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무 6,12ㄴ-15.17-19; 마르 3,31-35
+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람어와 히브리어에는 ‘사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명확하게 촌수를 계산하는 문화가 아니라, 가족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힘을 발휘하는 유목 문화권이었기에 굳이 형제들을 구분 짓는 단어가 발달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친형제든 사촌 형제든, 가리지 않고 ‘형제’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희랍어 ‘아델포스’ 역시 친척 형제를 포함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친척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군중이 너무 많아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금요일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부르셨는데, 이는 새로운 열두 지파, 새로운 가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서 있는 혈연의 가족과, 당신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새로운 가족을 구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에만 어머니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셨기에’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이 ‘밖에 서서’ 예수님을 찾는 혈연 가족과, ‘예수님 주위에 둘러 있는’ 새로운 가족을 대비시키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끝까지 따라가 ‘십자가 주위에 둘러 있던’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성모님께서 여전히 포함되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오늘 독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오는 장면을 전하는데요, 교부들이 새로운 계약의 궤로 여긴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이야기와 오늘 독서의 유사성에 대해 지난달(12월 21일) 강론 중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첫째, 하느님의 궤는 오벳 에돔의 집에 석 달을 머물렀다가 다윗 성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가량 머무신 것과 일치합니다.
둘째, 독서에서 다윗이 기뻐하며(12절), 춤을 추는(16절;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 장면은, 엘리사벳 태 안에 있던 세례자 요한이 성모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뵙고 ‘즐거워 뛰놀았다’(루카 1,39)라는 구절과 연관됩니다.
셋째,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이 함성을 올리고” 있는데, 하느님의 궤 앞에서 ‘함성을 올린다’(비트루아흐; בִּתְרוּעָ֖ה)는 말은 역대기(1역대 15,28)에서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단어(아네포네센; ἀνεφώνησεν)가 신약 성경에 단 한 차례 등장하는데, 바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2)는 대목에서입니다.
구약에서 계약의 궤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후에는 성전 지성소에 모셔지다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신 예수님을 당신 안에 모신 성모님을, 루카 복음서가 새로운 계약의 궤로 알아본 것은 성령의 감도에 의한 것인데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신 분이시기에 새로운 계약의 궤가 되십니다.
다윗의 모셔 온 계약의 궤가 옛 계약, 즉 구약을 담고 있었다면, 새로운 계약의 궤이신 성모님께서는 새 계약 즉 신약을 체결하실 분을 잉태하고 낳아주셨습니다.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함께 고백합니다.
이 자리에 한데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맺어주신 형제요 누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세상의 선한 뜻을 지닌 사람들 모두가 우리의 형제이고 누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그만큼, 서로를 더욱 형제요 누이로 여깁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요 누이로 여기는 그만큼 더욱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