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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8 강
88. 영광의 왕의 노정(16)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 중 략 -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 중략 -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26:57-75).”
16.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이 가야바의 법정에 끌려가는 사건이 마태복음 26장에 나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난 후에 가룟 유다와 군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그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베드로는 칼을 빼서 하속 한 사람의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죽을지언정 내가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께 실족할지라도 나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던 베드로로서는 당연하게 예수를 결박하려 하니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게 된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고,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이다(마26:51-56).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마26:24).” 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자기가 새로 만들어서 가는 길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어디로 갈 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참된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군병들이 잡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룟 유다가 팔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간다는 것이다.
기록된 대로 간다는 말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이루어야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 속에서 자신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도 계시 가운데서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보였을 것이다. 죄 없이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보였고, 채찍에 맞는 사람이 보였고, 어린양으로서 잠잠히 입을 열지 아니하는 사람이 보인 것이다. 자기 영 안에서 그런 사람이 보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예언된 사람이 자기로 보인 것이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해서 기록된 대로 간다.”는 말은 내가 가는 이 길에는 나를 팔 사람도 있고, 잡으러 올 사람도 있고, 정죄할 사람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이루겠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이미 그렇게 기록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이미 그렇게 기록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는 말을 모르다가 나이가 들어가면 그 말씀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없어도 알게 된다. 성경은 그것을 먼저 깨달은 사람이 써놓은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책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길을 가도록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정해준 길, 그 길로 가시는 분이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이고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신 분이다. 선지자들은 바로 이 사람을 본 것이다.
죄 없이 왜 고난을 받는가? 죄를 진 사람이 고난당하는 것은 합법적이지만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고난당한다면 그것은 합법적이 아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당하다면 죄 있는 사람은 벌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으면 죄 없는 사람도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가 보여졌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예언은 영원한 실재를 보고 한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꼭 나올 수밖에 없다.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했다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100년, 200년, 1000년이 지나도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예언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만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나빠서도 아니고 군병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는 그렇게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 받으심
가야바의 법정에서는 이런 예수를 놓고 ‘어떻게 죽일꼬? 어떻게 하면 죄목을 찾을꼬?’ 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죽도록 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지금 ‘어떤 죄목으로 죽여야 할까?’ 하며 그 죄목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제사장이 손뼉을 치면서 더 이상의 증거를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참람죄에 속하므로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기에 합당한 증거를 제시받게 되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많다. 어떤 정치범을 처리하고자 할 때 그를 처리하기 위한 증거들을 수집한다. 이러저러한 증거들을 나열해서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들고 증인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경이 내게 대하여 기록되었고 인자는 그런 곳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기록된 사람을 ‘무슨 합법적인 이유를 가지고 죽일꼬?’ 하고 있으니 그것은 자기들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고, 자기들의 변명에 관한 문제였다.
1)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들이 예수께 묻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 하였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개의 아들은 개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냐?’는 말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냐’는 말은 ‘사람이냐’는 말과 같다.
‘하나님 아들이냐?’고 물은 것은 ‘네가 하나님이면 우리는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면 우리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물론 네가 죽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도 좋다는 뜻이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10:34-36).”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말이다(시편 82:6).
그런데 이것은 유대교적인 관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 말씀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곧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너는 참람하다. 사람이 되어서 어찌 네가 자칭 하나님이라 하느냐?”고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번도 스스로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하신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2)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가 보리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하는 말씀에 그들은 분노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언제나 ‘인자’라고 표현했다.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옆구리를 찌르니까 물과 피가 나오더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되다고 하였다(요19:34-35). 분명 그는 세상에 있을 동안에 사람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던 것이다.
만일 유대인의 눈에 예수께서 하나님으로 보였다면 어떻게 신을 십자가에 달겠는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조롱을 했고,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침을 뱉었던 것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가 세상에 계실 때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또한 ‘권능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부활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이다. 부활 승천해도 역시 사람이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부활 승천해서 하늘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늘에 계셔도 사람이고 어디에 계셔도 예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은 재림을 말한다.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다시 올 때도 역시 인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히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밝히 말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땅 위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나라이지 신들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영역, 이것은 모두 사람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어디에 임하는가? 사람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에 관한 통치이다. 예수께서 인자로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오셨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다. 우리가 만일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홀연히 변화하리니(고전15:51)’ 하는 말은 홀연히 변화하여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천국은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지지 신들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밝히 말하라고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너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인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인가. 예수님은 ‘인자’와 ‘하나님 아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거나 사람의 아들 중 하나였다면 대답하기 난처했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 하면 자칭 하나님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그에게서 하나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구별되지 않는다.
