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교회가 있었다(캐나다장로교의 북간도 복음전파, 1902년 ~ 1921년)
조선의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양반 사대부들의 횡포와 극심한 자연 재해로 북관의 농민들과 소작인, 천민과 노비들은 가렴주구와 학대를 견딜 수 없어 구명 도생을 위해 강을 건넜다. 처음에는 압록강 쪽으로 건넜다. 그쪽이 두만강 쪽보다 위도가 낮아 따스하였고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가 쉽고 청나라 군인들을 피해 숨기가 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1885년 조선인을 제지하던 봉금령이 완전히 해제되면서 청나라가 조선인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에 동서로 700리, 남북으로 4,50리의 땅을 조선인개간구로 지정해주자 조선인들이 북간도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은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유교와 불교 등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왔다. 천주교도 역시 이주하는 성도들을 따라서 용정에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대종교나 공교회도(유교) 마찬가지였다.
후발 주자인 기독교 개신교는 1902년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의 용정 방문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캐나다장로교회의 선교는 수평적인 선교, 사랑의 나눔과 섬김, 근대 교육과 신문명의 종교로서 간도의 조선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감리교가 북간도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1909년 장로교감리교 지역 분할에 의하여 감리교 선교부가 지역을 양도하여 연변은 캐나다장로회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캐나다선교부는 교회와 함께 학교를 세우는 것을 장려하였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0여 년 만에 120 여개의 교회로 크게 성장하면서 연변의 조선인 사회를 섬기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캐나다장로교회의 근대 교육과 신앙적 훈련과 각종 모임을 통한 크리스천 지도자들의 결속이 있었기 때문에 과 북간도의 3.13 만세 시위가 가능하였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전이 가능하였다.
아래는 1903년 부터 21년까지 북간도와 훈춘현에 세워진 교회 명단이다. 교회를 세운 자들 대부분이 북간도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독립운동의 구심축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1. 1902년 복음 전파 시작 :
그리어슨 선교사와 홍순국 조사의 연변지역(용정)방문
2. 초기 개척교회 13개 (1902~ 1910년):
*1903년 :
1)용정시교회(구춘선, 이보연, 김계안장로), 양무정자교회(안순영),
2)광제암교회(김연보, 한학열),
*1907년 :
1)용정중앙교회(정재면),
2)와룡동교회(남감리회, 하리영 선교사, 이화춘, 남공선),
*1908년:
1)모아산교회(이응현, 이병춘)
*1909년 : 1909년 캐나다장로회 서부분과 맥리어드선교사 파송. 11월에 성진 도착.
1)명동교회,(정재면, 김약연, 김하규),
2)호천포교회(최봉렬, 한수량, 한수학),
3)훈춘성내교회(오병묵, 황병길, 조약형)
*1910년 : 서부분과의 맨스필드 박사부부 12월 25일 한국에 도착, 맥리어드 선교사 회령에 선교부지 구입.
1)만진기교회(한수현, 강성황, 김용철),
2)대황구교회(김하정, 김동현장로),
3)차대인구교회(김강, 김병관, 김명규)
4)옥천동교회(이춘)
3. 10년대 개척교회 86개 + a (1911년 ~ 1921년)
*1911년 : 서부분과의 바커 목사 부부 한국에 도착. 맥리어드 목사 선교사 사임하고 출국.
1)장은평교회(양진섭, 양형성, 양형식, 이태언)
(함경북도 성진군의 40여 가구의 200명이 초봄에 장은평(화룡현 서성향 명암촌) 이주)
2)*장백현교회(이은경, 조덕수, 오주섭)
3)적안평교회(김계안, 김봉렬, 이태언장로, 염창화
4)국자가교회(유기연, 유찬희 장로, 서성권, 박의성, 유우일, 우흥원, 강익태, 유한풍, 남성호)
5)정동교회(강익태, 유한풍)
6)화룡현교회 (남성현)
7)은포교회(김약연, 심성문, 엄방진)
8)간장암교회(강백규, 김영섭, 김동의, 김동희)
9)두도구교회(강찬규, 홍일표, 이순창, 조명환, 조병수)
10)신풍교회(쌍신교회, 진형권)
11)일송정교회(공원보, 박병섭)
12)금당촌교회(오재영)
13)*구사평교회(연길현 수신사 구사평, 이태)
14)*탕동교회(의란구 남쪽, 최선화, 김순문)
15)*마적달교회(이동춘)
*1912년: 바커 선교사 회령에 11에이커 땅 추가 구입. 맥도널드 선교사 부부 도착. 한국선교 개척자들인 동부분과 선교사들이 서부분과 선교사들에게 함경북도 북쪽지역의 8개도시와 북간도와 훈춘지 역을 선교지로 분할해주었다. 이때 이미 40여 개의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다. 서부분과 선교사들이 4월에 용정에 선교 지부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가을에 서부 분과에 속하는 맥퍼슨 스코트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바커, 맥도날드, 로브 선교사가 함께 북간도 방문, 선교지부를 열 것을 확정하였다.
