는 개연성이 너무나 농후하고 또한 현실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부추길 수 있는 민족공멸의 가능성을 지닌 정책이다. 즉, 통일은 그 결과만이 중요시 되기 때문에 그 과정상의 정책이나 실천을 제어할 수 없다.
이는 현재 나타나는 극우집단의 주장 처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북한 정권의 자체 붕괴가 발생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이들에 대한 원조나 지원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이러한 극우집단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바라지 않는 전쟁 발발의 근거를 북한 정권 담당자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분단 상황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거나, 분단상황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장기적인 전망에서 평화가 통일을 결실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 ‘평화통일’이라는 정책의 무게 중심이 평화보다는 분단국가의 상황적 논리에 의해서 통일에 그 무게가 많이 실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통일의 진척 과정에서 남북의 갈등과 대립 현상이 심화될 때 평화는 통일보다 버리기 쉬운 정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끝까지 고수해야 할 원칙으로 간주될 명분이 상황논리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제 3공화국의 18년 집권시기를 볼 때나 문민정부가 들어 선 이후 끊임없이 변화해 온 대북 정책을 상기한다면 이 의미가 쉽게 통할 것이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서독의 동방정책의 본질이 평화정책이었음을 더욱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동․서독간의 평화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측 가능한 장래에는 통일을 포기하는 ‘분단 고착화 전략’으로 전환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주효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동방정책은 우리의 대부분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서독의 통일정책이 아니라 비통일정책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같은 점은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방정책은 구 동독의 고립을 목적으로 한 1955년의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전제했던 것이며, 이는 명분보다는 분단의 아픔과 민족적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동방정책의 목표였다.24)
따라서 동방정책은 통일을 촉진하기보다는 분단에서 오는 민족적 고통과 불편을 줄여 나가는 정책으로 그 특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동방정책은 상대방이 고집하는 분단 영구화를 수용하는 대신, 교류와 상호방문과 통신 등을 확대함으로써 분단에서 발생되는 민족적 고통을 없애 나가는 현실 정책임을 앞에서 보았다. 그래서 동방정책을 분단영구화 정책, 곧 비통일정책 또는 통일을 끝없이 유보하는 통일 비우호적 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25)
과연 서독은 1969년 브란트 정권이 탄생하여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시정방침 연설문이나 대외정책 성명문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일체 없애버렸고, 그때까지 존속했던 ‘統獨省’이라는 정부 부처마저 없애버렸다. 이는 평화를 위해 통일을 포기 또는 유보한 동방정책의 논리적 필연이요, 정치적 실천이었다.
한편 남한 정부는 서독이 統獨省을 없애버린 같은 해인 1969년에, 그때까지 없었던 統一院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에서는 통일을 단념 또는 유보하고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동․서독 정상이 만나고 있을 때 우리는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긴다는 허풍을 떨면서 남북한 정상의 대표들이 왔다갔다하는 수선을 피우며 말씨름만 벌여왔다.
결국 동서독이 이후 양측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을 때, 남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정치 쇼’를 연출하면서 이를 닉슨 독트린에 의해 외부적으로 형성된 신데탕트 시대의 통과의례 정도로 남북회담을 전락시킨 것이었다.
또한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점차 소비에트 제국이 무너져갈 기미가 짙어진 상황에서는 시간만 지나면 동유럽 제국이 먼저 서로 한국과 수교를 원하게 될 터인데 수십억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싸들고 가서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국내에는 통일을 위한 중요한 포석이나 해 놓은 듯 정부․여당은 생색내기에 열을 올렸다.
또한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통일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통일원 장관을 부총리로 승격시켜 놓고, 정부관계자들은 북방정책을 추진한답시고 수십억달러의 경협자금을 뿌리고, 수십년동안 하루같이 평화통일을 구두선처럼 되뇌며, 보수주의자․진보주의자․늙은이․젊은이 할 것 없이 해만 뜨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해 왔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녕 지나친 표현일까하는 의문을 가진다.
Ⅳ. 남북한 언론의 성격과 역할
1) 남한언론의 성격
남한의 언론 제도는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언론의 탄생과정이 세계제국주의의 팽창이 극에 이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 신문활동이 시작된 것은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고 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하의 우리 언론활동이란 일본 제국주의의 강권정치 아래서 단분히 제한적이었으며 식민통치의 수단으로써 존재해왔을 뿐 그 이상의 어떠한 성격을 부여하기는 어렵다.26)
사실상 우리 언론이 근대적 구미 언론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제도적으로 미국의 남한 진주와 함께 미국식 자유 언론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결과인 것이다.
