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전 12:9~14
제목: 모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키는 것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믿고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는 전도자가 말한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공동번역)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새번역)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현대인의성경) 이제 모든 것을 다 들었으니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전도서를 쓴 전도자가 내린 결론이며,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며,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불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중 그 본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며, 그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벌(永罰)에 처할 것입니다. 전도서를 쓴 전도자의 이와 같은 분명한 메시지 전달이야말로 전도의 전부이며 알파와 오메가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란 이름은 히브리 성경의 제목인 ‘코헬레트’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회중을 모으다’, ‘회중에게 연설하다’라고 합니다. 마치 설교를 연상시키는데 설교의 핵심은 청중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는 1차로 흔히 알려진 솔로몬이고 2차적, 확장적으로는 설교자(preacher)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그렇습니다.
전12: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NIV) And moreover, because the preacher was wise, he still taught the people knowledge; NASB) In addition to being a wise man, the Preacher also taught the people knowledge; |
전도자는 설교자로서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데요. 그 지식은 지혜를 담은 것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모든 사람의 본분)입니다.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
● 하나님의 지식이 문자로 기록된 책이 성경인데요. 성경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신약교회에서 복음서가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그 모습을 ‘상고(詳考)하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연구와 같지만 뉘앙스가 조금 더 센 표현 같습니다.
행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examined the Scriptures) 공동번역) … 날마다 성서를 연구하였다. 현대인의성경) …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
상고하다(=연구하다)는 영어로 examine인데요, 그 명사형이 examination 아닙니까? 믿음의 열의만큼이나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하는 간절함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생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시험보다 영원한 배수(倍數)로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현대의 설교자와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솔로몬) 사이에 유사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는 성경을 기록한 자입니다.
전12: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
현대의 설교자들도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할 수 있지만 진리의 말씀들인 성경을 정직하게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66권의 정경으로 완성된 후 추가로 성경을 쓰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이단이거나 무지한 자입니다. 현대의 설교자와 전도자는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이나 설교문을 작성하는 정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을 하고자 한다면 과대망상에 빠지거나 이단인 자입니다. 영감된(벧후1:20~21)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성경인데요. 그 말씀은 한분이신 목자,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전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
위 말씀에서 지혜자“들”과 스승“들”은 한분이 아니라 여러 명으로서 하나님의 지혜나 지식을 가진 사람들(왕이나 영적 지도자)을 의미하지만, “한 목자”는 인간적 존재가 아닌 절대자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목자”를 영어로 보면 한분이신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one 다음에 대문자 S로 표기했기 때문입니다(one Shepherd).
NIV) The words of the wise are like goads, their collected sayings like firmly embedded nails--given by one Shepherd. KJV와 NASB 등도 one Shepherd로 번역했습니다. |
지혜와 지식의 원천(源泉)이신 한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특심하게 믿고 쓰임 받는 지혜자“들”과 회중의 스승“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도 “한 목자”가 주신 영감을 받아서 전도서를 기록한 것이고 그 기록된 주장의 결론과 모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전12:13). 한편, 전도서 12장 본문(9~14)에는 아래처럼 조금 논조가 다른 구절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말씀도 나옵니다(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
전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
위 말씀의 아들은 솔로몬이나 전도서 저자의 친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말씀을 듣는 청중이나 독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경계를 받으라”를 심각하게 보면 안 됩니다. 한 마디 더 조심하라고 첨언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아들아,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다. 새번역) 한 마디만 더 하마. 나의 아이들아, 조심라여라. 현대인의성경) 내 아들아, 이 밖에 조심할 일이 있다. |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는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는 모를 수 있음을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부하자는 의미가 있다는 정도로 해석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첫 문단에서 오늘 본문의 요절(전12:13)과 제목은 살펴보았으니 넘어갑니다. 전도서의 결론이며 모든 사람의 본분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나중에 구원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겉모습이 아닌 은밀한 내면도 다 심판받지요.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공동번역: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신자들도 경외함에 참여하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은밀한 내면을 늘 성찰하고 추슬러야 합니다.
