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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그리움의 형상적 자아화
정진실론1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표출’이 아니라 ‘표달’
‘바다’를 ‘하늘’로 치환함으로써 일상적 자아에서 내포적 자아로 돌아온 시인은 시적 영감에 사로잡혀 사물의 속살을 환히 들여다본 걸까. 시인은 심안을 가지고 밤의 물상을 직관하고, 어둠의 세계에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그는 생동하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물상의 감춰진 비의를 날카롭게 간파한다. 정진실, 이 남자가 현상학적 주체가 되어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와 풍경은 낯설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자아가 창조해낸 생산물은 예사로울 수가 없다. 이제 기장에서 ‘봄밤’이란 말은 정진실의 언어처럼 회자될 것이다. 그의 시는 미적 진보와 동시에 미적 정서를 지향하고 있다. 오늘날 부산시단에 편재된 불만 중의 하나는 미적 울림구조에 대한 무관심이다. 부산 시인들 중에는 미적 진보나 미학적 창작논리에 무심한 이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 메시지를 표달시키려 하지 않고 표출하려는 경향이 있는 건 인정해야 할 사실이 아닌가. 정진실의 <봄밤의 바다는 하늘이 되었다>란 시집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분석 도구가 될 수 있겠다.
정진실 시의 주제 지향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두 가지 물음에 닿아 있어 이 시집은 한마디로 이상적이다. 그는 시작에 임하여 본성 차원에서의 인간 존재해명의 문제는 물론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순수의식에 천착함으로써 통시적이면서 공시적이고,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리고 초월적이면서 당대적인 미의식의 울림을 만들어낸다고 하겠다. 루카치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범주를 지닌다.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를 자아화하고, 동일성의 추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실의 시적 특성이며, 예술시학의 전개다. 평자 또한 정진실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정체를 탐색하고, 이 양자가 어떻게 예술적으로 합일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봄으로써 정진실 시의 참모습에 다가서려고 한다. 시 속에서 생성된 미의식은 시인이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관조 속에서 획득한 철학적 울림의 멋과 힘이 아니겠는가.
시는 시인과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이다. 이 시집의 시작품을 통독하고, 필자는 어느새 그가 다듬고 있는 삶의 진실성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봄밤의 바다를 하늘로 치환하여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한 시적 구축은 우리에게 풍성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 감동의 고지에 오르기 위해, 그리고 도예가, 건축가, 음악가, 문학가로서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멀티 아티스트와 조우하기 위해, 필자는 시의 숲을 창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수학과 출신 시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의 시는 서정시학의 힘을 업고 문학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이 시집과의 치밀한 비평적 조우를 통해서 이제부터 정진실 시의 정체와 시적 울림의 메커니즘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II. 생명현상의 숙고, 못다 핀 그리움의 시학
사랑1
나는 당신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2
오늘은 당신이 좋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사랑 3
오늘은 하늘에 당신을 그렸습니다