해방과 함께 갑자기 이식된 자유민주주의제도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급격한 변화와 혼란을 동반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의식활동을 근간으로 하는 언론분야에서는 복잡한 이념 갈등과 혼란스런 정치사회적 배경을 다루는 언론활동이 맞물려 급기야 스스로 이식한 미국식 자유주의 언론을 미 군정당국에 의하여 통제당하게 되는 지극히 모순된 상황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제도적으로는 완전한 미국식 자유언론제도를 도입하게 되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는 지속적인 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받게 되는 모순을 배태하면서 시작되고 있다.
이렇게 배태된 한국 언론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이념에 입각한 제헌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명분으로 규정함에 따라 완전한 자유주의 언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언론의 정치성을 누구보다도 일찍 간파한 이승만 정권은 외형상은 자유언론제도를 선언하고 있지만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언론을 통제․탄압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이렇게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의 여진은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한 박정희정권이나, 12․12를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른바 신군부 주도의 전두환정권도 남한의 언론 발전을 저해하는 관행을 음양으로 답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활동을 지속한 한국언론은 이와 같은 외적조건에 관계없이 스스로가 자유언론이기를 포기하고, 권력의 도구화란 비판을 받을 만큼 그 수준이 전락하였던 불행 또한 동시에 안고 있다. 물론 언제나 언론 스스로는 주어진 상황조건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자신의 변명과 논리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과오에 대한 항변은 될 수 있으되 설득을 얻기에는 상당히 불충분한 것이다.
어쨋든 우리 언론은 자유주의 전통위에서 출발하였다. 우리가 흔히 언론의 유형을 권위주의 언론, 소비에트 공산주의 언론, 자유주의 언론 그리고 사회적 책임주의 언론으로 나누고 있는데 우리의 언론의 언론은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혁이 있었던 시점에서는 정권의 성격과 정국의 변화 과정에 따라 자유주의 언론에서 권위주의 언론으로 전락하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 언론은 자유언론 철학에 입각하고 있으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기본원칙이자 철학인 天賦人權의 하나로서 자유롭게 말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언론사상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에 따른 ‘사상의 자유시장’ 원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한언론은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옹호하고 존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성격을 가지 게 된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 일차적인 이유는 매체산업과 경쟁시장의 이데올로기의 접합에서 찾을 수 있다.27)
오늘날 남한 언론은 이러한 자본주의 원리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적 언론사상에 입각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언론체제는 자유 경쟁의 상업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활동의 영역은 보도․해설․논평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가 한보사태․김현철사건 등을 거치면서 무제한적 언론의 자유를 누린 1997년 상반기였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완전한 언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특히 남북한 문제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여전히 신중하기 짝이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 언론자유의 제한의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한에 대해서 정부의 입장은 사실에 입각한 언론활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거나 현저히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무분별한 언론행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발단은 원칙적인 면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자유주의 체제아래에서는 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위하여 권리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하지만 자유시장 경쟁에 따르는 상업주의의 과열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 아래서의 언론은 하나의 산업으로서 사람들의 의식에 근거한 언론 상품의 생산과 소비 메카니즘에 따르기 때문에 소비와 대중의 기호에 걸맞는 메시지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본래 대중의 언론상품, 즉 의식상품의 소비성향이란 다분히 감정적이며 다소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사회양상이 점차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후기 산업사회로 갈수록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남한 언론은 1987년 6․29선언 이후 언론자유의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고 보는 관점이 다수이나 이와 함께 언론의 상업주의 또한 획기적으로 가속화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언론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사회 환경을 감시․교육․상관조정하여 바람직한 사회이념이나 국가발전의 통합체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기업으로서 언론 자체가 성장․발전하여 보다 큰 이익을 남기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과제가 된다.
그러나 통일한국의 사회문화적 통합을 위해서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상업성을 가능한 한 탈색시켜내고, 언론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정기능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더욱 필요로 한다.