첫댓글 위에 있는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초신자는 그것조차도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급자 이상이나 시간이 많은 분들의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추가 댓글과 주석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전도서 12:8-12)
여기에서 솔로몬은 대단원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자기 청중들, 독자들을 설득시키기까지는 못내 고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즉 그들이 피조물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만족을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 안에서만 찾도록 하라는 절규로써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Ⅰ. 그는 자기의 주제, 즉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말한다(8절).
1. 그는 그 타당성을 완전히 증명해 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자기가 기획했던 목적을 충분히 수행해 냈다. 그는 본서에서 이 주제를 아주 열심히 고수하였으며, 그의 논리나 적용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2. 이 주제는 그가 타인들 및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고 타일러 교훈을 주고자 원했던 주제이다.
이 교훈을 준비하고 있다가 모든 경우에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공리가 매일 매일 그대로 증명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날마다 활용하도록 하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Ⅱ. 그는 신적 지시와 영감으로 이 주제에 대해 기록하였고, 그것을 우리에게 권장하여 우리가 진지하게 살피도록 해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말씀은 진실하며 우리가 매우 귀중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것은 회심한 자의 말씀이다.
참회 자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세상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으로부터 큰 일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체험하였고 이 경험에 의해 그는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방랑에서 거두어 들여진 자였고 자기가 배반하였던 바로 그 하나님께로 돌아온 코헬렛(coheleth:전도자)이었다.
참회 자는 "헛되며 헛되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의 허무 성을 확신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자기들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고 불평하던 죄의 짐을 조금도 편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까닭이다.
2. 이것은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지혜로왔고 비상한 양의 지혜를 부여받고 있었으며, 이웃에 명성을 떨치던 자였다. 인근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었다. 지혜로운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유능한 재판관이다. 그는 군주로서 지혜로왔을 뿐만 아니라 전도자로서도 지혜로왔다. 전도자들이 영혼을 획득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3. 그는 선을 행하는 일과 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을 자기 본분으로 삼았다. 그는 그 자신이 "지혜로왔기 때문에" 그 지혜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로부터 얻은 것도 아님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지식이 그 자신에게 유용한 것임을 깨닫고 타인들에게도 그 지식이 역시 쓸모있게 되기를 희망하여 "백성에게 여전히 그 지식을 가르쳤다." 백성에게 경건한 신앙을 잘 가르치는 것은 군주에게 이익이 되며,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그들에게 직접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이 임금에게 허물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백성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격려하는 것이 군주의 의무이다(대하 30:22). 가장 현명한 자나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더라도 훌륭한 지식을 교육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배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백성을, 즉 일반 하층민을 멸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그들의 지식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여전히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그는 노심초사하여 선을 행하려고 애썼고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는 그들이 열등한 우민들이고 자기는 매우 현명한 자라 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일만 하고 백성의 교육을 발굴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설교하였던 뭇 영혼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가 설교의 주제로 삼고 선포하였던 문제가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진 것인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읽는 것, 타인들에게서 듣는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이는 그 모든 것을 잘 갈무리해 두었다가 "자기" 지식의 "보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아울러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나 기록하는 것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 하나 엄선하고, 정확을 기하였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1) 그는 잠언과 경구를 택함으로써 가장 유익한 설교 방법을 취하였다.
잠언이나 짤막한 격언은 애써서 만든 장문의 미사여구보다 이해가 한층 용이하며 잘 기억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몇 가지 비유나 지혜의 말로 만족하여 했던 말을 몇번이고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든지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 "많은 잠언"이나 매우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3) 그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하고도 흔해 빠진 관찰만 한 게 아니라, 깜짝 놀랄 만한 일과 일상적이 아닌 희귀한 것도 "찾아 내었다."
그는 단지 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주은 것이 아니고 지식의 광맥을 따라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4) 그는 자기의 지식과 관찰을 생각나는 대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배열하였고 그것들이 한층 힘을 발휘하여 광채가 나도록 "순서대로 정돈"하였던 것이다.