어제는 하늘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이 연작시는 정 시인의 시집 제1부에 실려 있는 단시 3편이다. 그러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당신’, ‘오늘-어제’, 그리고 ‘하늘에 당신을 그렸다-하늘에 당신이 있었다.’라는 대립어가 환기하는 의미가 사랑의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평이한 언술로 된 것 같지만 시의 풍부한 내포성에 힘입어 시적 성취에 성공하고 있다. ‘사랑’의 어원은 ‘삶’이다. I부 첫 시로 사랑 연작시를 배치했다는 것의 의미는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리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시의 감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미적 구조다. 세속적 사랑은 ‘때문에’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사랑2>에서 ‘오늘-어제’ 즉 현재의 심정을 과거에 연결시켜 변함없음으로 가져가서, <사랑3>에서는 ‘하늘’이란 영원적 존재를 끌어와 자신의 사랑이 불변함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는 치환의 예술이다. 목표물을 객관적 상관물로 환치시키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시인은 두 줄 시를 정반합의 변증법적 전개를 통해 화룡점정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꿈꾸는 눈동자를 가진 시인이기에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고, 하늘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을 몽상하는 서정적 자아임에 틀림없다. 공자의 ‘사무사’를 생각나게 하는 사랑시는 시인에 내재한 맑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상태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셀리가 말한 ‘가장 행복한 최선의 마음이, 가장 행복한 최선의 순간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연작시는 언뜻 단순해 보이고 직설적인 언술로 비치지만, 그러나 시인의 내면에 걸린 사랑의 풍경은 직정이 물화 내지는 감각화로 구축되고 있어 사랑의 진실을 문학적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하염없이 밤하늘을 쳐다봄은
별을 셈이 아닌
저 달이 님을 닮은 까닭이며
매화 가지 긴 달 그림자는
떠나가는 님의 모습으로
더욱 그리웁고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은
매화의 설움에 떠나가는 님을 보는 듯한
서쪽 하늘 저 달이 저물지 못한 까닭이다
- <그리움> 전문
이 땅의 하늘을 찬연하게 수놓은 별 같은 정 시인의 시 속에 내재한 시의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현대시는 이미지다’라는 시론의 본질적 명제에 동의할 것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체험은 이미지를 산출하지만 이미지의 조립이나 구성 여부에 따라 시의 맛이나 시의 우열이 좌우된다. 정진실의 시집 1부에 나타나 있는 시의 제목을 보면, 제목이 주제 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모든 제목이 주제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제재를 시의 제목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각각이 갖는 양가적 가치를 두루 추구한다. <그리움>의 경우, 주제가 제목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도 시적 형상성이 약화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그의 시작법은 독자와의 소통에 방점을 찍을 때는 주제를 제목으로 놓고, 긴장에 포커스를 두고 자신의 의도를 내면화시키고 싶을 때는 제재를 제목으로 활용하는 등, 탄력적인 작명법을 구사하고 있다.
좋은 시는 상식을 깨는 새로운 발상에서 나온다. 자아의 내적 체험을 통해서 형성된 주관적 정서는 사물에 대한 낯선 반응에서 빛을 발한다. 하염없이 별을 쳐다보는 것은 별을 세는 것이 아니라, 저 달이 님을 닮은 까닭이라는 시인의 언술은 그리움의 원천인 님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정서의 표출인 것이다. 시인은 ‘별’을 ‘달’로, ‘달’을 ‘님’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정서를 양식화하여, 인식에 대한 한 방편으로서 사물의 이동을 잘 활용하고 있다. ‘떠나가는 님의 모습’을 ‘매화나무 긴 달 그림자’로 시각화한다든지, 메타포를 구사하여 정서를 스타일화하는 이런 노력들은 그의 시를 본질적으로 시답게,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지닌다고 하겠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잠을 이루지 못함’을 ‘달이 저물지 못함’으로 이화하는 언어미학적 배열은 정 시인의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햇살 시들어 먼 데서 삭풍은 불어오고
첫서리 내리던 밤
재 넘는 걸음으로 너는 멀리 갔다
남겨진 자국 가슴에 담아
나는 볏단처럼 누워 소처럼 울었다
쨍쨍하게 맑고, 바늘처럼 차가운 아침
