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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8-16 (신앙의 선글라스를 쓰고)
성경본문 : 다니엘 1: 8-16 출 처|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올해 들어 한·일 관계가 역사왜곡 및 독도 문제로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양국간에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물론, 양보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분명,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독도 역시 일본 땅이 아닌 우리 땅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서두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치·외교·역사적인 이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떻게 똑같은 역사와 똑같은 땅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까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독도 문제만 보더라도, 양국은 모두 역사적인 근거자료를 제시하면서 자기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여러분, 왜 그럴까요? 가지고 있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다르게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건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됩니다. 마치 여름철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차단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쓰게 되는데, 이때 선글라스 렌즈의 색깔에 따라 사물의 색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렌즈 색깔이 검정색이면 사물은 어둡게 보일 것이고, 렌즈 색깔이 붉은 색이면 사물은 붉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를 바라볼 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감사할 일로 고백될 것이며, 불만의 렌즈를 끼면 불만스런 결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신앙의 선글라스를 써야 합니다. 신앙의 선글라스를 쓸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 론
1. 신앙의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간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써, 그래도 훌륭한 지도자급으로 성장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이스라엘 포로들 중에 쓸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훈련시키라고 할 때에 뽑힐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니엘처럼 포로로 붙잡혀 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다른 포로들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 않고 출세할 길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출세를 꿈꾸며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출세가 보장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원칙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8절 말씀.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니엘이 바벨론 땅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정은 다니엘이 이방 땅에서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면서도 그것을 얼마든지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정근모 박사의 경우가 학문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중에 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 검정고시를 치르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그때 문리대 전체에서 2등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건너가 23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합리성에 더욱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인간의 한계는 더욱 느껴지고요, 과학은 결코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근본 바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가는 것이 과학이지요. 진정한 과학자라면 내면에 깊은 신앙을 소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근모 박사의 경우처럼 세상 학문과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의 비롯한 세 명의 친구들에게 주어졌던 왕의 음식들은 율법의 음식규례에 어긋나는 피를 뿌려 잡은 고기이거나 부정한 동물의 고기, 또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왕의 진미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신앙원칙을 저버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별개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행동이 바뀌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합니까?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고로 정신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이 병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에게 있어서 신앙원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이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고, 분명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 털어서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시편 46편 10절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인정하라”-이 말씀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인정하십니까? 정말 인정한다면, 자녀를 양육하더라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하지요? 내 욕심이 앞서 내 뜻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키울 수 있어야지요? 정말 인정한다면, 취업이 좀 늦어진다고 해도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려야지요. 정말 인정한다면, 질병이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살아서는 안 되지요. 치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며 나아가야지요. 정말 인정한다면, 순간의 실수와 실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더라도 자포자기 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향해 도전할 수 있어야지요.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을 보세요. 그는 출세의 길을 환관장(궁정관리인, 내시)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왕이 자신들을 잘 봐주어야 높은 직책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니엘이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그는 마땅히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도 돌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삶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호세아 4장 6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세상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없어서 어떻게 된다고요?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길 힘조차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예언자”라 불렸던 에이든 토저(A.W. Tozer, 1897-1963) 목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바로 알자(The Knowledge of The Holy)”에서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상은 하나님에 관한 사상이며, 어느 언어 체계에 있어서든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낱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낱말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만 가지 현세의 문제들에서 구제를 받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많이 알되, 바로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하나님을 더 바르게 알 때, 토저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는 만 가지 현세의 문제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시카고의 유명한 무디기념교회의 담임목사인 어윈 루처(Erwin Lutzer))가 쓴 “실패한 인생,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는 낸시 스픽겔베르그의 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입니다.
“주님, 저는 저의 빈 잔을 가지고/
사막을 가로질러/
당신께로 천천히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저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 줄/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뛰어갔을 것입니다.”
