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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기 위한 5가지 수행법
-「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을 읽고
이시환(시인/문학평론가)
불교의 어떠한 경전을 읽든지 간에, 경전마다 자주 혹은 뜸하지만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못하면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전들을 탐독하며 그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쌓여 있어야만 경전 읽기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최근에 읽은 「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도 예외는 아니다.
이 경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 이르는 길과 그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정작 그 키워드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설명을 요하는 낯선 용어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필추(苾篘)=비구・성문(聲聞)・보살・마하살・박가범=세존=부처님=여래・예류과(預流果)・일래과(一來果)・불환과(不還果)・아라한과・독각과(獨覺果)・적정결택(寂靜決擇)삼마지・건행(健行)삼마지・심심부동해조(甚深不動海潮)삼마지・관정(灌頂)다라니・무변제불색신(無邊諸佛色身)다라니・입정부정인(入定不定印) 법문・대승법・보리 등이 그것이다. 물론, 필자야 여러 경전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개념 정리가 되어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이 경에서만큼은, 경이 온전한 것이라면, 최소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성문승, 대승법 등 이 3개의 키워드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한 설명이 전제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하튼, 이「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은, 묘길상보살(妙吉祥菩萨)의 무상정등정각에 대한 질문에 따른 부처님의 대답 중심으로 짜여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인 즉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위한 수행자들이 선택하는 5가지 방법 곧 그 수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물론, 그 5가지 수행[行]이란 ①양거행(羊車行) ②상거행(象車行) ③일월신력행(日月神力行) ④성문신력행(聲聞神力行) ⑤여래신력행(如來神力行)이란 용어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런 일련의 용어 자체도 사실상 합리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을 파악・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5행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하고, 이 경전의 최고 키워드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지(認知)해야만 한다.
문제의 경에서 말하는 5가지 행(行)이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 방법 5가지를 말하는데,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①양이 끄는 수레 ②코끼리가 끄는 수레 ③일월 신력(神力)이 끄는 수레 ④성문 신력이 끄는 수레 ⑤여래 신력이 끄는 수레 등이다. 수행자 입장에서 어떤 수레를 올라타야 소위, 온갖 번뇌와 욕구로 질척거리는 티끌세계를 무사히 건너서 무욕・청정하면서도 지혜의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를 설명하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코끼리・일월・성문・여래 등의 용어가 일정한 논점 곧 기준에 의해서 분류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이들에게 부여되어 내포하고 있는 각각의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경전의 해당 내용을 면밀히 읽어보면, 이 5가지 수단에는 힘과 능력의 차이에 따른 급수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일방적인 분류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양・코끼리・일월신력・성문신력・여래신력 등 이 5가지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당 경에서 말하기를, 양과 코끼리는 성문승(聲聞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저급 차원의 수행이라 한다면, 일월・성문・여래 신력에 의지하는 수행은 대승법(大乘法)에 의지하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네 번째 ‘성문신력’이라는 용어 대신에 ‘연각승’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는 3승법(三乘法)이라 하여, ①성문승[聲聞乘 : 안으로 지혜가 있으며,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삼계에서 빨리 뛰어나오려고 열반을 구하는 사람 : 초급 단계의 수행자 : 출가 사문] ②연각승[緣覺乘 :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연의 지혜를 구하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고요한 데를 즐기며, 모든 법의 인연을 깊이 아는 사람 : 중급 단계의 수행자 : 벽지불] ③보살승[菩薩乘 :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지(一切智)와 불지(佛智)와 자연지(自然智)와 무사지(無師智)와 여래의 지견과 두려움 없음을 구하며, 한량없는 중생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안락하게 하며, 천상 · 인간을 이익 되게 하려고 모든 이를 제도하여 해탈시키려고 하는 사람 : 상급 단계의 수행자 : 보살 또는 마하살] 등으로 구분하여 여래가 되는 과정의 위계(位階)를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성문승’과 ‘대승법’ 중에서 무엇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5가지 수행법이 파생된다면 이 두 개의 용어가 가지는 함의(含意)는 대단히 중요한데, 역시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나 개념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경의 내용과 체제가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이제 이런 허술한 경을 읽고 분석하고 이해해보려는 일로부터 졸업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스로 반문하면서 잠시 숨을 돌린다. -2017. 04. 11. 11:10]
경전의 내용을 근거로 설명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의 5행에 대한 의미는 이러하다.
