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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날 계수함을 갖는 지혜를 얻자 신90:1-17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한 해가 가고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하다가 가정을 갖고 자녀를 낳고 기르다가 언젠가는 다들 떠나보내고 마지막은 나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인간의 한 일생이라고 한다. 그 길고 먼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왔을까? 누구에게나 마지막으로 오는 죽음을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였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것들을 다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자식 키우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일하면서 돈버는 것 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돈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돈과 재물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것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탐심을 늘 경계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성공의 기준을 재물의 많음에 두고 있는 번영신학의 현실에서, 탐심에 대해 스스로 절제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재물에 대한 교훈은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마 6:25).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말하자면 탐욕을 금하라는 말씀이시다. 실제 탐욕으로 인하여 영생을 잃어버린 한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물었다(마19:16).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의 의도를 아시고 역으로 물으셨다.
(마19: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이에 대하여 부자청년은 자신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겠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
(마 19:20) 그 청년이 그 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거니와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하거늘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과 율법적 행위에 자신의 인생의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 기반을 바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부자청년의 하나님은 재물이었다.
(마19:21-22)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돌아간 부자청년을 생각해 보라!
그 부자 청년은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자부심을 갖고 이제는 영생까지도 소유해야 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네 소유를 다 팔아 나누어주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주님 곁을 떠났다. 부자의 관심은 오직 자신에게만 쏠려 있다. 그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데, 자신의 모든 재물을 소비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른다. 결국 하나님은 탐욕에 도취된 그 부자의 영혼을, 그날 밤에 데려가셨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심지어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엡5:5)고 말한다. 이러한 말씀들을 토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면서 형제들 사이에 유산 문제로 다투거나 또는 재산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맘몬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인지 스스로 점검하고, 회개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을 데려가시는 것처럼, 오늘 밤 우리의 영혼도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말씀이 시편 90편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가 지혜에 이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쓰게 하소서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편에는 아주 적절하게 인생을 말하고 있는데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한 송이 나팔꽃과도 같이 8~90세를 산다 할지라도 인생은 풀과 같을 뿐이라고 합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6)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기도를 통해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모세의 기도 첫 부분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조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함과 유한함을 상기시킴으로써 뒷부분에 나올 나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갖게 하여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를 보면서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사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려는 인생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메세지를 한번 들여다 보겠습니다. 모세는 120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레위지파로 태어난지 석달만에 갈대로 만든 궤에 담겨져 나일강에 버려졌다가 물에서 건져냈다고 해서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으며 건져낸 후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애굽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채찍질 하는 모습에 분노해서 그 애굽사람을 쳐 죽였던 것으로 인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살았습니다. 그 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 히브리 백성들을 출애굽하는데 지도자로 쓰임받았습니다.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직전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를 보면 120년 모세의 인생이 40년씩 분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궁에서의 왕자로 살았던 40년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훈련 40년, 그리고 출애굽하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광야 40년 살아보니, 인생이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인생을 말할 수 있죠? 오랫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사계절과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만이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이 모세라는 겁니다. 그는 인생 120년을 드라마처럼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드린 기도의 한 실례입니다. 시편 90편은 시편 150편의 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시로써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원함에 대비해서 인간의 유한성을 보여준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함과 인간의 유약함(1-6)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을 묵상하므로 시작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로 시작하는 시편 90편은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비록 거친 바람이 부는 광야같은 이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지만, 우리들의 거처는 주님의 품안에 있습니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서 우거하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거처는 아파트가 아니라 광야같은 이 세상을 지내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거처요 피난처시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우는 굴에, 새는 둥지에 그 거처를 마련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지라도 여러분의 영원히 거할 곳은 하늘나라인 것을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믿습니다. 이 땅에서 기쁘거나 슬플 때에도 여러분의 하늘나라 시민권만 확실하다면 순례자의 노정을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전한 거처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거처가 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시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온 세상이 흑암 속에, 혼동 가운데 있던 그 때도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도 영광 가운데 계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역사 속에 왔다가 가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역사를 이루시는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그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빌면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면 그 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모세의 표현을 빌리면 그분은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분께 여러분의 소망을 두고 그분 안에 여러분의 거처를 마련하십시오.
