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이 피는 4월이 되면 전북 고창읍성에는 성곽길을 따라 늘어선 멋진 철쭉들을 보려고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댄다. 봄의 선물인 꽃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이들을 위해 자연이 주는 위로다.
그러나 꽃은 참 정직하다. 스스로 있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정확히 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사라진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안다'는 두보의 시 <춘야희우>처럼 스스로 있어야 할 시절을 아는 게 인생 살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꽃은 알고 있다.
서론이 길었지만, 나도 붉디 붉은 철쭉 꽃이 성곽길을 따라 늘어서있는 장관을 보고 싶었다. 조금 시기를 놓쳤지만 5월 초에 고창읍성을 찾았다. 혹시나 시절을 모르는 철쭉들이 조금 남아있지 않을까.
그러나 꽃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기를 놓친 건 꽃이 아니라 나였음을 보여주듯이.
철쭉꽃은 사라졌지만, 초여름의 고창읍성은 또 다른 풍경으로 바뀌어있었다. 연두빛 푸른 녹음이 가득한 싱그러움은 철쭉꽃 시기를 놓친 나를 위로했다.
전라북도 고창 시내에 있는 고창읍성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백성들이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성곽이다.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는 등 시기는 불분명하다.
예전에 고창을 '모양부리'라 불렀는데, 그래서 고창읍성을 또 다른 별칭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고창읍성의 주요 기능은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다.
성 둘레는 1,684m며 높이는 4~6m로 꽤 웅장하다.
동,서,북문과 옹성(성문 밖에 원형으로 만든 작은 성), 치성(성벽 바깥에 덧붙여서 쌓은 벽), 해자 등 방어시설이 잘 갖춰져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불린다.

고창읍성 입구에는 신재효 고택과 판소리 박물관이 있다. 신재효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으로 고창이 고향이다. <심청가><춘향가> 등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신재효에게는 여제자 진채선이 있다. 여자가 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였지만 뛰어난 소리실력에 신채효는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후에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으로 불린다.
진채선은 남장을 하고 소리를 했다. 평소 판소리에 조예가 깊던 흥선대원군은 그녀의 소리에 반했는데, 그녀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된 후 첩으로 들인다. 하지만 이미 스승과 제자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결국 신재효는 그녀를 그리워하다 죽는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사랑이야기는 <도리화가>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고창읍성의 입장료는 3,000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 문화재 입장료가 저렴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금액도 작다고 생각했는데, 입장권을 결재하니 고창 문화사랑 상품권 2천원까지 덤으로 준다. 고창읍성 옆에 있는 고창 전통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햇빛이 따갑던 날이라 읍성을 둘러 본 뒤에 시장에 들러 7천원짜리 근사한 등산모자를 샀다. 그 모자는 그 이후 내 여행의 필수품이 됐다.
고창읍성 옆에 있는 고창 전통시장

이국적인 분위기의 고창읍성 입구


고창읍성 정문 성문은 마치 유럽 중세시대 성문처럼 견고하고 이국적이다.
성문 밖에 원형으로 만든 작은 성인 옹성 때문이다. 고창읍성의 모든 성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그 위에 총구멍이 있는 낮은 담장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다.
성의 정문은 공북루다. 앞면은 주출돌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뒷면은 화강암 기둥에 다시 나무 기둥을 세운 2층 누각 형태다. 앞면 주춧돌에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나 기둥에 홈을 파고 문짝을 단 모습이 조선 시대 다른 읍성과는 차별화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안에는 옥사와 동헌, 객사 등 관아 건물이 22동이 있었다. 하지만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최근 복원을 마무리했다. 이 중 비교적 옛 모습이 잘 보존된 객사, 동헌 등은 <사도>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가 됐다.
성곽길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시원한 아름드리 소나무 길이 이어져있다. 주민들은 편안한 운동복을 입고 운동을 나오고, 동네 아이들은 김밥과 과일을 싸들고 소풍을 나왔다. 평화로운 일상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 승려가 중국에서 관상용 대나무인 맹종죽을 들여와 고창읍성에 심었는데, 한여름에도 시원해 읍성의 명소가 됐다.

읍성 내부는 공원처럼 평화롭다. 소풍을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 따뜻하다.



성곽길에 올랐다. 성곽에 오르니 고창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고창 시내 풍경이 색다른 감흥을 준다.
고창읍성에는 성밟기(답성놀이)가 있다. 여자들이 머리에 돌을 얹고 성곽 길을 도는 행사다.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를 돌면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전후에 여성들이 한복을 입고 줄지어 성밟기 하는 풍습이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성곽을 걷다보면 역사적인 3.1운동이 벌어진 장소가 나온다. 고창은 동학농민운동 기포지가 있는 곳이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농민 혁명의 정신이 독립 운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치성 위 평평한 공터에 고창 청년회와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순종의 장례일에 벌어진 6.10 만세운동때도 청년들이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고창 시내 풍경을 보다보니 어느새 고창읍성 성곽길 한바퀴다. 내친김에 두바퀴를 더 돌아 극락왕생을 기원해볼까도 싶지만, 한바퀴로 만족해본다. 얼마전 등산을 하다 무릎 관절에 조금 무리가 왔는데, 이곳을 한바퀴 돌았으니 다리병이 나아지리라 기대해본다.

고창읍성을 세바퀴 돌면 극랑왕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학농민운동 및 3.1만세운동의 함성이 남아있는 공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