양거행(羊車行)ㆍ상거행(象車行)은 무상정등정각을 반드시 얻지는 못하며[不決定],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더라도 위없는 지혜의 길[無上智道]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반면, 일월신력행(日月神力行)ㆍ성문신력행(聲聞神力行)ㆍ여래신력행(如來神力行)은 무상정등정각을 반드시 얻으며[決定], 위없는 지혜의 길에서 퇴전(退轉)하지 않는다고 전제되어 있다.
양거행(羊車行)이란, 성문(聲聞)과 함께 머무르며, 받들어 섬기고,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하되, 만일 동산의 숲속이나 절 안과 같은 경행처에서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고 생각하여 그 뜻을 해석하거나,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고 생각하게 하고 그 뜻을 해석하게 하면, 이 성문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선근(善根)을 심었기 때문에 아주 작고 하열(下劣)한 지혜를 얻게 되어 위없는 지혜의 길에서 물러나게 된다. 비록, 먼저 보리심의 혜근과 혜안을 닦고 익혔더라도 성문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님으로써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선근이 둔해져 곧 위없는 지혜의 길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상거행(象車行)이란, 성문과 함께 머무르며, 받들어 섬기고, 가까이하며 담론하여서 함께 수용하되, 만일 동산의 숲속이나 절 안과 같은 경행처에서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고 생각하여 그 이치를 해석하거나,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고 생각하여 그 이치를 해석하게 하면, 이 성문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님으로써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아주 작고 하열한 지혜를 얻게 되어 위없는 지혜의 길에서 물러나게 된다. 비록, 먼저 보리심의 혜근과 혜안을 닦아 익혔더라도 성문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님으로써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근기가 둔해져서 곧 위없는 지혜의 길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양거행과 상거행이 다를 바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의심해 볼만하다. 말 그대로, ‘양’과 ‘코끼리’의 차이이고, 그것은 힘의 차이이며,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일 것이다.]
일월신력행(日月神力行)이란, 성문과 함께 머물러, 받들어 섬기거나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옷과 음식을 받거나 쓰지 않으며, 동산의 숲속이나 절 안과 같은 경행처에서 성문승의 가르침이나 나아가 한 게송이라도 독송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거나 염송하지 않게 하고, 항상 오직 대승법만을 독송하고 대승법만을 연설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승법(大乘法)’이 무엇인지 직접적인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없다.]
성문신력행(聲聞神力行)이란, 성문과 함께 머물거나, 받들어 섬기거나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과 함께 옷과 음식을 받거나 쓰지 않으며, 동산의 숲속이나 절 안과 같은 경행처에서 성문승의 가르침이나 나아가 한 게송이라도 독송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거나 생각하지 않게 하며, 항상 오직 대승법만을 독송하고 연설한다. 대승법을 깊이 믿어 독송하고, 대승법을 섭수하는 이에 대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직접 받들고 귀의하여 함께 머물고, 받들어 섬기며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하여, 항상 대승을 구하고 받아 지녀 독송한다.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갖가지의 향화(香華)ㆍ도향(塗香)ㆍ말향(末香)ㆍ등명(燈明)ㆍ화만(華鬘)을 공양하고 항상 오직 대승경전만을 독송하고 환희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연설한다.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보살에 대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웃음을 머금고 먼저 말한다. 거칠거나 어지럽게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내용이 부드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기꺼이 듣게 한다. 설사, 목숨을 잃을 만한 인연을 만나더라도 또한 대승의 마음을 버리지 아니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대승법에 나아가서 대승법을 독송하고 대승법을 거두어들이면, 항상 이 사람에 대하여 나보다 낫다는 마음[增上心]을 일으켜서 공양한다.
