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위천고장종학(寧爲千古藏踪鶴)/불학삼춘교어앵(不學三春巧語鶯)'
'차라리 천고(아득한 옛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재잘대는) 꾀꼬리(앵무새)는 되지 않겠다.' 한암 스님이 50세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 오대산 상원사로 떠나면서 지은 법어이다.
초대종정 한암 대종사께서는 왜정시대에 불교가 억압되고 또한 왜곡되고 국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수난을 겪는데 당시 불교계가 불교말살 정책에 대하여 항거하거나 포교하고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상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강남 봉은사 조실 소임의 직책과 상궁들의 공양을 거절하시고 가사와 장삼. 주장자만을 들고 오대산 상원사로 가십니다. 스님은 ‘영위천고장종학(寧爲千古藏踪鶴) 불학삼춘교어앵(不學三春巧語鶯) -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시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평생 동안(27년) 산문 동구 밖을 나가지 않으시고 오직 수행과 포교와 후학을 가르치는데 정진 하셨습니다. 36년 동안의 식민지 사회에서 한국불교를 구하신 종정 스님입니다. <원행 스님 :불교 신문>
6.25가 터지고 이듬해 1951년 1.4후퇴 때 국군이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삼지 못하도록 불태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명령을 받은 장교가 문수전에 불을 지르려 하자 스님들도 모두 도망간 텅빈 사찰에 혼자 남아 문수전을 지키던 한암스님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니 불을 지르면 되고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니 절을 지켜야 한다." 스님은 문수전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채 "어서 불을 지르라"고 했습니다.
서릿발처럼 꼿꼿한 한암 스님의 기개에 눌린 장교는 법당 문짝 하나만 떼어내 불태웁니다. 연기만 내 불태운 시늉만 하고 철수합니다. 스님은 그렇게 문수전의 국보 문수동자상은 물론, 걸작 상원사 동종까지 불타버릴 위기에서 절을 구합니다. 반면 산 아래 월정사는 귀중한 선림원 종을 포함해 절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한암 스님은 상원사를 구하고 석 달 뒤 입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