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은 영남의 관문으로
영남 선비에게는 출세를 위한 과거 길이 되면서 동시에
중앙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영남 선비문화를 지켜내게 하는
문턱 구실도 해왔다.
누가 이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단양 8경이 요즘 넷에서 회자되길레
죽령 라이딩 하면서 그중 두개인
죽령 폭포와 칠성암을 돌아보았다.
[파일:88]
(단양역 남쪽 또아리굴에선 나침반 바늘이 360도 회전한다.)
청량리역 06;40
희방사역 09;13
날은 화창하지만 미세먼지 주의보!
마스크 쓰고 라이딩..
희방사역 근처엔 매점이나 음식점이 없고
5분여 올라가니 추어탕집이 나온다.
(죽령방향)
(소백산 천문대)
첫 손님으로 들어가 빕도 반공기 더 달래서
든든히 아침을 챙기고 나온다.
시원한 바람에 그늘이 간간히 나오고...
배도 부른데 경사도 완만하니 전반적으로 편한 업힐이다.
(포토존에 가보나 전망은 별로..)
희방계곡을 지나고 소혼교를 지나니
길 우측 숲에 시비가 하나 서있다.
(퇴계선생 죽령 유적비)
퇴계는 1548년(그의 나이 48세)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단양8경도 지정하며 단양 풍수도 즐기면서 공사를보던 중
같은 해 10월 그의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를 제수 받게됨에 따라
8개월만에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2년후 1550년 봄 이해가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전임되어서
고향인 안동을 다녀와 한양으로 올라 갔는데
퇴계가 죽령 고개까지 따라와 전별 자리를 마련했다 한다.
(이해는 그해 사화로 귀양 가다 양주에서 사망함)
두사람이 헤어진 다리를 소혼교,
골짜기는 안영협(날아가는 기러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협곡),
골짜기의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벼랑은 잔운대(사다리 길,잔도가 구름에까지 닿는다는 뜻),
서쪽 벼랑을 촉령대(수직단애의 벼랑바위 형상이 몹시 험악하고 기괴하다)라고
퇴계가 명명했다 하는데 안영협이 어디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naver 검색)
시비 윗부분에는
퇴계의 칠언율시 '촉령대'와 '소혼교' 두 수가 실려있고,
아랫부분에는 퇴계선생 죽령유적비문이 실려있다.
촉령대
天荒을개척하여축대만들어서
우리형님監司행차맞이하고보내느라
영령한물소리情이넘쳐흐르는듯
우뚝솟은봉우리는이별恨을쌓았는듯
소혼교
안형협골짜기서나누어진두그림자
소혼교다리위에애끓는그때심정
구비구비험한재를부디잘넘으시오
明年다시오실언약행여잊지마옵소서
(죽령)
(영남제1관문,죽령루)
생각보다 싱겁게 죽령에 올랐는데 다운힐을 하면서 보니
대강쪽에서의 업힐이 난이도가 높아 대관령 업힐과 비슷해 보인다.
죽령폭포는 죽령 터널근처에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 표시가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들어가면 나온다.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가 철망문을통과하여
철도 옆 죽령천으로 내려가면 죽령 폭포가 나온다.
안내문이나 표지판은 없다.
(죽령폭포)
폭포 규모는 아담하여 생각 보다 적은데
폭포 상단에는 앉아 쉬기 좋은 암반이 있다.
옛날에 다자구 할머니가 폭포 아래에서 두아들과 살다가
산적들에게 두 아들을 잃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다자구 할머니는 지혜와 용기로 산적을 물리치고
죽령과 소백산의 산신이 된 할머니이다.
‘옛날 죽령에는 산적들이 많아 백성을 몹시 괴롭혔다.
하지만 산이 험해서 관군들이 도적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관군과 짜고서,
큰아들인 다자구와 작은아들인 덜자구를 찾는다는 핑계로
산적의 소굴로 들어갔다.
두목의 생일날 밤, 모두 술에 취하여 잠이 들자 할머니는 “다자구야”라고 외쳤다.
대기하던 관군들이 산적의 소굴을 급습해 산적을 모두 소탕했다.
이후 임금의 꿈에 나타난 다자구 할머니가 자신이 도적들을 잡는 공을 세웠으니
연을 날려 떨어진 곳에 신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연이 떨어진 대강면 용부원리에 죽령산신당을 지어
다자구 할머니를 산신으로 모셨다.