또, 다른 사람과 서로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대승경전을 듣지 못한 이에 대하여 항상 기꺼이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해 준다. 법을 말하는 이에 대하여 공경심을 일으키고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낸다.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보살에 대해서도 공경심을 일으킨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만일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꾸짖지 않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과실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지 않아야 하며, 항상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기꺼이 수행해야 한다. [여전히 ‘대승법’이 무엇인지 직접적인 설명은 없으나 ‘성문승’과는 차별이 있음에 틀림없고, 그 대승법에 의지해 수행하는 사람들을 공경해야 하며, 그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여래신력행(如來神力行)이란, 성문과 함께 머물거나 받들어 섬기거나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하지 않고, 또한 그들의 의복과 음식을 받거나 쓰지 않으며, 동산의 숲속이나 절 안과 같은 경행처에서 성문승의 가르침이나 나아가 한 게송이라도 독송하거나 생각하지 아니하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의 가르침을 독송하거나 생각하지 않게 한다. 오직 항상 대승법만을 독송하고, 대승법만을 연설하며, 몸[身]과 말[語]과 마음[心]에 대하여 항상 청정하게 하며, 계와 선법[戒善法]에 항상 안주하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몸과 말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계법(戒法)에 편안히 머물게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대승에 나아가 독송하고 섭수하면 항상 이 사람에 대하여 존경하고 귀의하여 받들어 섬기고 가까이하여 익히고 담론한다.
모든 의복과 음식을 함께 받고 쓰되, 보살과 함께 머물고 같은 경행처에서 항상 대승법을 구하고 섭취하며 받들어 지닌다. 갖가지 향화ㆍ도향ㆍ말향ㆍ등명ㆍ화만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고, 오로지 항상 대승경전만을 독송하고 환희하는 마음으로 대승법을 연설한다.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보살에 대하여 교만심을 일으키지 않고, 나머지 보살들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하여 웃음을 머금고 먼저 말한다. 거칠거나 어지럽게 말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말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기꺼이 듣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또한 그렇다. 설혹, 목숨을 잃을 인연을 만나더라도 또한 대승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만일, 어떤 보살이 대승에 나아가 독송하고 섭수한다면, 나보다 낫다는 마음[增上心]으로 환희하고 직접 받든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공경하고 공양하게 하며, 또한 다른 사람과 서로 다투지도 않는다. 아직까지 대승경전을 듣지 못한 이에 대하여서는 항상 기꺼이 배우기를 바란다. 법을 말하는 이에게는 공경심을 일으키고,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낸다.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보살에 대하여 교만심을 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꾸짖고 책망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과실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 행하고 나서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닦아 배우게 한다. 특히, 보살업을 잃은 자・보살도를 잃은 자・보살행을 잃은 자・보살인(菩薩因)을 잃은 자・보살의 선교(善巧)을 잃은 자・보살의 일[菩薩事]을 잃은 자・보살가행력(菩薩加行力)을 잃은 자・보살행의지처(菩薩行依止處)를 잃은 자・4무량심(慈 悲 喜 捨)을 잃은 자・평등행(平等行)을 잃은 자・삼보(三寶)를 믿지 않는 자・선법욕(善法欲)을 잃은 자・집착에 얽히고 묶여서 갇혀 있는 자・병든 자・부처님에 대하여 선근을 심는 것을 잃은 자・의지할 곳 없는 자・무명에 가려진 자・하천(下賤)한 곳에 태어난 자・보리심을 잃은 자・법족(法足)을 잃은 자・복지(福智)의 자량(資粮)을 잃은 자・대승의 믿음을 잃은 자・계호(戒護)를 잃은 자・법수법(法隨法)을 잃은 자・화인(和忍)을 잃은 자・지관(止觀)을 잃은 자・보살의 정진(精進)을 잃은 자・보시 조순(調順) 지족(知足)을 잃은 자・염(念) 지혜 지(持) 행을 잃은 자・피안(彼岸)에 나아가는 길을 잃은 자・불가(佛家)에 태어나지 못한 자・선우(善友)를 잃은 자・유정을 이익 되게 하는 마음을 잃은 자・법에 의지함을 잃은 자・지혜[智]에 의지함을 잃은 자・의(義)에 의지함을 잃은 자・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는 것을 잃은 자・4정근(正勤)을 잃은 자・실어(實語) 법어(法語) 이익어(利益語) 조복어(調伏語)를 잃은 자・빈천한 자들의 제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아니, 환상적인 이야기이라 할 만큼 요구사항이 점진적으로 많아지고, 갖추어야 할 능력이 또한 커져야 하며, 그 능력을 오로지 타인(중생=유정)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지각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衆生)을 구제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수행함으로써, 능력을 구비해야 만이 비로소 여래가 