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기 이전에도 그렇게 질문했다.
윤희경
“ 나이가 들어가니 건강이 최고인 것 같아요. 아프기 전에는 사람들이 아프면 다 필요 없어라는 말을 할 때 수긍은 하면서도 이렇게 절실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거지요. 옆에서 한 사람씩 먼저 가고 병원에만 다녀오면 어디가 안 좋다고 하더라며 약이 한가지씩 늘어나는데 마음이 찹찹해지네요. ”
자주 하는 말들이 알면서도 나의것이 될 때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유는 남의 말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게 쉽지 않음을 증거한다. 현대 사회는 정보의 바다이다. 설령 정보가 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필요하면 검색 하나로 많은 정보의 앎이 즉석에서 해결된다.
대화중에도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보다 먼저 핸드폰에 올려진 정보를 보여줌으로 시시비비의 빈도를 줄인다. 물론 틀린 정보가 올라온 정보의 양에 비례하지만 시비의 여부가 없는 단순한 질문들에는 명료하다. 예로 여기서 서울까지 얼마나 걸릴까? 물어보면 승용차로, 버스로, 지하철로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뜬다. 이러한 정보는 생활에 유익을 주고 편리성을 통해 인간의 움직임에 수월함과 시간 소모를 줄여준다. 이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한 의문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데 오랜시간 동안 인간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는 질문이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아주 본질적인 질문이다. 막상 인간이 쌓아온 역사 의 업적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가 AI와 공존하는 사회에 이렇게 빨리 살게 될줄을 4~5년 전 The Giver 라는 영화를 보면서 SF영화라고만 생각 했었다. 그런데 몇 년 되지 않아 우리는 더욱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정보의 그물망을 좁히고 인간의 능력을 최대치로 올리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질문들 “ 어떻게 살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들은 여전히 진행형에 있다.
모든 것을 완전체로 할 것 같은 정밀함의 극치 앞에 순간 던져지는 이야기 우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묻고 있다. 이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들이 던진 질문들이다 . 소크라테스의 글은 제자인 플라톤이 집대성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인간의 도덕성, 진실성 인간다움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을 추구하였고 그 대신 ‘살아 있는 책과 다름없는 제자들’을 남겼다.라고 회고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후대에 남기고 싶은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창설하여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시발점을 만들었다 .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화법으로 인간의 존제적 본질을 찾고자 하였고 이후의 많은 제자들은 이러한 출발점, 특히 탈레스철학자를 비롯하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지금까지 인간의 삶이 변화 해가는 초석이 되었다고 여긴다.
이러한 출발이 존재적 가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피타고라스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존재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점차 발전을 했다. 존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실한 근거를 찾아 고민하고 이를 찾는 작업은 베이컨의 철학, 즉 실험을 통한 결과로 눈으로 확인 하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많은 과학적 실험이 가능한 근현대를 거치면서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존재 즉 인간적 존제를 심리학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해 하려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최선의 추구는 과연 무엇일까?
반문 해본다 .
톨스토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더불어 사는 덕이라 했으나 현대는 점차 개인의 가치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시대로 선회하고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고민한 우리들의 고민이 과거로부터 배운지혜로 인간다움을 잃지않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