1)구사평교회(연길현 수신사 구사평, 이태), 조선장로교사기에는 창립연도가 1911년이다.
2)남양동교회
3)의란골교회(의란구 탕동교회와 다른 교회인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1913년 : 6월 6일에 바커 목사가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연합선교위원회가 프록터 목사 부부, 스미스 양, 맥에른 양, 커크 양, 맥퍼레인 양을 파송하였다. 용정의 영국더기 안에 26에이커의 땅을 선교부지로 구입. 그리어슨에 의해 최초의 용정 거주 전도사로 용정에 파견된 김계안 조사가 전 간도에 걸쳐서 최초의 장로로 용정시교회의 장로로 장립됨.
1)하마탕교회(구태선,계봉우, 김내범)
2)구세동교회(이종식)
3)광제촌교회(안극선, 김경필)
4)*명동교회 여전도회 수처에 교회 세움(정재면조사가 여신도회원들과 함께 교회 개척. 교회명단 확인이 안됨)
5)명신동교회(이봉구)
*1914년 : 프레이저 목사 부부, 윌리언 스코트목사 부부, 에드나 크뤽샌크 양, 모드 맥키넌 양, 맥도날드 여사를 선교사로 파송.
동부분과의 선교사인 푸트 선교사가 원산에서 용정 선교부로 이주.
1)설리교회( 김내범목사, 허상훈장로)1914년,
2)하래성남교회(김종필)
3)광암교회(칠도구, 이창언, 김용연, 김영)
4)희망봉교회(교인 최창규, 채학구)
5)창강교회(박창익,명동교회 교인)
6)영생동교회(유우일)
7)두도구교회(훈춘,구현문, 이경호)
8)남별리교회(훈춘, 이명순, 한인준, 최천약,모태환)
9)춘화향 사도구교회( 후춘, 이정권, 서윤훈)(1914년)
10)훈춘현성 서문밖 교회(1915년, 배례사선교사,이병하목사)(10개)
*1916년 : 의사인 마틴 박사 부부를 용정 선교부로 파송. 1916년은 캐나다장로교단의 전도활동의 전성기로 용정시교회가 천석 규모의 대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용정 영국더기 안에 마틴 선교사가 제창병원 설립(민산해). 명동교회를 비롯한 캐나다장로교회 여신도들이 ❬부인전도회❭조직 1916년 (임뵈뵈, 정신태, 김철나), 제창병원이 영국의 조계지인 영국더기 안에 있어서 일본 경찰이나 중국관원이 드나들 수가 없으므로 한국인들의 비밀집회의 장소가 되어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1)태양동교회(1916년, 김봉택, 김중흡)
2)응조암교회(최병주)
3)동불타교회(오병원)
4)압막동교회(최치호)
5)통납자교회(독립투사 황병길, 연통라자교회)
6)관지구교회(문병철)
7)포은동교회(배례사선교사,이병하목사)
8)전선촌교회(방두원, 한창동, 최문칠)
9)칠도구연수동교회(김경일,김순영)
10)훈춘 오도구교회(리용성)
*1917년 :
1)낙원동교회(1917년, 공리준)
2)무봉촌교회(배용규)
3)청산리영신동교회( 이봉섭, 이문섭, 조윤실)*청산리교회와 영신동교회는 각각 다른 교회로 설립됨.
