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9] 장덕희(張德姬) - 눈물 속에, 감사 속에 1. 뿌리째 흔들린 42년 신앙 - 2
8 그래서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여보시오! 당신 한국 사람이지요. 통일교회를 믿으시오. 알아보시오” 하고 호소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을 꾸려 나가기가 벅찼다. 4남매를 키우기 위해 26명의 하숙생을 받아 하숙비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57년 7월에 전국적으로 하계 40일 전도가 실시되었다.
9 120여 명이 전도사로 파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전도사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나이가 52세였다. 40일 동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장만해 두고 충북 제천읍으로 개척 전도를 나갔다. 차에서 짐을 내려놓고 서성거렸다.
10 한 학생이 다가왔을 때 나는 그 학생에게 방 한 칸을 얻을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어렵지 않게 방을 얻고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제천 농고 3학년 김택수 군이 학생들을 많이 전도하기 시작하여 9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11 그래도 나는 계속 전도해 주기를 강조하면 “선생님은 왜 방이 비좁은 줄 알면서도 계속 전도해 오라고 하십니까?” 하고 항변하기도 했다.
12 방이 비좁아 3천 원짜리 월세방을 얻어서 집회를 계속했다. 인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방 한 칸에서 전체가 앉아 집회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13 그래서 협회에 편지를 띄웠더니 1만 5천 원을 보내주셨다. 집회소로 2칸 방을 얻었다. 계획했던 40일이 눈 깜빡할 사이였다. 새사람들에게 내가 느꼈던 감격을 전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생활 자체가 감격된 생활이 되어서 지칠 줄을 몰랐다.
14 내가 전해 준 한 마디가 죽어 있는 심령에 등불이 된다는 생각을 하니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4남매가 전도 나간 엄마를 얼마나 기다릴까?’ 집안 생각이 가끔씩 떠올랐으나 가정생활보다 전도 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기에 계속 전도 생활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