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사람의 친구
어린시절 나에게는 단짝이 있었다.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동네에서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다. 내 친구 별명은 '돼지코'였다. 어려서부터 그 친구는 들창코에댜 콧구멍 근처에 살이 많아서 돼지코라는 별명을 떼어놓은 날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뻣뻣하게 항상 하늘로 치솟고 있어서 돼지코라는 벌명이 그에게는 안성맞춤이엇다.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고 자주 함께 잠을 잤다. 어른들은 가끔 "뭐가 좋아서 그렇게 꼭 붙어다닐까?"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우리를 특별히 이상하게 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밤낮으로 붙어다녔고, 아침에 학교갈 때부터 집에 올 때까지 혼자 있으면 서로 허전함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돼지코가 흰 운동화를 사면 나는 어머니에게 한사코 졸라서 돼지코의 흰 운동화와 똑같은 것을 사서 신었다. 내가 초록색 가방을 들고 다니면 돼지코도 어느새 초록색 가방을 샀다. 우리는 말 그대로 '짝꿍'이었다.
우리는 해변가에 살았다. 이른 여름 바닷물의 냉기가 가시기 시작하자마자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바닷가로 뛰어나가 알몸으로 갯벌에 뒹굴었다. 바위에 닥지닥지 붙은 생굴을 돌로 쪼아 찝찔하고 상큼한 바닷내음과 함께 굴을 핥아 먹었다.
여름방학이면 온 천지는 우리들 것이었다. 새벽녘에 바닷가로 달려나가 우리는 점심도 거르고 해가 수평선 너머로 붉고 푸른색으로 사라질 때까지 겁없이 물개처럼 바다와 하나가 되어 종일토록 놀았다.
돼지코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너무 어려워서 붙는 학생보다 떨어지는 학생이 더 많았다. 아는 것은 엄청 많았지만 시험만 보면 항상 평균 60점대에서 달랑달랑하던 돼지코가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져서 결국 나와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돼지코와 함께 있을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돼지코가 자기네 고등학교의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면 공연히 따돌림당한 기분이 들고 심술까지 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정도 수그러들었다. 돼지코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적십자부의 간부도 맡고 교회에서 고등학생부의 간부까지 맡아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어쩌다 길에서 돼지코를 마주치면 언제 몸에 배었는지 뻐기는 걸을걸이로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일요일에 교회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나 나름대로 점점 바쁜 생활에 익숙하여 돼지코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몇 명씩이라도 좋으니 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라고 권유식으로 강요하여 우리들은 서로 좋아하는 친구끼리 클럽들을 만들었다. 클로버, 남십자성, 독수리, 맹호, 갈매기, 해바라기.... 등 클럽이름들이 많기도 하였다. 구성원이 많은 클럽은 열두 명인 것이 있었는가 하면 가장 적은 클럽은 열두 명인 것이 있었는가 하면 가장 적은 클럽은 두 명짜리도 있었다.
우리 클럽의 회원은 꼭 열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3년간 클럽활동은 대단하였다. 운동시합, 소풍,캠핌 등 모두 클럽 단위로 이루어졌고, 세월이 흐를수록 친구와의 정이 흠뻑 들었다. 공부하는 시간과 집에 있는 시간 이외에는 열한명이 항상 똘똘 뭉쳐서 돌아다녔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클럽친구들은 자주 만나면서 지난날을 회상할 때가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다시 한번 친구병을 크게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냥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별명은'깜상'이었다. 얼굴색이 남들과 달리 유달이 까맣다고 해서 아이들은 그를 '깜상' 또는 '니그로'라고 불렀다. 깜상과 나는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깜상은 음대 작곡과에 들어갔고 나는 철학과에 들어갔다. 우리는 기차 통학을 하였는데 학교에 가다 오다 자주 기찻간에서 옆자리에 않는 일이 많았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범인이나 악한 사람들은 아마도 외로운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들이 많은 사람들과 친근히 사귈 수 있었다면 그들 역시, 사람은 본래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 스스로 선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분이다. 그러나소위 유명한 정치가나 기업인들 중에서 일반 백성을 못살게 굴고 자기의 배만 채우는 사람들도 외로운 사람들일까? 확실히 그들도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은진실한 우정을 모르고 따라서 참다운 친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심과 원한의 감정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평범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함으로써 외로움을 달래려 할지도 모른다.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깜상이 바쁘지 않으면 자기집에 가서 놀다 가라는 것이었다. 깜상이 어느 파란 양옥집 앞으로 가더니 대문 옆에 달린 쪽문을 밀치면서 어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가득차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당이 꽤나 넓었고 마당 한쪽에는 온갖 꽃들이 여름날 오후의 강한 햇살 아래 약간은 처진 모습을 하면서도 진한 향내를 품기고 있었다. "저기 정원 왼쪽 구석에 있는 것들은 달맞이꽃이야. 사실은 야생인데 내가 낙섬 근처에서 몇 뿌리 캐다 심은 것이 저렇게 많이 퍼졌어.