2) 북한언론의 성격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한 주체사상을 표방하는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이다다. 따라서 북한 언론의 이념적 기초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언론28)을 이해하는데 그 출발점을 잡아야 한다.29)
마르크스의 커뮤케이션에 대한 관점은 그의 노동혁명에 대한 관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수단의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과정을 통하여 각 개인 혹은 내부에서 생산된 물질적․정신적 노동계기가 상호교환될 수 있도록 하는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통신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마르크스의 혁명관에는 선전․선동․조직의 수단으로서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파악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활동으로부터 소외 내지는 고립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물질적․정신적 교통을 통해 이를 단결해야 하며,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은 혁명의 수단임과 동시에 사회주의를 교양하고 조직․유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언론에 대한 고도의 정치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르크스는 신문을 자본주의적 모순과 부조리의 정치구조 속에서 피지배 인민을 보호하고 선도․교양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신문은 기사와 사설을 통하여 끊임없이 인민대중과 교통하며 참여를 유도하고 조직의 연대를 공고히 하며, 당이 제시하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과 정책을 선전․선동하고 침투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데올로기의 오염을 방지하는, 말하자면 통제의 기능도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문․방송 등 대중매체에 대한 소유와 활동은 전적으로 당과 국가의 통제하에 있으며, 명실공히 사회주의체제의 한 기구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체제에 있어서는 비단 신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출판․영화․텔레비전 등 모든 대중매체에 공히 적용되는 일반 원칙이다. 특히 오늘에 와서 가장 보편적인 대중매체로 자리하게 된 방송언론에 대해 레닌은 1920년대에 이미 방송을 인민대중에 대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교육 수단으로서 중요시 하여 ‘종이와 거리가 필요없는 신문’이라고 칭하며 신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30)
이러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언론철학은 역시 북한언론에도 그 이론적 ․철학적 기초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북한은 자신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기본적인 언론관은 ‘주체의 언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그리고 모택동 사상을 뛰어 넘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혁명이론과 사회주의 건설 이론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언론 역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언론관을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우리식 언론’으로 그 내용과 형식을 구체화시켰다.
북한의 신문학 이론서인 배순재․라두림의 ‘신문이론’에서 “당은 창간 첫날부터 신문에 관한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우리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면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으로서 맑스․레닌주의의 신문이론이 더욱 완성되고 풍부화 되었다. 이에 있어서 출판사업을 개선․강화하는데 당의 결정과 김일성 수령의 일련의 교시는 맑스․레닌주의의 신문이론의 창조적 적용․발전에서 실로 거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31)
여기서 말하는 김일성의 교시란 구체적으로 1962년 5월 3일 출판사업과 학생교양 사업을 강화한 데 대하여 출판보도 일꾼 및 민청일꾼들과 담화를 말하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당성과 함께 인간성과 물화성이 풍부한 인간으로 교양․육성하는 데는 맑스․레닌주의 신문이론의 창조적 적용과 발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32)
북한에서 출판보도사업, 즉 언론은 조선노동당의 방침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며, 모두가 ‘위대한 수령께서 창간하시고 지도하시는 새로운 주체의 출판보도물이다’라는 범주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북한언론의 독특한 성격은 ‘주체와 혁명’의 언론으로 본다면 거의 무방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결국 북한의 언론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장하고 있는 선전․선동의 도구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한다고 평가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북한 언론은 전반적인 경제위기와 전 주민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상황에서도 인민 대중들의 인식을 호도하기 위한 선전․선동의 과정에서 가장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 언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언론 활동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발생한 문제를 외부의 탓으로 돌려 대외적(미국과 남한) 적대감만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언론은 충분히 감당하고 또한 이것이 언론 자신의 의무라고 오판하고 있기 때문이다.33)
이러한 선전․선동의 도구로서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같은 현상은 북한에서 발행되고 있는 신문들의 소속 기관만 보아도 뚜렷이 드러난다. 북한에서는 현재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정무원 기관지인 민주조선과 그 산하의 각도 인민위원회 기관지로 다섯 개, 북조선 노동당 기관지 로농신문 및 각 도 당 기관지 다섯 개, 그리고 북조선 민주당 기관지 조선민보와 그 지방지, 세 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 기관지 개벽신문, 북조선 직업동맹 기관지 로농자신문, 북조선 농민동맹 기관지 농민신문,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기관지 민주청년 같은 신문이 서른 몇 가지가 발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신문이 로농신문이다. 로농신문은 1936년에 창간된 노동자 기관지로서 현재까지 북한에서 최고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바깥에서 북한의 입장을 공식으로 표명하는 신문이다. 현재 발행부수는 90만부이고, 한 주일에 일곱 번, 곧 날마다 6면을 발행한다. 로농신문이 다루는 내용은 한결같이 김일성과 공산당의 찬양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제 1면의 머리기사는 북한의 외교 사절이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함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하고 박힌 사진이나 다른 나라의 고위 인사가 북한 정부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 또는 북한 정부가 다른 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가 대체로 살린다. 따라서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날짜별로 로농신문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도 신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북한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조선중앙 텔레비전, 만수대 텔레비전, 그리고 개성 텔레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중앙 텔레비전이 대표적인 텔레비전 방송국이다. 라디오 방송국은 조선중앙방송, 대남 방송을 주로 하는 평양방송, 그리고 평양 FM방송이 있다. 조선중앙방송은 하루 22시간씩 방송을 하는데 그 내용은 보도, 해설 및 논설, 교양, 연예, 스포츠, 어린이 시간들로 나눌 수 있다.