아픈 가슴으로 쳐다보는 하늘에 너는 있어
불러보는 나는 왜 이다지도 서러운가
너 없는 하늘 아래에서도
나는 입을 벌려 꾸역꾸역 먹었다
몸 속 깊은 곳에 뜨거움은 있어
산맥 같은 뜻을 세워 나는 살아가며
너를 그리다
너를 그리다가
다시 첫서리 내리는 밤이면
또 다시
너를 그리워하리
- <첫서리> 전문
‘꽃잎 떨어진 후 꽃이 예뻤음을 알았고/ 너가 떠나간 후 너를 사랑함을 알았다’ 는 아포리즘적인 언술시 <후회> 뒤에 놓인 <첫서리>는 시 창작은 결국, 언어가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을 증명하며, 언어에 대한 영원한 첫사랑이 시창작임을 말해준다고 할 정도로 시인은 언어 기호 자체에 모든 에너지를 다 집중시킨다. ‘재 넘는 걸음으로’ 간 님을 보내고, 시적 화자가 ‘나는 볏단처럼 누워 소처럼 울었다’는 이런 구절은 어느 시의 명구보다 더 절절하고 감동적이다. 이 강렬하고 지독한 정서는 사태나 사건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반응이 없다면 어찌 생겨났겠는가. 그렇다. 시적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태도와 역사적 자아가 세계를 만나는 태도는 이렇게 확연히 다른 것이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세계를 객관적 상관물로 전이시켜 지극히 주관적으로,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다’ ‘그리다가’ ‘그리워하리’로 전개되는 서술어의 종결어미에서 상실과 부재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강력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구월 가고, 시월쯤에
뒷산으로부터 소슬한 바람 한 줌 불어오면
문득 생각나는 이름
떠오르는 얼굴 하나 있으니
잊어도 아주 잊은 건 아니었나 보다
생명 있는 모든 것
한 아름 햇살 아래 여물어 가는데
너 없는 계절은 비어 있어
공허한 마음은 나의 것이고, 너의 것이다
시월엔 지리산을 걷겠다
긴 능선 따라따라 걷다가
너가 하듯 낙엽 한 잎 줍고
많은 별, 더 빛나는 벽소령에서는
너의 별을 찾겠다
- <시월엔> 전문
정진실의 시는 전-중-후의 구분이 분명해서 좋다. 정 시인은 시의 첫 행에 중심 의미를 놓기보다는 시상을 써내려가면서 변죽을 울리며, 시의 중심 이미지를 마지막에 가서 훔치는 전략을 구사한다. 시의 무게 추가 후반부로 기울면서 시가 점층적 구조를 띤다. 그는 늘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이미지화시키고자 한다. ‘소슬한 바람 한 줌’, ‘떠오르는 얼굴 하나’ 등의 이미지가 서로 결합되어 인과 관계의 연쇄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생명이 있는 건 여물어 가는데’, ‘너 없는 계절은 비어 있어’와 같은 대조적인 관념 연상은 경험적 자아로서 시인이 느낀 그리움의 심사를 표백하고 있다. 중간부로 오면서 시인과 대상과의 거리는 다소 밀착된 듯 보이나 다시 후반부로 가면서, 시인은 ‘너가 하듯 낙엽 한 잎 줍고’ ‘많은 별, 더 빛나는 벽소령에서는 너의 별을 찾겠다’고 한다. 이 시는 전반부 ‘한 줌’, 중반부 ‘한 아름’, 후반부 ‘한 잎’으로 이어오다가 마지막 행에 가서, ‘많은 별, 더 빛나는’ 등의 어구로, 한 대상에서 한 대상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는 상승의 수량 범주가, 대상과의 미적 거리를 유지한다. 구체어인 ‘얼굴’을 투명한 언어인 ‘별’로 치환시킴으로써 시인은 엄청난 의미와 정서적 증폭 현상을 일어나게 한다.
생강나무 꽃 따다 말린 진한 향기
그리움 쌓이듯 노랗게 쌓이고
숨긴 기다림 꺼내 불러보는 그 이름은
이다지도 향기롭게 서러웁나
달 하나 걸린 먼 산
진달래는 피어 길게 누운 산의 소리 젖어 있다
하늘의 강엔 구름 흐르고
구름 사이 언뜻언뜻 별과 같이
솟구치는 그리움 고운 체로 걸러
생강나무 꽃 진한 향기
먼산 너머너머
바람에 실어 보낸다
- <생강나무 꽃 2> 전문
정진실의 시 감상에 있어서 즐거움은 절묘한 은유를 보는 데 있다. 은유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사유를 너머 직관과 상상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숨긴 기다림 꺼내 불러보는’ ‘길게 누운 산의 소리 젖어 있다’, ‘그리움 고운 체로 걸러’ 등의 표현에 내재된 은유 구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새로운 합일된 통일체를 추구하려는 것이 시적 한 지향이라고 보면, ‘그리움 고운 체로 걸러’라는 ‘낯설게 하기’는 시적 세계로 회귀하려는 유효한 장치라 볼 수 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그리움의 세계를 체로 걸러 냄으로써, 감각적 대상화는 물론 비가시화의 불편함을 일시에 극복해낸다. 화자의 그리움이, 숨긴 기다림 꺼내 불러본다는 명유적 사유에서 발전하여, 구름 사이 언뜻언뜻 ‘별’로 암유됨으로써 독자에게 정서적 미감을 느끼게 한다. ‘언뜻언뜻’, ‘너머너머’ 등의 의태어의 적절한 활용도 적재적소에서 생동감을 자아낸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이동하는 은유적 사유는 그리움의 관념을 시각화하고 있어 시적 성취를 돕고 있다.