된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물론, 이 경에서는 중생 구제를 위한 마음과 목표를 ‘대선근(大善根)’이라는 용어로 표현했지만 그것의 요체는 역시 대자대비(大慈大悲)에 입각한 보시(普施)・제도(濟度)에 있고, 수행의 결과로 생기는 실천적인 큰 능력을 ‘용맹하고 빠른 힘’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은 ‘일체지(一切智)’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내용으로 경전의 절반 정도가 할애되어 앞에서 기술되었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5행순으로 중요도가 달라지는데 그에 따른 보리심 성취와, 그 수행자들에 대한 믿음・존경・ 보시 등도 차등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짜인 경의 전문을 다 읽고 나면, 5행(行)과 불법(佛法) 수행 정도와 깊이를 나타내주는 위계(位階)인 5과(果)를 사실상 연계시켜 놓은 것으로 보인다. 곧, 양거행(羊車行)은 예류과(預流果)를 얻고, 상거행(象車行)은 일래과(一來果)를 얻으며, 일월신력행(日月神力行)은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성문신력행(聲聞神力行)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으며, 여래신력행(如來神力行)은 독각과(獨覺果)를 얻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적인 설명은 없지만 경의 상반부에서 5행을, 하반부에서 5과를 구분 기술한 것으로 보면 그 연계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5행으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면 그 결과로서 ‘보리심’이 주어지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데 역시 그 보리심에 대해서조차도 설명이 전혀 없다. 따라서 다른 경들을 통해서 이 두 개의 키워드에 대한 설명[答]을 찾아야만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먼저 나온 경이 다른 경을 낳고, 그 다른 경은 또 다른 경을 낳아 왔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경에서 설명 없이 전제(前提)되고 있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란 무엇이며, 또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시원스럽게 설명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경들을 통합적으로 분석 가능하도록 하나의 컴퓨터 파일 속에 넣어 두지 못했기에 일목요연하게 이들 용어의 출처와 개념을 추출하여 설명할 수는 없다. [이제, 경전 분석도 수동식인 인간보다는 인공지능에 맡기는 편이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나의 글쓰기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집필해 온 경전 관련 문장들을 통해서나마 두 개의 키워드 의미에 대해 재정리해 보고자 한다.
지금껏 내가 읽어온 많은 경들에서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라는 용어를 만났었다. 확실하게 그 근거 하나를 댄다면,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佛攝受經)」에서 극락세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용어가 나온다. 곧, “온갖 유정들이 이 묘한 소리를 들으면 모든 악과 번뇌가 다 소멸되고 한량없이 많은 선법(善法)이 점차 증장되어 속히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한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무상(無上)은 ‘위가 없다’, ‘최고’, ‘최상’이라는 뜻이고, 정등(正等)은 ‘균일함이 바르다’, ‘차이가 없다’, ‘똑 같다’, ‘동일하다’, ‘바르게 평등하다’, ‘차별을 두지 않는다’ 등의 뜻이다. 그리고 보리(菩提)란 깨달음・지혜 등을 뜻하는 범어 Bodhi의 음역이다. 그래서 이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두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란 말로 바꾸어 표기하는데(이 문제의 「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에서처럼), 이는 위가 없고 차별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올바른 깨달음, 곧 ‘최상의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전혀 다른 용어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다. 이 용어는, 불교 경전 가운데 최고・최후의 종지가 가장 잘 응축 표현되었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다른 경들에서 이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많은 경들에서도 이 용어는 산발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무슨 의미일까? 필자가 오래전에 정리해 놓은 바가 있기에 여기에 붙이고자 한다.
불자(佛子)들이 흔히 앵무새처럼 외우다시피 하고 있는, 그 유명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금강삼매경」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두 경전을 읽으면서 필자 역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용어 앞에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의심하고, 묻고, 찾아보았어도 그 답을 시원스럽게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가장 빠른 방법은 범어나 팔리어에서 이 용어가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지만 그조차 쉽지가 않은 게 현실이다. 도대체, 무슨 뜻이기에 중국어로 경전을 번역할 때에 소리 나는 대로 한자(漢字)의 음을 빌려 표기하고 말았을까?