5. 그는 자기가 해야할 말들을 윤색(潤色)하였다. 즉 그는 자기 말에다가 매우 즐거우리라 생각되는 아름다운 옷을 입혔다. "그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으니"(10절), 그 말은 곧 즐거움의 말이었다. 그는 좋은 내용이 나쁜 문체와 시시하고도 조화되지 않은 표현으로 인해 망쳐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다. 목사들은 호언장담이나 아름다운 말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말들"(원문의 의미는 그러함)을 찾으려고 연구해야 한다. 즉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교화시킬 수 있는 유익한 말씀이 곧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다(고전 10:33).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는 자들은 "적절하게 행해지는 말씀으로" 그 영혼을 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그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확실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믿어도 좋은 것이다. "기록한 것은 정직하며" 필자의 실제 느낌 그대로를 진지하게 반영한 것이고, 사실 그대로를 정확무오하게 표현한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인도대로 따라가는 자들은 절대로 그 길을 잃지 않는다. 만약 이 말씀이 "정직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아름다운 말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올바른 것을 지시해 주는 것보다도 자기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리는 것을 더 좋아 한다(사 30:10).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자기의 이익을 아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말씀"이 될 것이다.
7. 그와 딴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며 큰 유익을 줄 것이다. 그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해설 해 주면서 교훈할 때는 특히 유익할 것이다.
(1) 신적인 진리는 적절하게 적용하고 활용만 한다면 우리에게 이익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며,
의로 교육을 일에 유익하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극하여 의무에 충실하도록 하는 데에 유용하다. 그 말씀들은 쟁기를 끄는 황소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앞으로 나가게 하며, 그 걸음을 빨리 하도록 때리는 채찍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행 2:37),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태만하게 될 때 그들을 스스로 반성하게 만들며 자기 맡은 일에 더욱 활기있게 정진하도록 해 준다. 사실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애착심은 그처럼 맥빠지기 쉽고 냉각되기 쉬운 것이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찌르는 채찍"이 필요하다.
[2]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의무를 꾸준히 행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잘 동요하고 변하기 쉬운 자들에게는 "못과 같아서" 그들을 선한 것에 고정시켜 버린다. 그것은 둔하고 물러 서기 잘하는 자에게는 "찌르는 채찍 같고" 변덕을 잘부리며 엇나가기 잘하는 이들에게는 "못과 같아서," 마음을 확립시키고 선한 결심을 공고하게 다지는 방편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의무에 무관심하지 않게 되며, 그 의무에서 떠나게 되는 일도 없어진다. 우리 안에 남은 선한 것이 얼마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써
"확실한 곳에 잘 박힌 못과 같은" 것이다.
(2) 이와 같은 이익을 위해 신적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이 두 가지 등장하고 있다.
[1] 항구적 규준이 되는 성서에 의하여. 성서 말씀은 "지혜자의 말씀"이며 곧 "지혜로운 자들"이 듣고 일컬어지는 예언자들의 말씀이다(마 23:34). 이 말씀들을 우리는 인쇄해 두고 있어서 언제든지 그것에 의지할 수 있으며 "찌르는 채찍과 못"으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 성서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교육시킬 수 있다. 성서의 말씀들이 매서움과 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 영혼에게 오도록 하고, 그 감명이 깊고 오래 지속하게만 해 보아라. 그러면 "우리는" 성서로 인해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로와 질 것"이다.
[2] 목회에 의하여. "지혜자의 말씀"이 우리에게 한층 유익하도록 하기 위하여는 "회중의 스승"이 그 말씀을 통해 깊이 감명을 주고 단단히 못박도록 할 것이 규정되고 있다. 경건한 예배를 위해 모이는 엄숙한 회중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적 제도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교회의 훈도를 목적으로 한다. 회중은 이런 목적에 유용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회중에는 스승이 있어야 하며,
그 스승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목자로서 회중을 주재하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입이 되고 하나님께는 사람들의 입이 된다. 그들의 본업은 "지혜자의 말씀"을 고정시키는 것이며, 정문(頂門)에 일침(一針)을 놓듯 말씀을 "못"으로서 박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렘 23:29).