당신의 별을 떠나온 지 수천 년
이제는 당신 생각 않고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그런데, 모든 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당신의 별나라나
이 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소
이 별, 인간세상에서
사랑 아닌 온갖 감정을 배워버렸소
다시 당신 별나라로 돌아갔을 때
증오, 시기, 질투, 미움 등의 감정이 나타날까 두렵소
당신 별로부터의 신호는 너무 약하고,
오늘은 당신 별의 거리만큼이나
더욱 당신 그리워
안테나를 더 높이 세웠소
- <당신의 별> 전문
거듭 말하거니와 서정시는 세계 혹은 사물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되, 그 만남은 매우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용시 <당신의 별>은 별에 대한 화자의 감흥을 극히 주관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화자가 초인적인 존재가 된다. 이 시는 현실적 상황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를 보인다. 즉 이 시의 화자는 현실 세계를 자신이 꿈꾸는 환상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성취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안타까운 정서로 노래하는 이 시는 화자가 그대와 헤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그리움을 ‘별의 거리만큼’으로 시각화하며, 가시화한다. 예술은 비가시성의 가시화를 목표로 한다. 정진실의 시는 예술의 목적인 ‘보여주기’를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는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이런 상황에서 신호가 약해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화자의 이미지는 더욱 안타까운 정서를 일깨운다. 이룰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꿈꾸는 시적 정황이 서정적 비전을 투영하면서 문학적 성취를 견인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장다리 꽃 필 적
가슴속 그리움 끄집어 내지 않아도
너를 보면 무언가 그리워졌고, 내 마음은 흔들렸다
공중 왕국 거미는 삼킨 것 중 독한 것들을 모아 이겨서
질긴 줄을 고등수학과 고등물리보다 더 높게
각각의 좌표를 정확히 찍어
묵혔던 말들을 배설하듯 뱉어내어
지옥의 문, 작품을 공중에 펼쳤다.
장다리 꽃 질 적
낮게 날아 잡지 않은, 잡을 수 없었던 너
떨어지는 꽃잎의 흐느낌에 맞춘
흉내 낼 수 없는 리듬
따라 할 수 없는 율동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며 너는 춤췄지
미안하구나
너를 탈출시켜 줄까도 생각했다
정확한 길이, 정확한 각도, 그리고 불규칙적인 펄럭임
거미의 과학성과 예술성을 파괴할 용기는 내겐 없었어
과학성은 몰라도 예술성을 깨뜨리면서까지
너를 구할 순 없었어
온 생을 통해 하늘하늘 춤추며 산 너는 축복받은 삶을 살았으니
너는 단지 몇 번만 애쓰다 포기하라
온갖 것들 중 사악한 것들을 따로 모아 독하게 만들어 펼쳤으니
너는 검은 바람의 흐름에 잘못 공명되었으니
너를 보고 새들도 한동안 울지 않았지만
먼 데서 너의 바람은, 너의 빛은 오고 있다
재를 넘고 강을 건너 집으로 가듯이
고샅 지나 삽짝 열고 집으로 들어가듯이
출렁이는 문을 지나 새 세상으로 가는 거야
가둬진 빛의 둑, 바람에 터지면
어둠의 나라로 너는 가리
빛을 타고 너는 가리
- <나비> 전문
문학평론가 구모룡은 ‘삶의 고통과 상실로 인한 슬픔을 경과하지 않고 사랑과 초월을 노래할 수 있을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수직적 초월을 감행할 수 없는 인간에게 슬픔은 영원하다. 도전과 투쟁으로 맞는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기원을 둔 슬픔은 시의 뿌리라 할 수 있다. 비가는 서정시의 기원이다’고 말했다. 정진실 시인의 시는 그리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움이란 슬픔이 전제되어 있는 감정이다. 그리움은 거리의 미학이면서 또한 어긋남의 미학이다. 그런데 어긋남의 미학은 잡을 수 없는 운명적 그리움에 기인한다. 극한적 그리움의 거리를 가둬진 빛의 둑, 바람에 터지면 어둠의 나라로 빛을 타고 가는 나비의 이미지로 그리움의 정서를 의미화한 것은 이 시의 주된 미적 기반이 의인화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슬픔과 그리움은 순환하는 감정의 양식이 된다. 여기서 그리움은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닿으려는 대상에 대한 갈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움이라는 관념적 거리가 구체적 대상으로 의미화되면서 공간적 거리로 또는 수량으로 생생함을 드러낸다.
봄꽃 스친 바람은
노파의 가슴에 스미었다
가슴 속 꽃바람은
그리움과 버무려지고 숙성되어 뱉어져 버렸다
‘염병할...
진달래는 붉게 지랄같이 피어가지고...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생전 좀 덜 좋아할 걸’
찔레꽃은 희게 또 필 테고
노파의 봄은 길었다
- <노파의 봄> 전문
봄은 가고 지랄이야
사내는 떨어지는 꽃잎 한 잎에
가슴 아파하는데...
뒷산 할미꽃 아직 시들지 않았는데...