그런데 「좌선삼매경」에 그 단서가 있다. 곧, ‘아뇩다라(阿耨多羅)’에 대해서는, “진나라 말로는 무상선법(無上善法)이라고 한다. 성인의 지혜로 일체를 다 나타내어 인도하고 큰 덕이 한량없어서 범마중성(梵魔衆聖)도 미칠 수 없거든 더구나 일반 중생으로서야 어떻게 부처님의 높은 덕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상(無上)이라고 말한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물론, 이 「좌선삼매경」에서는 ‘아뇩다라’를 ‘아누다라(阿耨多羅)’로 바꾸어 표기했는데, 팔리어 발음이 사전에서처럼 ‘anuttara’로 표기된다면 ‘耨(김맬 누)’자를 ‘뇩’이 아닌 ‘누’로 발음해야 옳다고 본다. 어쨌든, 문제의 ‘아뇩다라’를 ‘위가 없는 최고의 법’ 으로 풀이한다는 뜻이다. 이때 법(法)이란 ‘깨우침’ 또는 ‘가르침’ 또는 ‘진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삼먁삼보리’에 대해서는, “‘삼먁’은 진나라 말로 진실(眞實)이라는 말이고, ‘삼불타’는 일체를 다 깨달았다는 뜻이니,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아 열반의 원인을 익혀 바른 견해를 말하고, 네 가지 진실[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함]을 알아 전전하지 않는다. 다 깨달아 남음이 없기 때문에 진실하게 일체를 깨달았다고 말한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좌선삼매경」에서는 ‘삼먁삼보리’가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로 바뀌어 표기되어 있지만 같은 뜻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어쨌든, 문제의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sammāsambodhi’(팔리어), ‘samyak-sabodhi’(범어)]는 ‘번뇌의 원인과 그것을 소멸시키는 방법 등 일체를 깨달은 진실’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번뇌의 근원과 그것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한 더 이상의 위가 없는 깨달음 곧 최상의 깨달음’ 이거나 ‘그 깨달음을 얻은 사람[解脫者]’이라고 풀이하고 싶다(2014. 01. 09.).
다시 그렇다면, ‘최상의, 최고의 바른 깨달음’이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 이에 대해서도 나는 지금껏 어떤 경전이나 수행자들로부터 직접적인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만, 내가 읽어온 적지 아니한 경전들을 통해서 종합・유추해 보자면 이러하다. 곧, 근심걱정[근심 +걱정 =번뇌]을 일으키는 요인과,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방법과, 그 방법에 따라 실행에 옮기는 실천적인 삶과, 제반 현상이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지혜 등에 대한 부처의 깨달음으로, 계(戒)・정(定)・혜(慧)라는 세 글자로 요약된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무언가 빠진 듯하다. 그것은 ‘최상의,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실행에 옮겼을 때에 그 당사자는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아니면, 현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그 깨달음의 결과에 대한 대답이다.
누가, 이 부분에 대해서 속 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부처가 여러 경들을 통해서 누차 강조했듯이, ①생사(生死)의 굴레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다시 태어나지 않음인가? 아니면, ②현실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조금도 걸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의 구비인가? 아니면, ③그야말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서 누리는 무욕(無慾)의 청정함이며, 마음의 평화인가? 아니면, ④보살승에 입각하여 중생들을 위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 심을 내어 보시・구제함인가? 물론, 경들은 이들을 두루 다 포함하고 있다.
누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의 말이 아니라 경들에 산재되어 있는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는 것이다. 곧,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는,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고, 변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는, 그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궁극의 도[道=法=空]와 눈을 맞추듯이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도(道)와의 눈맞춤인가? 그것은 결국, 대인・대물관계에서 대자대비(大慈大悲) 심을 내어 많이 참고, 많이 용서하며, 많이 베풀되 겸손하고, 평소에 대상[현상+관계]에 대한 관찰과 명상[禪定]으로써 지혜를 얻어 온갖 근심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을 현실생활 속에서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이 문제의 경(經)이 말하는 보살도(菩薩道)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자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 할 수 있으리라.
-2017. 0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