3절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은혜란 사람이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시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다시말하면 티끌로 돌아가라는 이 말씀은 죽음을 명하시는 말씀인데 그 명령에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라 숨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을 향해 진노하사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못간다고 할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나팔꽃과 같은 존재들뿐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아니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리의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게 참 소중한 분들이라도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셨으므로 사람은 죽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우리가 남길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면 우리 인간은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끝장내십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의지로 세상에 오지도 않았고, 자기의 결정에 따라서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왔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돌아갈 뿐입니다. 영원하신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리기로 작정하면 온 세상이 달라붙어서 죽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결정하면 세상의 모든 의사들이 달라붙어도 살려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한계를 인식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남은 날들을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는 그 깊이를 더합니다. 모세는 사람 사는 것을 몇 가지 비유로서 연속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시90:4) 주의 눈앞에서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 경점과 같나이다. 한밤 중에 1초밖에 안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속에서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고 수많은 정권이 사라졌으며 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간 역사일지라도 주님의 눈에는 하루가 지나간 것밖에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가 아니라 밤의 한 경점과 같다는 것은 한 순간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5절에는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순식간에 쓸어 가시나이다. 마치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리는 홍수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쓸려 가듯이 하나님은 인생을 그 눈앞에서 죽음으로 쓸어 가십니다. 폭풍우가 검은 구름을 몰고 가듯이 사람은 순식간에 삶의 터전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갈 뿐입니다. 얼마전 튀르키에서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46000명 이라고 나왔는데 불과 1-2분 동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마치 순식간 홍수에 쓸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생이란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아니 인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푸른 소나무도 아니고 그냥 풀에 지나지 않습니다. 봄에 돋아나다가 여름 한 철 끝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시드는 풀과 같은 존재가 우리 인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라다가 꽃피우고 그러다가 벤바 되어 마르는 것이 풀인데 우리들 인생이 풀처럼 소멸됩니다. 풀이 자라다가 꽃피우고 열매 맺고 사라져 가는 것은 보편적인 과정 같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 특별히 축복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도 탈락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어릴 때 친구들 가운데는 중도 탈락을 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한참 꽃피울 때가 오기도 전에 벤바 되어진 친구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지금 생명 있음에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2. 죄 때문에 날아가는 인생(7-9)
아침에 자라면서 꽃을 피우다가 저녁에는 시들어가는 나팔꽃과 같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죄를 밥먹듯이 짓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정말 모세의 기도는 인간의 죄악됨을 통해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7절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의 분노로 말이암아 소멸되며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근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것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며 창조주의 본래적인 의도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로 인생들이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모세는 광야 40년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세대가 자기 눈앞에 사라져 가고 광야에서 소멸되는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읊는 시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우리가 살 수 있지만 주님이 진노하시면 우리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에 풀은 자랄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인생은 결코 번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분내심에 쓰러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 속에 내일을 계획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지 아니하는데 여러분이 세우는 계획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믿고 그분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소원으로 삼아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지라도 그분께 부르짖기를 즉 그분께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때로는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당했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 가고 있습니다. 잠시 환난의 경한 것이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모세의 기도에 계속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8절은 “주께서 우리의 불법들(죄악)을 주 앞에 두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들을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이 보신 죄악은 반드시 처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보실 수 없는 죄악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숨은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악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야 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노하시며, 주님의 분노하심에 인생의 모든 날이 순식간에 날아갑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도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인류에게 죽음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값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자신의 죄 때문에 한순간에 날아갑니다. 시102: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나이다.” 인생을 주님 앞에서 깨끗하게 죄 없이 살아야지 죄 때문에 중년에 날아가는 자가 없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중년에 날아가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죄악이 주님 앞에 놓여있으며 은밀한 죄라도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십니다. 즉 아무리 은밀한 죄일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빛이신 그 분 앞에 숨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속죄의 대속의 은혜만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복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심중에 죄악을 품지 마십시오. 오직 죄인의 소망은 사죄의 보혈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죄악을 품고 살면 소모적인 인생이 됩니다.
