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정말로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혹은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서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이 될 가능성이 상당하지만),
그들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사회조직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라거나,
성별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린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역사상의 위대한 논쟁들은 중요하다.
적어도 이 신들의 첫 세대만큼은 인간 설계자들의 문화적 아이디어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이미지에 따라 창조될까? 자본주의? 이슬람? 페미니즘?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그들이 가는 길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편을 선호한다.
심지어 생명윤리 분야조차 "무엇이 금지된 행위인가?" 하는 다른 질문에 마음을 쏟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유전적 실험을 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낙태된 태아에 대해서는? 즐기세포에 대해서는? 양을 복제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침팬지는? 사람은? 이런 질문들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이대로 브레이크를 밟고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류의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과학 프로젝트들을 중단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불멸을 향한 탐구(길가메시 프로젝트)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에게 왜 유전체를 연구하는지, 왜 뇌를 컴류터에 연결하려고 시도하는지,
왜 컴퓨터 안에 마음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지 물러보라.
당신이 듣게될 표준적 답변은 십중팔구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병을 고치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것이 표준적인 정당화다.
아무도 여기에는 토를 달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속에 마음을 창조하는 것이 훨씬 더 극적인 함의를 가지지만 말이다.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 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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