8.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이처럼 권장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여러 손을 거쳐(많은 "지혜자"와 많은 "회중의 스승")우리에게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 "한 분이 주신 것"이요 동일한 "목자자" 주신 것이다. 그 목자는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크신 "목자"이시다(시 80:1). 하나님은 바로 그 목자이시며, 그의 선하신 성령은 성서를 지으셨고 "회중의 스승들"이 성서를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와 같이 "지혜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이 말씀에 맡길 수 있다. 모든 목회자들은 바로 한 분이신 그 목자로부터 자기들이 전달할 말씀을 받아야 하며, 기록된 말씀의 빛을 따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우리가 만약 영감으로 기록된 성문서들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 성문서들은 우리를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딴 서적들을 탐구하느라고 피곤해질 필요가 없다(12절). "더 나아가서 이제 남은 것이라곤 네게 여러 책을 만드는(짓는) 데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1) 많은 책을 "기록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 "만약 내가 이제까지 기록한 것이 세상의 헛됨과 경건 생활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저술한다고 해도 너는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으로 내려 주신 성서를 이용해도 목표가 달성되지 못한다면, 지금 가진 것의 두 배가 있다 한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가진 책이 너무나 많아 온 세상이라도 그것을 다 수용할 수 없다고(요 21:25)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많은 책을 일일이 연구하고 많이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를 혼동시킬 뿐이며, 영혼을 유익하게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정도 주면 적당하겠다고 보신만큼만,
우리에게 적당하겠다고 보신 것만, 또 우리가 그것에 적당하겠다고 보신 것만 소유하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를 받지 않는 자들이 하물며 다른 책들에서 감화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인생 처세에 대한 책을 제아무리 많이 저술하며 많은 연구로 지쳐 버릴 때까지 많은 저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는 교훈보다 나을 수 없다.
(2) 많은 책들을 "사는 데"에는 끝이 없다. 여러 책을 사서 완전히 터득하며 많은 연구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을 통달해 버리는 데에도 끝이 없다. 학문의 욕구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학문은 인간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훌륭한 낙과 최선의 성공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말씀에 의해 세상은 헛된 것이며 딴 여러 일 중에서 인간의 학문 역시 허무한 것이고, 진정한 경건이 없이는 학문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엔 불충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훈계" 받지 않는다면, 슬프게도 그 학문에는 끝이 없으며 그 배움에 의한 실질 이득도 없을 것이다. 위대한 셀덴(Selden)선생은 자기가 읽었던
모든 책 가운데서는 자기 영혼을 편히 쉬게 할 그런 것이 결코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직 성서 안에서만 특히 디도서 2장 11, 12절에서 자기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면서 본문의 말씀에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장코뱅 매튜 헨리는 문단 나누기를 8절부터 한 것이 독특합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는 전1:2의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9절부터가 한 문단인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노베 공감해요. 성경도 9절부터가 한 문단이네요.
<매튜 헨리 주석> (전도서 12:13,14)
솔로몬은 본서에서 하나의 큰 질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탐구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이 행하여야 할 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전 2:3).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진정한 길은 무엇이며, 우리의 위대한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확고한 수단은 무엇인가? 그는 무익하게도 거개의 사람들이 열심으로 추구하는 일들 중에서 이것을 찾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는 하나님이 옛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을 발견함으로써(욥 28:28) 마침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진지한 경건이라는 사실을 찾아내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결론을 듣자"(우리 성경과 조금 차이가 있음) 이 결론은 탐구에 의해 채택된 답신(答申)이요, 이 꾸준한 탐색의 보고서다. 너희는 내가 시도해온 모든 것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여 섭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너희는 그 결론을 들어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 결론을 듣자"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설교자들도 자신이 설교하고 있는 청중 중의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인 자신의 말을 청취해야 하는 까닭이다. 남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는 선생들은
불완전한 선생이다(롬 2:21).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순수하고 귀중하나 어떤 말씀들은 이 말씀처럼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맛소라 사본은 신명기 6장 4절 말씀처럼 이 말씀을 대문자로 시작하고 있다. 솔로몬 자신도 "우리는 일의 결국을 듣자"란 말씀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그 말씀 앞에 "요 주의"(N.B: Nota bene 주의하라)를 첨부하였다.