9절은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이 참으로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인데 오늘이 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부질없이 지나간다고 생각이 든다면 예수님을 만나 보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루를 살더라도 기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 믿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10절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실 모세는 120세를 살았으므로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옛 족장들과 비교해서, 특히 영원과 비교할 때 몹시 짧은 삶을 고백합니다. 모세는 지금 수고와 슬픔뿐인 삶도 신속히 날아가 버리나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날아가는 날들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고와 슬픔의 날이 날아간 후에는 기쁨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언제든지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본향 찾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나의 인생이 서글퍼집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례자의 묵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1절 누가 주의 분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주위에서 60만 명이 죽어가는 인생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으로 쓰러져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최후를 보면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분노의 능력을 알리이까!”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있는 그대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한 결코 과장법을 쓸 수 없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조차도 그들은 농담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한 것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누가 능히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구원을 얻겠습니까?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명하시는 그 분 앞에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좀 더 있다가 가야 되겠다고 누가 말대답하겠습니까?
오늘 티끌로 돌리시고, 내일 우리를 지옥에 던지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배우게 될 때에 인생은 은혜 입은 자가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에 불과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3. 일생동안 즐겁고 기쁜 지혜로운 삶(11-17)
남은 일생동안 정말 즐겁고 기쁘게 살기 원하신다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과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은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사랑하심과 은총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연수가 7, 80년을 수고와 슬픔으로 살아온 인생일지라도 언제나 새 아침을 허락하시고 그 날들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도합니다.
13절 오 주여, 돌아오소서, 어느 때 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에 관하여 주께서 뜻을 돌이키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14절 오 일찍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한다면 주님은 간구한 대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기도는 내 인생의 새 아침을 깨우는 원동력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즐겁고 기쁨의 새 아침을 기도로 여시기를 축복합니다.
(1) 주님의 행하시는 일들이 있읍니다
1) 주님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들에게 나타내소서(16).인생은 누구나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과 같습니다. 나팔꽃과 같은 짧은 인생, 수고와 고통과 슬픔으로 지내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대로 거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가는 인생임을 알고 우리들이 그분 앞에 기도하면 나팔꽃과 같은 짧은 인생 속에서도 새 아침을 여는 자들에게 수고와 슬픔과 고통의 날만큼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들을 나타내 주시며, 내 자녀들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 주십니다. 나팔꽃 같은 짧은 인생이지만, 다시 무너진 기도의 제단을 수축하고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 굻고 기도하여 내 인생과 내 자녀들에게 인생에 새 아침을 열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우리 손이 행한 일을 주께서 굳게 세우소서(17).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그가 친히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다. 그는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눈으로 보았고,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서 갈급한 백성을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도 경험했다. 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리기로 그 많은 백성을 먹이시는 것도 보았다. 동시에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도 보았다(9). 비록 사람들에게서는 숨기고 감출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보시는 그분 앞에서 감추어진 죄는 없기 때문이다,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8). 자신들이 범한 죄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32:11-13).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모두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 한 마디로 그들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이면 베어지는 풀과 같았던 인생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짧은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분을 믿고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는 지혜를 얻게 된다(12,전12:13).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간구한 것처럼 우리와 우리 자손들도 하나님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게 된다(17). 지금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있으니 어찌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우리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얻게 하소서(12)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우리의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한 번씩은 나의 날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삶을 대하는 마음 가짐이 달라집니다. 끊지 못하던 것도 끊게 되고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도 용서하게 됩니다. 염려와 걱정, 두려움의 이 세상이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하나하나가 귀하게 여겨집니다. 지혜롭게 사는 길 중에 하나는 나의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천 여년 전 숱한 고난 속에서 믿음을 가켰던 성도들은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날을 그리 길게 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일 년 후의 일에 대해서 계획하는 것조차도 어리석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그들의 날을 짧게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계획 없이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더욱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전과는 다르게 쇠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음세대 상황은 더 암담합니다. 교회학교도 쪼그라들고 10대들은 차치하고, 최대 40대 초반까지에 해당한다는 MZ세를 교회 안에서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여기에 지구촌 전체가 직면한 기후위기로 지진 기근 역병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면서 주님오실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라는 것을 믿는다면 정말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모세가 시편에서 기도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개인의 삶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부디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은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시편 90편을 정리해 봅시다.시편 90편은 인간 유한성을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어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생을 마치기 전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십니다(2). 그러나 사람에게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인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사람은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원래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3). 그리고 불면 날아가는 티끌같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홍수가 날 때 모든 것이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홍수처럼 쓸어가십니다(5).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번 불어 버리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풀과 같은 존재로 풀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벤바되어 시들어 버리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우리의 한계를 처음부터 기억한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높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 말씀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정말 우리 인생이 아침에 돋는 풀과 같으며 또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티끌로 돌아갈 존재임을 기억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는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은 12절입니다.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는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제부터 내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주께서 굳게 세우소서(17)라는 기도는 자신이 아무리 견고하게 해 놓은 일도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미래를 의탁하였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가족과 민족의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 생애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계수하다는 세어본다라는 표현으로 이 말씀이 성경에 101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라는 의미는 성령하나님께 우리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철저하게 가르쳐 달라는 소망입니다.