보도는 김일성과 김정일과 당의 외교활동이나 공동성명, 편지, 메시지, 산업부분 뉴스 및 사회주의 세력의 국제적인 연대 강화 등을 언급한다. 해설 및 논설으로는 주체 사상 및 당 정책의 해설, 통일정책의 해설 등이 담겨져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신문사설, 평론, 논설 등을 방송한다. 교양시간에는 사회주의 교양이 중심이 된 방송을 하는데 보통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 및 주체사상이 선전들의 주축을 이룬다.
연예는 음악과 소설, 그리고 혁명 가극으로 주로 이루어지며, 나머지는 일반적인 스포츠, 어린이 시간, 그 밖의 일기예보들이 있다.
이상 언급된 내용으로 보아 북한의 언론은 결국 선전과 선동을 위한 하나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전형적인 공산주의 언론의 변형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를 북한의 언론 성격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3) 상호왜곡 기제로서 남북한 언론
이상에서 남한과 북한의 언론의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언급한, 언론적 성격 차이가 뚜렷한 남북한의 언론은 상호에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인간 대 인간 간의 관계, 또 인간 집단간의 관계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라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사회 자체가 인간 커뮤니케이션 행위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정신적인 내용, 의식적인 내용, 예를 들어 의견, 지식, 정보 등이 유통되고 교환되는 열린 관계의 구조라는 점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호 이해적 관계라는 점이다.
이에 반해 동물 상호간의 관계는 본능적 관계로서 의견, 지식 등 정신적 내용이 교환되거나 유통되지 못하는 자극과 반응의 닫힌 관계이다. 이 점이 인간 커뮤니케이션과 구별되는 점이다.
홉스는 사회를 가리켜 만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홉스의 이같은 사회관계 명제는 의견과 지식이 서로 교류되어 서로 이해하고, 또 계약과 약속을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라는 것이 사회계약론자들에 의해 제기됨으로써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남북한 관계는 홉스식 관계명제에 의해 설명될 수 밖에 없는 적대와 대립과 닫힌 관계로 구조화되어 왔다. 그것이 인간집단 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는 왜 열린 커뮤니케이션 관계가 단절되고, 동물적이고, 투쟁적이며, 닫힌 관계만이 엄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제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그것은 개입․매개, 그리고 작용하는 수많은 사회․역사․정치․문화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단절되기도 하고, 혹은 왜곡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결국 대단위 기술 커뮤니케이션을 유발, 가능케 하고 평생 의식교육을 담당하는 언론요인의 개입과 작용은 남북한간의 이런 왜곡과 단절을 초래하는데 오히려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분단 이후 통일이 되기까지의 45년간의 동서독 관계와 교섭 메커니즘은 적어도 동방정책 도입 이후에는 비홉스식 관계, 곧 열린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적 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적어도 동서독 관계 메커니즘이 왜곡되거나 단절되는데 언론 요인의 개입이나 작용이 매개되지 않았다는 것과, 남북한 관계 왜곡에 언론요인이 기여했다는 비교 관찰은 본 연구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사실 분단에서 통일 기간까지의 동서독 정치체제의 대결과 체제간 교섭의 기본 메커니즘은 일당 독재체제와 다원주의적 민주체제, 수직적 공산 폐쇄사회와 횡적 개방사회로 대립했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앞의 폐쇄적 독재사회가 개방적 민주사회로 체제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서독적 체제 우월성이 동독의 열악한 체제를 해체하고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남북한의 체제 대결은 겉으로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 대결과 대립으로 보이나 지난 반세기 동안의 남북한 체제 대결은 독재 대 독재, 폐쇄 대 폐쇄로 적대적 상호 의존관계를 형성했다.
이 말은 북한의 독재체제가 남한의 정치적 독재체제 유지 강화에 필요하고, 반대로 북한의 독재체제 유지에 남한체제의 독재화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소위 적대적 상호의존관계이다.
1972년 북한 김영주와 남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사이에 극적으로 타결된 남북한 공동성명은 이런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남한은 이를 빙자해서 유신체제를 구축했고, 북한은 기존 형법을 개정하여 인민을 억압하는 등 독재 통치를 강화했다.
정치 체제간 남북한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 형성은 남북한간의 군사적, 물리적 적대행위와 상호갈등을 증폭시켜 왔을 뿐 아니라 남북한 언론의 비방 대 비방, 악선전 대 악선전, 이데올로기 대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대치함으로써 서로를 얼룩지게 했다. 여기에 남북한 언론의 적대적 상호주의가 탄생, 성장한 것이다.
즉 한 쪽에서 비방, 욕설하면 다른 쪽에서도 비방, 욕설해야 한다는 상대주의가 생겨나서 언론의 객관적 보도와 의견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파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로 남북한 두 정치체제가 구조적으로 대결하는 폐쇄적 관계 메커니즘은 협력적이고, 우호적으로 상호 의존관계를 맺고 있는 동서독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다른 점이다.
