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만에 대한 책망 ( 4 : 6 - 13 )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본문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요긴한 점을 충언한 것이다.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바울뿐아니라 아볼로와 고린도 교회의 성도 모두가 겸손해야 한다.
바울은 남을 경고할 때나 비난할 때, 언제나 자신을 포함하여 말했다. 참된 지도자는 거룩한 자리에서 죄인들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죄인에게, 같은 심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상대방을 도우려할 때는 호소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비판적 태도가 아닌 동정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고전 4 : 6 본을 보였으니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
바울과 아볼로의 모범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과 칭찬만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 것은 바울 자신의 교훈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교만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여기서 '본을 보였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메테스케마티사'(*)는 '적용하다', '변형시키다'(빌 3: 21) 또는 '변장하다'(고후 11: 13-14)의 뜻으로 사용된 '메타스케마티조'(*)의 능동태로서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의미가 있다.
* 빌 3: 21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고후 11: 13-15 -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규범을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에 적용(適用)시켰다.
바울이 앞에서 사용한 여러 비유에 의하면 그들은 때로 심는 자와 물주는 자(3: 5-9), 터 닦는 자와 건축자 등과 같은 협력자로서의 공동체적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질 칭찬을 의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지도자적 자질을 더욱 빛내준다.
또한, 규범을 자신들에게 적용했다는 바울의 변호는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분쟁이 선한 사도들(예를 들면 구체적인 언급이 생략됨. 베드로와 같은 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의 당파 싸움을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이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J. Calvin).
2]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기록된 말씀'(*, 게그랖타이)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하여 바울 자신이 본 서신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모든 교훈(1: 10, 30-31, 3: 16-21)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교만하지 말며 겸손할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구약성경 말씀을 의미하는가?
* 잠 16: 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잠 22: 4 -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 사 57: 15 -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취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훈한 것 중에 인용한 말씀이 많고(1: 19, 31, 2: 9, 3: 19-20)뿐만 아니라 본 절에서는 '우리에게 배워'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이란 바울이 본 서신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온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Harris).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바울 사도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3]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자화자찬(自畵自讚)과 교만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한다.
특히 '교만해지다'를 뜻하는 헬라어 '프쉬시오오'(*)는 다른 곳에서 오직 한 번만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골 2: 18) 본 서신에서는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18-19절, 5: 2, 8: 1, 13: 4 등).
* 골 2: 18 -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여기서 교만은 스스로 '자랑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바울이나 아볼로)를 자랑함으로써 서로 속에서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분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를 자랑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또 하나에 대한 시기와 멸시는 자신도 해결할 수 없는 파벌 싸움에 휘말리게 하였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쟁과 파벌을 초래한 교만을 말씀 안에서 잘라내는 일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하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도는 그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자랑해서도 안 된다.
종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성도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역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만은 타고난 인간 본성의 큰 결함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