나의 봄은 가고 가서
남은 봄은 몇이더냐
머물 사람 머물고
떠날 사람 떠나는 날
말소리와 숨소리
들숨과 날숨 사이에
꽃 지는 소리 있었다
- <봄은 가고 지랄이야> 전문
봄을 맞는 노파와 소년의 심사를 피고 지는 꽃잎에 잘 비유하며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란 칭호를 받으려면 적어도 인구에 회자될 수 있는 개인적 상징 하나는 빚어내어야 한다. 김용택을 섬진강 시인, 서태수를 낙동강 시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섬진강이나 낙동강의 이미지를 통해 독창적인 상징을 빚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진실에게 있어서 상징은 하나의 작품에만 나타나는 단일한 상징이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특수한 의미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정진실도 그의 여러 시에서 ‘봄’이라는 이미지를 특수한 의미로 두루 사용하고 있다. ‘봄’이 구체어로 드러나지 않아도, 시인은 ‘꽃 필 무렵’ 등의 어구로, 봄을 그리움의 관념이 앉아있는 시공간으로 그려낸다. 이들 시는 ‘봄’을 통하여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환기하는 것이다. ‘사내는 떨어지는 꽃잎 한 잎에 가슴 아파하는데’도 봄은 어김없이 지나간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과 사람의 마음은 유동성을 특성으로 하고 있다. 시인은 노파와 소년이 맞는 봄의 의미와 깊이를 각기 달리 그리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에 따른 방황을 잘 보여준다.
아침은 싱싱하여 팔딱거리고
소금에 절여지듯 오후는 시든다
그 속 하루에 담겨진 사람들도 팔딱거리다 그렇게 시들어진다
하지 하오 이시二時 해는
초승달보다 외롭고
그믐달보다 고독하다
별들은 밤을 도와
부유浮遊의 것들과 엉켜진 소란을 침전 시켜
그렇게 밤의 적막은 온다.
아침 해는 태초의 순결 같아 신비로운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아야 하나
하루에 문이 있어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을 수 있다면
때론, 한 며칠 닫아 두었다
묵혀 숙성된 날들을 갖고 싶다
- <하루> 전문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된다. 세월은 그렇게 영속적이다. 시인의 ‘하루’에 대한 단상은 참으로 비장하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물음은 ‘하루’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될 것이다. 시인의 하루에 대한 단상은 존재의 무거움을 반추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아침 해는 태초의 순결 같아 신비로운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아야 하나’라는 표현은 유한한 삶에 대한 한계성에 불만을 보여주는 인간의 본질적 의문이고 반문이다. 하루에 문이 있어서 ‘한 며칠 닫아두었다가’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는 영속되지만 인간에게 하루는 한정된 시공인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의 의미는 하루의 길이에 달려 있다. 하루의 시간을 늘려 잡으면, 적어도 도식적으로 인간은 좀더 오래 살 수 있다. 그는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시인은 존재들의 공생적, 상호 의존적 생명 네트워크의 질서 속에 존재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잘 보여주었다.
지나간 한 해의 상념은
농축하여 생의 퇴적층에 쌓아 두고,
철새의 군무群舞에도 어지럽지 않도록
흩어진 생각을 주워 모아
너무 크지 않은 소수素數를 만들어
그 단단함을 닮아야겠다
찬바람 더욱 세차게 부는 날엔
너의 안부가 궁금해
따뜻한 소식을 전하듯 군불을 넣고
문살에 흐르는 어둠을
살짝 밀어낼 만큼만의 촛불을 켜
흔들리는 불꽃 너머의 어둠을 보겠다
- <12월> 전문
시와 현실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시인의 시론은 달라진다. 시가 자율성을 지니지만, 아무래도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시의 환경이 변하면 시도 시론도 거기에 맞게 반응해야 한다. ‘소수의 단단함을 닮아 문살에 어둠을 살짝 밀어낼 만큼만의 촛불을 켜 흔들리는 불꽃 너머의 어둠을 보겠다’라는 시구에 나타나 있는 상징들을 현실과 밀착시켜 이해하면, 시적 화자는 ‘너’라는 타자에 주목하고, 안부를 놓치지 않는 지성인이다. 시인은 현실을 보다 정직하게 직설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시적 언어로 가공하여 서정적 자아가 되어 현상학적으로 본다. 이런 시인의 타자지향성과 현상학적 환원은 우리의 이웃과 연결 없이 고립되고, 소외된 타자에 대한 우리 시단의 무관심주의에 대한 각성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겠다. 삶의 아픔이나 얼룩, 상처가 그대로 묻어나는 생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언어는 세련되고 정련된 활어로 승화, 정화, 그리고 순화되어 시숲에 나타나고 있어 감동을 배가하는 것이다.