여기서 다음 사항을 살펴보자.
Ⅰ. 종교(신앙 생활)의 요목(要目). 미심적은 논란이 따르는 모든 문제는 접어 둔다면, 신앙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1. 신앙생활(종교)의 근본은 마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의 위엄에 대한 존경이며 그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요, 그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즉 하나님을 경배하라. 내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을 막론하고 모든 참다운 헌신의 본보기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를 그에게 드려라(계 14:7).
2. 신앙생활(종교)의 규칙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는 그의 명령으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사 29:13).
따라서 우리는 그의 계명을 명심하고 준수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감정이 심중에 가득하다면 "그의 모든 명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그 명령을 지키고자 하는 주의력도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를 본분으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도 헛 일이 될 것이다.
Ⅱ. 이 일의 중요성. "이것은 사람의 본분"(전부)이다.
그것은 인간이 해야할 일의 전부이며 사람이 받는 축복의 전부이다. 우리의 전 의무는 이 말씀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의 전 위로는 이 말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관심사이며, 또한 인간의 주요하고도 계속적인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이며 그들의 모든 시간의 공통 과제이다. 인간이 부자냐 빈자냐, 귀하여 천하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느냐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문제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Ⅲ. 이일에 대한 설득(14절). 우리는 신앙심을 지닌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결과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 치러야 할 대가를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즉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육욕에 빠진 부도덕한 생활을 반박했었는데(전 9:9) 여기서는 경건한 삶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할 것이다.
1. 심판이 장차 올 터인데 이 심판에서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될 것이며, 신인(God-man)이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그는 심판할 권리를 자졌을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완전하게 합당하신 분이시며 무한히 지혜롭고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때에는 "모든 행위가 심판에 회부될" 것이며, 조사를 받을 것이고 다시 소환될 것이다. 그 날은 "육으로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는 날"이 될 것이다.
4. 그 때에는 "모든 행위"가 크게 심판받을 것이다. 그 행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든 어긴 것이든지 간에 다 심판받을 것이다.
5. 선악을 막론한 "은밀한 일들"까지도 저 큰 심판 날에는 밝히 드러날 것이며 추궁받게 될 것이다(롬 2:16).
감춰졌던 어떤 좋은 일도 그때에는 명백하게 들어날 것이며, 숨겨졌던 어떤 나쁜 일도 모두 환히 들어날 것이다.
6. 장차 올 심판과 그 심판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좀 더 철저하고 신중하게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희열에 넘쳐 우리 계산서를 내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장코뱅 설교에 가까운 주관적 비유의 표현이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저의 이해를 풍성하게 돕는 좋은 내용 같습니다.
전도서의 결론 부분, 12:9-14의 내용과 논리가 매우 선명해서 이해하고 믿기에 비교적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과 댓글에서 성경을 상고하는 유익을 얻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집대성한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군요.
인생이 무엇이고,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는 것이 전도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묵상도 묵직한 내용이 잔잔하게 잘 와닿습니다. 지혜자, 전도자, 설교자들의 본분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고 어떻게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네요. 목회자나 모든 신자들 각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것보다 이 문제에 집중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마지막에 아들에게 하는 당부인, 너무 많은 공부와 책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아라에 대한 해석으로 지식에 대한 절제를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씀 같습니다.
이 세상 지식도, 성경 연구도 모두 절제의 미덕을 갖추는 것이 건강한 삶이 될 것 같아요.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이나 이런 것은 도를 넘은 것이죠.
좋은 통찰과 추가적인 분별에 매우 공감합니다.
네, 공감합니다22
전도서 마지막 말씀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환기시키고 있네요.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니 이것을 망각하지 말고 인간의 마땅한 도리와 본분을 지키며 살아라 하는 것이네요. 정말 멋진 결론이고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네, 핵심을 잘 짚어 주셨어요.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은혜와 성찰이 함께 하는 좋은 묵상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