바로 여기에 남북한간의 언론을 통한 이질화 극복 및 동질화와 동체성 회복 기능이 마비되는 원인이 놓여 있다.
원래 언론의 본질적 기능은 사회통합과 이질화 극복, 그리고 상호간 이해 증진인데 이런 기능들은 언론의 보도와 논평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에게 행사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정치체제와 언론의 관련성에서 볼 때 정치체제가 언론을 결정하고, 그 언론을 궁극적으로 그 체제 유지와 정당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남북한의 양 체제의 논리가 남북 언론으로 하여금 이질성을 확대재생산 하고, 동질성을 오히려 은폐․왜곡한 것이다.
V. 사회문화 통합과 매스 미디어의 역할
체제 간의 적대와 대립의 폐쇄관계가 커뮤니케이션적 열린 관계로 구조변동을 하는 것은 통일을 향한 획기적이고 중요한 과제이다. 이해와 협력, 우호와 약속의 열린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하는 두 당사자 사이에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유지, 확대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동일한 언어와 개념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동원해야 한다.
둘째, 한 쪽이 상대방을 의심하거나 오인하면 안된다. 이 말은 상대방이나를 해칠 의도를 갖고 있다고 의심하면 그의 말을 믿을 수 없고, 상대방 말을 의심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은 곧장 단절된다.
셋째, 커뮤니케이션이 지속되려면 두 커뮤니케이션 참여자가 상대를 대화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이 경우 커뮤니케이터 주체성에는 존엄과 체면을 포함한다. 남북한 대화나 협상에서 체면 손상이나 인격모독 등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좌절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넷째, 거짓말, 비방, 욕설, 선동 등의 언사를 사용하면, 또한 커뮤니케이션이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진다.
다섯째, 커뮤니케이션을 행하는 두 당사자 모두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할수록 이득이 있거나 실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 쪽은 유리한데 다른 한 쪽은 불리할 경우 그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여섯째, 합리적 설득자세를 가져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폭력으로 위협하면 그 커뮤니케이션은 끊긴다.
일곱째, 커뮤니케이션은 논리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 인간행위이기 때문에 어느 한 측면만 중시하고, 다른 측면을 무시하면 단절된다. 아무리 논리적 설득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감성을 훼손하여 대화 분위기를 흐려 놓으면 커뮤니케이션은 지속되지 않는다.3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기본조건을 충족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TV분야 협력을 위한 서독 ARD와 동독 DDR-TV간의 협정’35)이다. 이 협정은 1987년 5월 6일 ARD(서독 공영방송국 업무협의회)와 DDR-TV(동독TV) 사이에 체결된 TV분야에서의 공동노력에 관한 최초의 합의사항이다. 남북한 방송교류와 관련하여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 자료의 전문을 살펴보았다.
TV분야 협력을 위한 서독 ARD와 동독 DDR-TV간의 협정
-독일연방공화국(이하 서독으로 약칭)과 독일민주공화국(이하 동독으로 약칭)은 1972년 12월 21일에 게재된 관계 원칙적 조약과 기자들의 활동을 돕기위한 서신 교환 및 서독 정부와 동독 정부간에 1986년 5월 6일에 체결된 문화 협력에 관한 합의사항이다.
-이는 유럽안보 협력회의 조인서 내용을 기초로 하여,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상호 이해를 강화하고 TV분야에서 협력을 통해 서독과 동독간의 보다 나은 상호 이해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과, 이렇게 함으로써 평화의 정착과 긴장완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인식하에,
-서독공영방송국 업무협의회(ARD)산하 지역방속국들인
BR(바이에른 방송국)
HR(헤센 방송국)
NDR(북부 독일 방송국)
RB(라디오 브레멘)
SR(사르란트 방송국)
SFB(자유베를린 방송국)
SDR(남부 독일 방송국)
SWF(남서부 방송국)
WDR(서부 독일 방송국)과
동독 각료회의 TV국가 위원회(이하 협정당사자라고 칭함)는 다음과 같은 협정을 체결하는 데 합의한다.
제 1 조
1. 협정당사자들은 서로 TV프로그램을 구입한다. 여기서 상호간의 프로그램 구매는 기본적으로 모든 프로그램 종류, 특히 TV극과 TV영화, 연극 녹화물, 음악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 기록물, 스포츠 프로그램, 어린이 및 청소년 프로그램, 문화 프로그램, 그리고 교육 프로그램들을 포함한다.
2. 협정당사자들은 정기적으로 그들의 TV프로그램에 관한 제공내용, 카탈로그 또는 적절한 정보수단을 교환한다.
각 협정당사자들은 매년 1-2회에 걸쳐 상대방측의 대표들을 위한 프로그램 시찰 행사를 개최한다. 또한 협정파트너 어느 한쪽의 요구가 있을 때는 특별 시찰도 실시한다. 프로그램의 구매조건은 그 때 그 때 합의하에 확정한다.