참 하나님의 아들이면 참 사람의 아들이다. 십자가는 이것이 완전하게 드러난 자리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온 자리이고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간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사람인데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인데 사람이 된다. 가죽옷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십자가를 지고서 우리에게 오신 분, 그가 분명 우리의 하나님이다.
예수 한 분 안에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내려오고, 사람도 그 자리로 올라간다. 그는 지금도 역시 인자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는 지금도 인자이다.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때도 역시 인자인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는 영원히 인자다. 인자 안에 들어 있는 이 비밀이 중요하다. 이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다.
3) 하나님이 가죽옷이 되심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느니라(창3:21).” 가죽옷이 되려면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그런즉 하나님이 죽어서 가죽옷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가죽옷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피부에 가장 친근하게 가깝게 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또 죽고 또 죽어서(낮아지고 낮아지셔서) 가죽옷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인자다. 우리가 예수께서 인자인 줄 알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와 친화력이 없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와 같은 한 운명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숨 쉬게 되었다. 그가 우리의 운명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와 같은 피부라고 알았을 때는 그는 우리의 가죽옷이 되고, 그가 우리와 한 운명인 줄을 알 때 그는 우리의 호흡이 된다.
즉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인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하신 말씀처럼 그 열매를 맺는 것이다. 가죽옷을 입는 자리에서는 ‘감사합니다.’ 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렇지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세계에 오면 내가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안에 와서 생명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이 더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우리와 똑같은 운명으로 드러난 자리에서 우리 생명이 될 수 있다. 이 자리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에 가면 예수님이나 우리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때는 우리와 예수님은 큰 차이가 있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우리와 예수님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에서는 우리와 똑같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우리와 영원히 한 운명 안에 있다.
십자가에서는 선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먼저 온 사람도 없고 나중 온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다 똑같은 자리에 이르게 된다. 십자가는 아담의 세계를 완전하게 통일시키는 자리다. 스룹바벨 앞에서 태산(높은 산)이 평지가 되었다(슥4:7)고 했듯이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한 운명으로 통일시켜 버린다. 이 자리가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다.
십자가에 서 있는 모습이 우리의 참 모습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 같은 한 사람이다. 예수님과 우리도 십자가 안에서는 하나다. 형제와 나도 십자가 안에서는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두려움이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움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한 운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나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인자로 세상에 오시고 또 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인자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말을 사람들은 어떤 신이 우리 곁에 붙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인자가 아니라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는 우리와 함께 있고 영원히 우리를 떠날 수 없는 분이다. 내 운명을 분리할 수 없듯이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앞에서는 단지 그 운명만 있었다.
그가 자신을 인자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친근하고 실재인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곧 사람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에게 선악과를 주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은 바꾸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사람 그대로이다.
우리가 사람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결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인자, 사람의 아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를 절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인자가 드러나는 곳이다. 분명히 사람인데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난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지금 교회 안에서 보지 못하면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인자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지금 보고 있다.
4)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함
종교 안에서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타고난 인간성을 가지고서도 예수를 만날 수 없다. 베드로는 타고난 인간성이 탁월했고 예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는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세 번 모른다는 말은 완전히 모른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말로만 모른다고 했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다.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다. 이것은 완전하게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것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타고 나지 않는 것으로, 타고 나지 않는 운명으로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가서 우리의 타고난 것을 처리하고 난 후에, 처리된 나 자신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옛사람)를 처리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옛 생명을 처리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가면 우리의 옛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무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한 운명인 새 사람이 발견되어 하나님이 부르시면 부르시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하게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다를 수가 없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구별되었지 십자가에 가서 우리 자신을 보면 하나님 아들이 곧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이 곧 하나님 아들이다. 인자로 오신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말씀하셨다. 끝났다는 것이다. 머리가 안 좋은 사람이 오히려 머리를 굴리려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의 머리로는, 너의 생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용기도, 너의 의리도, 너의 사랑도 안 되고 다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자고 쉬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앞에 가야 영원히 속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탄은 선악과를 줌으로써 우리에게 마지막 판도라의 상자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 앞에 가면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이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 보좌 우편이고, 구름을 타고 오는 길이며, 인생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자리, 하나님이 함께 있는 자리, 임마누엘이신 그 자리는 주님과 내가 영원히 함께하는 자리이다. 우리에게 그 이상의 축복은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너는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이다. 네가 젊어서는 띠 띄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이끌고 갈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너는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없었으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창조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렇게 창조되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흠 없고 티 없는 모습이고, 죄 없는 모습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의 걸작품이다. 하나님의 작품을 보고 우리가 즐거워하면 영원한 만족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자로 발견하게 하심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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