여기에는 인생에 남은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숫자를 세는 것을 말합니다. 힘든 군대생활을 하다보면 하루하루를 세어가면서 전역이 얼마남았는지 세어본 날들도 있었지요. 또 2주 뒤에 여행을 잡아두면 어느 곳에 가고 싶고 어떤 식사를 하고 싶고 어떤 숙소에 묵고 싶은지 계획을 세우면서 그 날을 세어본다면 이것은 그저 숫자를 세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지혜를 적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지식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아는 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고 원수를 맺었던 사람과도 화해를 합니다. 이전보다도 더 하나님께 충성되고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남은 날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기존의 곳간을 부시고 새로운 곳간을 만들어서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19b-20). 그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소유의 주인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돈 좀 벌었다고 평생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것은 부자가 되면 그렇게 될 거라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는다면 평안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인생에 남은 날을 계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생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생의 날을 계수합니까? 인생의 날을 계수하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 이시니이다(시90:2).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이처럼 인생을 이렇게 짧게 표현합니다(시90:6).
마찬가지로 건강하던 우리 육체도 병들고 늙고 쇠하게 됩니다. 꽃처럼 시들어 말라갑니다. 명예도 권세도 유한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우리의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속히 인생이 날아간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우리는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 만이 내 인생의 남은 삶을 계수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인생을 평생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계수 할까요? 아닙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라가 할 것이니(시90:3)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나님만이 우리의 날을 계수하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처럼 확실하고 평등한 것은 없습니다. 모세는 120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홍수처럼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목격하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대가 수몰한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하루 1000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언젠가는 우리도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과 나와의 거리는 멀지 않아요. 다윗은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고백합니다(삼상20:3).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 것만큼 내가 죽음의 종착역에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죽음과 나는 거리가 멀지 않다고 인식하는 자가 내 인생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입니다.
(3) 카이로스의 삶을 살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2가지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크로노스'는 과거 현재 미래로 연속하여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개입된 주관적인 시간으로 그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 '카이로스'의 삶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짧은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고 죽으셨던 그런 시간이 카이로스 시간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크로노스의 시간 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고 의를 구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스는 헬라어로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카이로스=기회]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앞머리가 무성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붙잡으라는 뜻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때가 늦으면 기회는 사라져 버리고 발목 뒤에 날개가 있는데 기회는 매우 신속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이 은혜받을 만하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를 위해 수고해주시는 봉사가 얼마나 의미가 많습니까? 자녀들의 성경공부를 맡으신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노고는 어떻습니까? 예배당을 깨끗케 하기 위해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의 아름다운 성품은 어떨까요? 섬김, 헌신 이런 게 귀한 일이지만 항상 섬기고 충성하는 것 같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항상 하나님의 전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어느 순간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되면 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남편, 아내를 사랑하는 것, 나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항상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병들고 죽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내가 항상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기회도 언제든지 내 손에서 떠나게 됩니다. 인간은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는 수직적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서 사는 게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생각하며 인생의 남은 때 더욱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신앙고백을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영원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들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자신 인생의 날들을 계수하는 자들은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가정예배나 교회봉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여 그 카이로스의 기회를 잡길 바랍니다. 성령님,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더 사랑하고 더 충성하고 더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서 인생의 날을 계수하라는 주님, 오늘 우리가 우리의 남은 삶을 계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인생의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한 시간들을 더욱 의미있게 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약하고 병든 자들을 더욱 섬길 수 있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도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옵시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부모를 더욱 공경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충성된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