3. 저작권은 협정당사자들에 의해 장소 대상 시간적으로 무제한 보장되지 않는 한 보호되어야 한다.
양도하는 협정당사자는 방송물의 판매시, 구입하는 협정당사자에게 현존하고 있는 저작권법적 의무사항을 고지하여야 한다.
그 밖에 필요한 저작권법적 합의는 체결된 프로그램 구매 계약서 내에서 이루어진다.
4. 협정당사자들은 구매된 프로그램들은 체결된 프로그램 구매 계약서의 범위 안에서, 그리도 또한 여기서 각각의 경우에 해당되는 저작권법적 합의 사항을 유의하면서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사용할 권리가 있다. 협정당사자들은 이 프로그램들을 편집할 수 있는데, 단 이를 통해 그 작품의 주장이나 내용 등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협정당사자들은 상호 협정 파트너의 동의가 없이는 입수된 프로그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 3자에게 다시 양도할 권리가 없다.
5. 협정당사자들은 방송일시에 대한 세부사항 등 프로그램 이용에 관해 서로 정보를 제공한다.
제 2 조
협정당사자들은 각자의 국내방송법규의 범위 내에서, 그리고 그들의 권한에 따라 상주 특파원 및 비상주 특파원과 리포터 그리고 이들의 카메라팀을 지원한다.
제 3 조
이 같은 서비스가 Eurovision36)과 Intervision37)간에 적용되는 관례나 상호주의에 따른 협정에 의해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 아닌 한, 협정당사자들은 정치 문호 스포츠 이벤트의 보도시에 합의된 사례금을 주고 상호간에 서비스(직접중계를 포함하여)를 허용한다.
제 4 조
협정당사들은 공동제작을 할 수 있다. 합작을 위해서는 특별한 합작 조약을 체결하여야 한다.
제 5 조
협정당사자들은 시사성이 있는 프로그램이나 키타 다른 프로그램의 일부 장면을 자신들의 프로그램에서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관례를 적용한다.
제 6 조
협정당사자들은 법적으로 가능할 경우, 상호 요청에 의해 제 3 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의 독일어 번역물을 구입한다. 이 세부사항은 그 때 그 때 합의하에 결정한다. 저저권의 보상과 각 권리소유자로부터 방송허가권 획득은 이와는 별도로 다룬다.
제 7 조
협정당사들은 상호 정보와 프로그램에 관한 간행물을 제공한다.
제 8 조
1. 협정당사자들은 정보 수집을 위한 방문, 박람회, 전시회 그리고 다른 기호 등에 상호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다. 세부사항은 그 때 마다 특별한 합의를 요한다.
2. 제작기술적인 경험교환은 별도의 합의에 따른다.
제 9 조
협정당사자는 상호 TV-CONTEST와 페스티발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응모 방송물과 공식대표단의 참여 가능성을 우호적인 입장에서 검토한다.
제 10 조
협정당사자의 양측 대표는 합의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지속적인 협력의 기본적 논의와 조정을 위해 회합을 갖는다. 이 회합은 협정당사자간 교대로 개최한다.
제 11 조
양측은 상기 합의된 사항의 실행과정에서 야기되는 모든 논쟁점을 호의적으로 조정하도록 노력한다.
제 12 조
1. 상기 합의사항은 3년간 유효하며 그 효력은 서명과 동시에 발생한다.
2. 협정 체결당사자의 어느 한쪽이 최소한 시효만료 3개월 이전에 서면으로 해약을 통보하지 않는 한, 이 협정은 차후 3년간씩 자동 연장된다.
3. 이 협정의 변경 또는 보완은 협정당사자들 간에 서면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1987년 5월 6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사에서 2부의 원본을 작성함.
서독공영방송 업무협의회(ARD) 산하 지역방송국 대표
서명인 Willibald Hilf
동독각료회의 TV국가위원회 대표
서명인 Heinz Adameck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송 뿐만 아니라 동서독 사이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한 모든 언론 같이 현재 남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불신감, 적대성, 증오심 등을 축소시키고, 극복하는 언론의 순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언론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이런 순기능을 기대할 수있다.
이렇게 볼 때 언론매체의 자유로운 교환이 사회문화적 통합을 속도감 있는 가능태로 전환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쉽게 말해 남한 사람들이 로농신문을 마음대로 읽고, 조선중앙방송을 자유롭게 보고 들으며, 마찬가지로 북한 땅의 주민들도 동아일보나 한겨레신문을 마음대로 읽고, 문화방송을 자유로이 시청할 수 있다면 물리적으로 분단되었어도 심정적으로는 양쪽이 공생공존의 공동체를 향해 한 발자국 더 접근하게 될 것이다.