이 시의 내용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만큼 하나님을 더 신뢰하지 못한 삶-그것이 우리의 삶이지는 않습니까?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수준 있는 신앙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선글라스는 눈부신 햇살을 차단하기 위해서 짙은 색의 렌즈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느끼는 눈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짙은 색깔의 렌즈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이 좋은 사람이야 별 문제 없지만,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시력에 맞게 렌즈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정시력이 1.0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정시력이 0.1이라면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렌즈를 우리의 눈이 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교정시력이 1.0은 나와야 합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도전하며 해쳐나가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게 해주는 렌즈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수준 있는 신앙인답게 생활해야 한다.”-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앙도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 수준 있는 신앙입니까? 우리 교회처럼 훌륭한 시설이 마련된 곳에서 신앙생활하면 저절로 수준 있는 신앙인이 됩니까? 서울의 어떤 교회처럼 교인의 상당수가 힘 있고 부자인 사람들로만 구성된 교회를 다니면 수준 있는 신앙인이 됩니까? 여러분, 아니라는 거-다 잘 알시죠? 수준 있는 성도란 그가 다니는 교회의 사이즈와도 상관없으며,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수준 있는 성도란 본인 스스로가 수준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가 수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감독관(환관장 밑에 있는 하급 관리)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감독관은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너희도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그러면서 열흘 동안 테스트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것을 보고 결정하자고 아주 자신있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과 15절 말씀을 다함께 보겠습니다. “14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15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누가 이겼습니까? 그래요. 다니엘이 이겼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 한 다니엘이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로 하여금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긴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그래요. 다니엘과 그이 친구들을 감독하던 사람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수준 있는 신앙이란 믿음대로 삶아감으로써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앙입니다.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입니다. 믿음대로 살아 가정을 변화시키고, 믿음대로 살아 사회를 변화시키고, 믿음대로 살아 학교를 변화시키고, 믿음대로 살아 일터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의 자리가 되는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이것이 수준 있는 신앙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수준 있는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중세 수도사들 중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은둔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세속적인 삶을 거부하며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본인의 신앙 성숙만을 위해 기도원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은둔생활을 통해서, 또 금욕적인 삶의 태도를 통해서, 혹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영적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수준 있는 신앙이라면, 기도하여 성령 충만해지고 그래서 가정을 변화시키고, 기도하여 믿음을 굳게 하여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여 일터와 직장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다니엘은 자신의 믿음을 통해서 감독관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다니엘이 처한 상황이 누군가를 변화시킬만한 환경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가능한 환경이었습니까?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칠만한 환경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엄연히 포로였습니다. 포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과거에 그가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지금 다니엘이 처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귀족이긴 했어도 감독관만도 못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아람 군대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 집에 있는 종중에 히브리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 소녀는 문둥병에 걸려 절망에 빠진 자신의 주인인 나아만에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여러분, 이 여종의 모습을 보세요. 살아 있는 믿음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면 병이 낫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좋아야만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로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다니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믿음을 보고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조지 포먼(George Foreman)을 아십니까?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내주기 전까지 연속 40승의 기록을 세우고, 은퇴 10년 후 다시 권투계에 복귀해 45세의 나이에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의 기록을 세운 조지 포먼 말입니다. 여러분, 그가 왜 다시 권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포먼은 청년 시절, 대단히 난폭하고 성미가 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그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 포먼은 건방지고 못된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포먼은 복음전도자로 십여 년간을 섬겼습니다. 특히 텍사스 주의 휴스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지었고, 그 다음에는 거리에서 마약과 범죄로 떠도는 청소년들을 복음으로 선도하고자 청소년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일을 시작한 포먼에게는 복음 사업을 추진할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먼이 권투에 재도전했던 이유이자, 결국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나 제약된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니엘에게는 당대의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이 제약된 요소였습니다. 포먼에게는 45세라는 나이가 제약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제약된 요소가 있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약된 요소가 있기는 했어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철저하게 믿음으로 나아갔고, 결국 그들은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제약된 요소가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도 수준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전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름철 강렬한 태양빛을 차단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써야 하듯,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은 신앙의 선글라스를 써야 합니다.
신앙의 선글라스의 렌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선글라스를 쓰되, 수준 있는 신앙을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수준 있는 신앙이란 변화시키는 신앙입니다.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조건이나 상황이 좋아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로 설 때에 가정을 변화시키고 일터를 변화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선글라스를 씀으로써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