훌찌 지게에 지고
늙은 소 앞세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여서
소작농도 아프지 않았다
일요일의 시골 소년은 도시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지랑이 봄 햇살
소년은 더는 소를, 아버지를 뒤따르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린 일손보다
들꽃 핀 더 넓은 들판을
커가는 아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걸
논일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소년은 아버지 나이가 훨씬 지나도록 알지 못했다
소년은 다시 소년이 되어
봄의 들판으로
소를,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 <소년 2> 전문
나는 종이고 싶다
야윈 몸뚱아리 부서지며 토해 내는
깊음이고 싶고
멂이고 싶다
한 번의 울음으로
땅 속 깊은 곳의 순수 끌어내어
세상의 온갖 거짓 날려 버리고
배설되지 못한 것들 토해내는 울음이고 싶다
흔들리며, 몸부림치며 울리는 소리이고 싶다.
엎드려 산 자들의 빈 곳의 기억을 일깨우는
때론 부드럽고 맑은
때론 절규하는 소리이고 싶다
구부러진 것 바로 펴 하늘을 열고
가난한 자 살고 있는 먼 곳까지 울리는 희망이고 싶다
하늘과 땅의 기운 모아
뭇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고 싶다
= <나는 종鐘이고 싶다> 전문
정진실 시인에게서 <나는 종鐘이고 싶다>가 차지하는 시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뭇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고 싶다’는 기도와 소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그 하나는 언술 그대로의 의미로 헌신의 삶 속에 자신을 존재하게 해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시가 미적 울림통을 가져서 힘의 문학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별개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를 성찰하고 외부의 더 큰 세계를 사유하는 시적 성숙을 지향한다. 이 시 속에서 필자가 발견한 외재적 특성은 시적 진보다. 바로 ‘구부러진 것을 바로 펴 하늘을 열고’라는 언술은 작가정신의 표백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성찰을 통하여, 열린 시인의 시적 지평은 ‘구부러진 곳’에서 더욱 확장되어, 기필코 ‘세상 바로 세우기’로 심화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구부러지고, 닫혀 있는’ 타자들의 공간이다. 시인은 타자-되기를 통해, 우리-되기의 무위인이 되려 한다. ‘시궁이후공’의 시학은 <소년2>에서 만나는 경험과 다르지 않다. 괴테가 ‘신의 세계는 예술이 없다’고 한 것은 <소년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소년은 다시 소년이 되어/ 봄의 들판으로/ 소를,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는 후반부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성년이 되어 유년 시절에 알아채지 못한 ‘아버지의 꿈’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와 ‘아버지’의 원형을 찾아가며 시인은 비로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III. 울음과 울림의 미학
꽃피는 봄날의 낭만파이지만,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쓴다. 통찰과 성찰의 결과로 피어난 정진실의 시집 <봄밤의 하늘은 바다가 되고>는 님을 향한 격한 그리움과 타자를 향한 배려의 철학이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그리움이 질퍽거리는 시숲을 거닐다 보면 꽃이 피고 지는, 개화와 낙화의 양가 감정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슬픔이 비가가 되고 때로는 연가가 되어 처연한 서정의 물로 뚝뚝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의 시는 생명의 원초성으로 인해서 온몸이 달아오르는 뜨거움도 넘쳐 난다. 그리움에로의 몰입과 극복이 상상력으로 변용되고 있음은 시적 태도가 기본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정진실이 구축한 그리움의 시학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 그렇게 높아진 삶을 타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구부러진’ 세상에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뿐만 아니다. 외재적 원리인 미적 진보정신이 간간이 시행에 수놓아져 있어 안심이 된다. 타자철학을 문학적으로 치환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표달하려 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시인’으로서 불릴 수 있는 바탕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랑 없이 인간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인간과 인생의 문제에 천착해 그리움의 시학을 구축해내었다는 점에서 그는 문학시의 큰 줄기를 기장에 나아가 부산에 심어놓는 데 크게 기여한 시인이라 하겠다. 한 작품집의 문학적 성취만으로 그의 문학적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의 시가 형상성의 완성을 통해서 한국시의 전통과 품격을 격조 있게 계승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본다. 그리움이 날카로운 촉수가 되어 ‘울음’이고 싶고, ‘울림’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살아 있는 한, 그는 시인으로서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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