4)낙타하교회(김계안)
5)소홍기하교회(훈춘 숭례향,배례사선교사, 이병하목사)
6)송전동교회(훈춘 용지향, 배례사선교사, 이병하목사)
7)장성촌교회(훈춘 용지향 배례사, 이병하)
*1918년 : 1918년 제창병원은 30개의 병상을 가진 현대식 병원으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과를 두었다. 소문이 널 리 퍼져서 러시아에서 까지 환자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1)전석동교회(1918년, 안영환)
2)청산리 백운평교회(권두혁, 박홍식)
3)구호동교회(김상설, 이옥현, 채일선)
4)옹성납자교회(이윤지, 신학봉)
5)장낙동교회(문경풍)
6)십리평교회(함광실, 홍춘명, 김홍순)
7)진빙교회(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
8)*동작동교회 (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
9)달나자교회(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
10)장등동교회
11)훈춘 용지향 삼도구교회(1918년 배례사, 이병하)
*1919년 : 3.13 용정 만세 시위가 있었고 19명이 시위로 인하여 사망을 하였다. 제창병원은 부상자들을 받아서 치료하며 사망자들을 위해 장례식장을 제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3.13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비밀 모임과 유인물 인쇄 등이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진행되었다. 3.13 만세시위 후에 캐나다장로교회를 지회로 하는 "간도국민회"가 조직되었을 때 제창병원은 간도국민회의 비밀 회의장소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캐나다장로회 선교의 비호 속에서 간도국민회는 무장투쟁에 앞장을 섰다. 회장은 용정시교회, 하마탕교회를 개척한 구춘선 장로였고 국민회군의 사령관은 안무였다.
신흥교회(1919년, 이태현)
중강자교회(김관식목사)
1920년 :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가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일본의 보복으로 경신대학살(간도참변)이 일어났다. 캐나다선교부의 선교사들은 학살지역을 방문•상황을 조사•파악하여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참변을 당한 자들을 구호하며 치료하였다.
1)토성보교회 분립 개척(1920년,용정교회에서 분립)
2)용정동산교회(리성국)
3)용정 룡강동교회
4)노두동교회 분립개척 (명신교회)
5)남양동교회 (조성극과 임종묵)
6)합성리교회
7)창신동교회(의란구, 최군왕, 김순효)
8)흥신동교회(김보국 가족)
9)태양동교회(김희순, 김재길)
10)북구교회(훈춘 덕혜향, 배례사, 이병하)
11)청수동교회(훈춘 덕혜향, 배례사, 이병하)
12)동강자교회(훈춘 덕혜향, 배례사, 이병하)
13)마가점교회(훈춘 마가점, 리용성)
14)형납자교회(설립지역 확인 필요)
15)은동자교회(설립지역 확인 필요)
16)동구교회(설립지역 확인 필요)
*1921년 :
1)서가산교회(1921년, 훈춘 경신향)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교회가 있었다. 1919년 만세 시위 당시 캐나다장로교회 지 교회는 무려 120여 개가 되었다. 17년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깨어난 자들이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학교와 교회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을 위하는 두 개의 축이 되었다. 학교와 교회가 독립운동의 장이 되자 독립운동 무드가 북간도사회에 들불처럼 번졌다. 그 결과 3.13 용정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이어서 40여 개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10여 개의 단체가 캐나다장로회 교회와 학교를 백 그라운드로 해서 출발되었다. 실로 1910년대 북간도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캐나다장로교회에 지도자들이었고 산하에 학교를 세운 자들이었다. 교회가 정신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었으며 물적, 인적 자원을 제공해주었으므로 간도국민회는 당시 한반도를 포함하여 간도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가 되었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가 있었다. 1920년 10월에 시작된 일본 놈들의 대학살에 캐나다장로교의 교회와 마을 그리고 학교들이 표적이 된 것은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가 캐나다장로교회와 그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 강경파는 한인사회당의 당수가 된 이동휘, 정안립, 전일, 백옥보, 최빈, 김강으로 그들은 경신참변 시 러시아나 간도 오지로 도피하였고, 김하현, 계봉우는 체포되어 국외 추방당하였다. 기독교 온건파로는 조희림, 이동춘, 김약연, 황병길이 있었으며 대황구의 양하구는 관망하였다.
3월 7일에 쓴 글을
2023.3.21 새벽에 정리하여 올리다.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