또 두 당사자 중 좀 더 자유롭고 성숙한 한 쪽에 먼저 상대방의 언론을 개방한다 하더라도 통일의 추진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통일의 앞 단계로 주로 인도적인 면 같은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이산가족 만남의 추진과 물자교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산가족의 만남은 이들의 아픔을 달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인도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추진해 온 노력에 비추어 이 분야에서 거둔 성과는 매우 미미하다. 오직 한차례 실현되고 교환 방문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교환방문이 만나지 못한 다른 수많은 이산가족을 더욱 애타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만남이 결과적으로 기쁨보다는 고통을 안겨 준 측면마저 없지 않다.
물자교류도 이산가족의 인도적인 교류와 마찬가지로 그 실효성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물자교류란 서로의 경제의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져야 효과가 있지 의무감에서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쉽게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물자교류를 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앞서 과연 남북한이 무엇을 교류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교류가 과연 경제적일까 하는 점을 곰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스 미디어의 교류는 매우 바람직한 대안이다. 이것은 이산가족의 교류처럼 제한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모든 사람들에게 양쪽 체제가 자연스럽게 개방될 수 있는 점에서 바람직하며, 물자교류와 같이 경제 요인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말하자면 매스 미디어의 교류가 다른 인적, 물적 교류에 견주어 개방을 꺼리는 양 체제에게 위험부담도 적고, 그러면서도 개방이라는 목표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사실 독일 통일이 쉽게 가능해 진 원인을 찾아보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구 서독은 처음부터 구 동독 언론매체의 자유로운 구독이나 시청을 방해하지 않는 원칙을 천명했다. 우리처럼 북한의 언론매체 접근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지 않았다. 따라서 구 서독에서는 구 동독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얼마든지 가판대에서 구해 볼 수 있을 만큼 그것을 구독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구 서독 정부의 방침이 아닌 구 서독 국민들의 무관심이 오히려 그 보급을 저지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구 서독 국민들에게 구 동독신문에 실리는 뉴스는 돈을 지급하고서 읽을 만한 값어치 있는 신문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정부의 허용방침에도 불구하고 구 서독의 일부지역, 즉 베를린 정도에서만 가판대에서 겨우 구 동독의 신문을 구독할 수 있었다.
방송도 마찬가지이다. 구 서독 사람들은 국경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국경지방이 아닌 곳에서도 안테나만 설치하면 구 동독의 방송을 얼마든지 시청할 수 있었지만 돈을 들여 안테나만 설치해 가면서 구 동독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근래에 KBS와 MBC에서 선별적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비춰 주기 시작한 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이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흔히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이다.
이에 비해 구 동독은 전혀 달랐다. 구 동독의 서기장이었던 호네커가 구 서독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또 방송 수신의 방법을 구 서독의 다른 것으로 채택하도록 하여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술의 향상이 수신방해를 극복하고, 안테나를 달아 구 서독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1973년에 정책을 전환하여 서독의 방송을 재편집하여 동독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같은 정책전환은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하는데 호네커는 구 서독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범죄물, 섹스물, 그리고 오락물을 집중적으로 방영하여 구 서독의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 가를 보여주려 했다. 곧 구 서독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서독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방영을 허용한 셈이다.
그러나 ‘당신의 지붕 꼭대기에도 자본주의 귀신이 들어있는가’라는 정부의 대대적인 켐페인에도 불구하고 구 동독인들은 재편집된 구 서독의 프로그램에 만족하지 않고 지붕 바로 밑 다락방에 안테나를 숨겨 설치하여 구 서독방송을 시청했다.
그리고 친척방문을 통해서 확인된 서독의 실상을 통해 구 동독정부의 구 서독 텔레비전 프로그램 방영이 사실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독 사회를 알고, 친척들과의 접촉을 통해 구 서독사회를 제대로 확인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독 사람들의 통일염원을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언론매체를 서로 자유롭게 교환한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보아도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하다.