이후 이 산신에게 기도를 하면 나라가 평안해졌고,
개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월간 산지 인용)
(대강의 다자구할매 장터)
대강 양조장에 들려 막걸리를 맛본 다음
사인암으로 가서 지난 번에 못봤던 암각문을 확인한다.
접근이 어려워 강 건너 먼발치에서 보는데
절경을 찬미한 명문은 안보이고
낙서 같은 잡인들 이름만 암각되어 있다.
(사인암 밑둥의 이름 낙서)
낙서중엔 낭원군이란 글자가 보이는데
낭원군은 선조의 손자 낭원군 이간(李侃)으로
1693년(숙종 19) 겨울에 사인암을 다녀갔다 한다.
(고을학교 단양 탐방편)
사인암 외에도 남조천 강변에는 기암절경이 많다.
덕고개쪽으로 남조천을 따라가다 그늘에서 잠시 쉰다.
(남조천)
황정리 삼거리에서 올산천을 따라 대흥사골로 들어간다.
(대흥사)
뜨거운 여름 한낯, 절 입구 그늘 아래엔 등산객 몇명이 쉬고있고
점심 공양도 끝났는지 경내엔 개미 한마리 없이 적막하다.
요사채 주방쪽으로 돌아가 사람을 불러 황정산 미륵석불을 물어보니
구석진 곳의 미륵전 가는 길을 알려준다.
네이버 지도를 보니 미륵불은 대흥사 경내에 있던 것을
미륵전을 지으면서 산중턱으로 옮긴 듯 하다.
(황정산 미륵불)
미륵불 주위에는 과거칠불(過去七佛)과
미래불인 미륵존불(彌勒尊佛) 좌상이 있고
그 바깥쪽에는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보현보살 입상이 있다고 하는데
주마간산으로 일견하고는
계곡 등로를 따라 원통암으로 가는데
날씨 탓인지 체력 탓인지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물이 흐르는 시늉만 하는 계곡에 앉아
한참을 쉬고서야 겨우 올라간다.
(중간에 넓쩍비위가 나오고 건너편에)
(칠성암을 닮은 바위가 있다.)
(원통암과 칠성암)
원통암은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개창했다 하며
폐사된 것을 1949년에 중창하였고, 1965년에 중건하였다.
(칠성암)
70척의 바위 일곱개가 솟아 있는 칠성암 위에는
약 300년쯤 되는 노송이 자라고 있어서 장관이었으나
지금은 고사하여 없어졌다 한다.
부처님 손바닥의 형상으로 득남에 효과가 있어서
아들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신단양 8경중 하나이다.
원통암은 관세음보살의 육근원통(六根圓通)을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옛날 이 암자 뒤의 절벽 석문(石門)에서는 술이 흘러나왔는데,
욕심 많은 고을 태수가 하늘에서 내리는 술을 더 많이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뚫자
술이 물로 변하여 버렸으므로 주민들이 원통한 일이라 하여
이 일대를 원통골이라 하고 암자를 원통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법당 옆 약수터-물 맛이 좋다.)
칠성암을 마주보는 곳에는 사각정자와 배석대가 있다.
(배석대)
도를 닦고 기도한다는 배석대를 올라갔다 내려와
원통암에서 홀로 수행 중인 각문(覺文) 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하며 떡으로 요길 하고 하산한다.
(원통암 각문 스님)
(도솔봉,그 넘어에 죽령이 있다.)
(미륵전 입구의 안내판)
미륵전쪽에서 직접 도로로 내려가 자전거를 회수, 단양으로 가서
고수교를 건너가 오늘 라이딩 종착지인 다리안으로 간다.
(꽃잎이 다 떨어진 장미터널)
(양백폭포)
(착시그림)
고수 동굴을 지나 다리안 까지는
꾸준한 오르막인데 가다 쉬길 두번하고..
요새 체력이 영...ㅠㅠ
(천동굴 있는 천동마을을 지나고)
(다리안 주차장)
동그라미 절친인 조각가 김재영 선생이
작년 가을 다리안에 팬션을 오픈했다 하여
단양 온 김에 들려 본 것인데..
(팬션 '소백산가는길')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다보니
시간이 없어 다리안 폭포 구경은 못한다.
버스타고 제천역으로 가서는...
(고수동굴, 말 大거시기..)
(단양 버스터미널 앞 쏘가리 조형물, 버스가 10여분 정차.)
(보기에 횽한 갑산)
오늘 마지막 목적지 제천시장 충주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차로 귀경한다.
2018.06.24 일요일. 맑음. 미세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