언제 저녁나절 여기 와보면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거야."
'기차 안에서 얘기할 때는 떠듬떠듬했었는데 자식, 자기집이라고 그러는지 말도 청산유수인데'라고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달맞이꽃이라는 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볼품없는 풀 같았다. 별로 깨끗하지 못한 잎을 주렁주렁 달고 키만 큰 풀 윗 부분 여기저기에 노란색 꽃들이 쪼그라든 채 푹 처져 있었다.
깜상이 마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뒤를 따랐다. 마루가 넓고 시원하였다. 마루는 정원이 훤히 보이도록 한쪽이 모두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도 한쪽 벽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며 피아노 위에는 작은 그래프가 붙어 있었다. 깜상은 그래프를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이것 좀 봐. 이 시간표는 내 제자들의 피아노 레슨 시간표야. 중학생부터 여대생까지 있는데 지금은 모두 아홉 명이고 모두 여자야. 그안에는 내 애인도 있단 말씀이야. 너 그 중에서 어떤 애가 내 애인인지 알아낼 수 있니?"
나는 깜상의 성격이 보기와는 달리 매우 명랑하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깜상은 안방도 구경시켜 주었고 마루를 지나 부엌 건너편에 있는 결혼한 누나의 방도 가르쳐 주었다.
깜상은 서늘한 마루에 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나에서 털어 놓기 시작하였다. 소주가 한잔 두잔 들어갈수록 깜상은 때로는 진지한 자세로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하였다.
고향은 충청도 산골 진천이고 아버지는 만주에서 한의사 자격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한의사를 하다가 깜상이 국민학교 시절에 이곳에 와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산비탈의 무너져가는 판잣집에서 한의사를 하다가 점점 소문이 나서 돈도 벌고, 지금 이 근처로 와서 개업을 하여 깜상이 대학에 들어가자 때를 맞추어 깜상 이름으로 이 파란 양옥집을 샀다.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 그리고 누나 한 분과 매형이 함께 살고 있다. 깜상은 지금 어느 국민학교 여선생님을 짝사랑하느라 정신차릴 틈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여학생을 레슨하여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는 것이 깜상의 이야기의 요지였다.
나는 꼬박 2년간 깜상과 거의 같이 생활을 했다. 밤만 되면 여학생들이 우글거렸고 우리는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노래 했으며 또 다른 남자친구들을 불러들이고 번갈아가면서 장난삼아 여학생들과 수없이 여러 번 약혼식이랑 결혼식 행사를 치렀다.
매일 밤 늦도록 독한 포도주와 위스키를 마시면서 인생과 철학과 음악과 예술에 관해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열띤 토론을 멀였다. 나는 아예 깜상 동생의 가정교사로 깜상집에 눌러앉아 버렸다. 깜상 동생이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르치고는 양옥집으로 내려와 마루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여학생들이 오면 예술과 철학을 이야기해주고 인생을 이야기 해주었다. 지금 지나간 날을 돌이켜 보면 쑥스런 웃음이 절로 나온다.
깜상과의 2년에 걸친 생활을 깜상이 군에 입대하고 나서 막을 고하였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서로 진한 내용의 엽서를 수없이 주고받았지만, 아무래도 서로 직접 만나는 시간이 적어지니 각자 자기의 삶을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만 했다. 현재 돼지코는 서울 어느 여자중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있고 깜상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잘 살고 있다. 어쩌다 간혹 연락이 오고 갈 때 나는 번개같이 스쳐가는 지난날의 너무나도 빛났던 고귀한 시간들을 응시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살아가면서 일생 오갈 수 있는 친구가 몇 사람 있는 것은 축복받은 삶이다. 나는 지금도 오래 사귄 몇 명의 친구를 자주 대한다.
오래 된 친구는 부담이 없어서 좋다.
참다운 친구는 말이 필요없고 기쁠 때 서로 기뻐해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니 은은한 호수와도 같다. "된장은 묵을수록 맛이 난다"고 한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일생을 통해 몇 명의 된장맛 나는 친구들이 있고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내가 그들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은 없는지, 내가 그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챙기려고 한 적은 없는지 늘 반성해 본다. 물론 나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좀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더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또 그 시절에 사귀었던
친구들과 좀더 계속 접촉을 많이 가지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국민학교 친구는 너무 철이 없을 때의 친구이고 대학생 때의 친구는 이미 사회에 물들어 서로의 이익을 따지기 쉬운 친구이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야말로 오래오래 남는 친구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에게는 누구나 "야, 너 개똥이 아냐?이거 참 오래간만이다"라고 서로 소리치면서 흉허물 없이 끌어 안을 수 있고 당장 만사를 제쳐놓고 흉금을 털어 놓으면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
친구와의 참다운 우정을 통하여 우리는 성숙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사랑까지 체험할 수 있다. 중.고등하교 시절의 친구가 나의 인생을 통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친구와의 우정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오래 묵은 된장맛 같은 친구", 그러한 친구를 중. 고등학교 시절에 몇 명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의 삶 역시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