언론매체의 자유로운 교환이 오늘의 현실에서 어려운 일로 생각될는지 모르지만 한 번 물꼬를 트면 언제 그것을 문제 삼았던가 부끄럽게 생각할 만큼 로농신문의 구독과 조선 중앙방송의 시청이 이제는 우리 국민들을 위험으로 유혹할 가능성이 적다. 법으로 보는 것을 금지시키고, 제한된 장소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보게 하는 현실이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길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의 로동신문과 중앙방송은 여타 공산주의 국가가 그러해 왔던 것 처럼 마르크스와 레닌의 기본 원리에 따라 규정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공산국가에서 언론이 가지는 공통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바, 즉 집단 선전원․집단 선동자․집단 조직원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에 가장 충실하게 모든 방송이나 신문의 내용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한 땅 국민들은 대부분 호기심으로 한두 번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내용이 정치선동과 선전으로 채워진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 대중성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 국민들은 금방 외면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절차를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언론매체들을 자유롭게 보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가 물리적인 통일에 앞서 통일을 이루는 일을 거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통일을 언급할 때 통일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 그리고 된다면 언제쯤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아왔다. 따라서 과연 어떠한 통일을 이룰 것인가, 나아가 통일 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에는 소홀해 왔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우리의 장래가 분홍빛으로 채색될까, 아니면 보랏빛으로 채색될까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언론매체의 자유로운 교환은 현재의 불안한 남북관계를 먼저 개선하고 남북한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몰지각을 해소하는데 그 일차성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일 뒤의 우리 나라의 색깔 형성이나 그 색깔 형성에 미리 대처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리적인 통일에 앞서 마음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압적인 통일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자연 발생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북한 사회가 아무리 모순 투성이지만 우리가 그 쪽에서 받아들일 점도 전혀 없지 않다는 자세를 그런 이해로서 가다듬어 염두에 두어야만 50년 가까이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결합했을 때 그 결합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은 언론매체의 보급을 물리적으로만 막을 수 없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만일 위성방송을 하게 되면 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북한에 자연스럽게 방영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가정이 성립한다. 말하자면 법으로 금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손으로 눈을 가려 하늘을 가리는 태도일 것이다. 구 동독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제 그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과감히 우리 스스로가 먼저 북한의 언론매체를 개방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체제를 더욱 안정되게 만드는 길이다.
VI. 결론
서독이 1960대 말부터 일관되게 추진해온 대동독 평화정책인 동방정책은 역사적 전통과 민족적 정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반도 상황에 상당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것 처럼 ‘동방정책’이 통일정책이 아니었고, 비통일정책이요 분단고착화 정책인 평화정책이었음이 바로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상대방인 동독의 현실적인 요구를 받아들여서, 분단과 동독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동독집권체제의 안정화를 꾀하는 것이 이 동방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를 통해 먼저 동서독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수 있었고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신뢰와 양보를 얻어내고 이러한 신뢰와 양보의 결과가 방문 · 교통 · 언론교류 · 교역의 확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 상황은 이제까지는 서독이 통일 전 동독에 대해서 취해온 정책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개되어왔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사실상 통일을 위한 일관된 정책 추진도 없었고, 평화를 위한 제대로 된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정책 태도를 통해서 수많은 오류와 착오를 범하는 과정이었다.
바뀌는 정권마다 정권 담당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북정책을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였다. 위기에 처한 정권담당자들은 정국전환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활용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행태의 정책 운용이 주류를 이루면서 실질적인 인적 · 물적 교류에 대한 의지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철학은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또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있어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부터라도 ‘제대로 된 정책’의 입안과 이를 위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추진력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대로 된 정책’의 기조는 ‘평화’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대북한 정책에 있어서 ‘통일’이 가지고 있는 그 해악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단현상을 부정하고 파기할 수 있는 개연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즉 통일이라는 결과에 급급하여 그 과정에 있어 정책을 구사하고 실천을 제어하는 활동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통일이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그 어떤 상호 교류관계도 맺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공식적이며 실질적으로 인정하고 하나의 이웃으로 간주하면서 상호 접근할 수 있는 논리적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명분 즉 정책을 만들어 나갈때 대국민과 대북한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설득요소는 한반도의 평화분위기 정착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 내에서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자연스레 인적·물적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고, 분단이 장애물이 되어 추진해 오지 못한 수많은 활동과 정책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남한은 본격적인 남북한의 사회문화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색은 결과는 언론을 통한 효과적인 실질적인 사회문화적 통합이라는 목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정치체제간 남북한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는 군사적·물리적 적대행위와 상호갈등을 증폭시켜왔다. 그 뿐만 아니라 남북한 언론의 비방 대 비방 · 악선전 대 악선전 · 이데올로기 대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대치함으로써 서로를 불신하고 적대감을 심화시켜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 쪽이 비방하고 모욕하면 상대방도 똑같은 행태의 행위를 보여주는 상대주의가 언론의 객관적 보도와 의견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던 것도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언론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역기능의 전시였고, 그 결과 남북한 사람들은 각 상대방에 대해 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 설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남북한의 언론이 본격적인 상호인정주의와 함께 도래할 수 있는 인적 · 물적교류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인 사회문화적 통합의 선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언론의 역할을 상기해 볼 때 확신할 수 있다.
사회문화의 통합 기제로서 언론이 가지고 있는 사회감시 기능과 사회화 기능은 이러한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남북한의 관계를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 순조롭고 자연스레 풀어 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 출처: (http://www.smilej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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