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능양 - 경학 대가로 송나라 사신 파견… 귀국후 영재교육 힘써
양성지 - 조선 전기 문신·학자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편찬
양주동 - 국문학자로 한국인 최초 향가 25수 전편 해독집 펴내
양(梁)씨는 ▲제주양씨 ▲남원양씨 ▲충주양씨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주양씨에서 분관되었다. 제주도에 분포된 토박이 양씨를 제양(濟梁), 육지에 퍼져 있는 양씨를 육양(陸梁)이라 한다. 이 중에서 남원양씨가 압도적인 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모든 양씨의 시조는 탐라(오늘날 제주도) 개국 설화의 삼신인 중 한 사람인 양을나다. 제주삼성인 양(梁), 고(高), 부(夫)씨의 시조인 삼신인은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등 세 명이다.
양씨는 원래 양(良)자를 성씨로 썼다. 시조의 후손 양 탕이 신라 진흥왕 때인 559년 광순사로 신라를 예방했다. 이 때 진흥왕은 벼슬과 상을 내리면서 양(梁)으로 고치게 했다. 제주양씨에서 남원양씨로 갈라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다.
남원양씨의 시조 양우량(梁友諒)은 신라 때 공을 세워 남원백에 봉해진다. 그래서 후손들이 남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경종 때 ▲양능양을 파조로 하는 병부공파, ▲양주운을 파조로 하는 용성군파로 나뉜다.
양능양은 경학(經學)의 대가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자감에서 전례와 경의를 강의하고 빈공과에 급제한다. 귀국 후 학교를 세워 영재교육에 힘쓴 당대의 석학이다.
양 우는 조선 개국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원의 교룡산에 은거했다. 이성계가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했으나 거절했다. 이태조가 그를 벌하려 했을 때 중신들이 "양 우를 벌하면 충신의 길이 막힌다."고 말하여 죽음을 면했다.
양성지(梁誠之.1415(태종 15)~1482(성종 13))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호는 눌재(訥齋) 혹은 송파(松坡)이며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기에 가장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이다. 그는 또 여러 부문에 걸쳐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놓은 이름난 학자였다.
양성지는 6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총명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특히 지리에 밝았고 그에 대한 책을 많이 탐독했다. 양성지는 훈구파의 중진에 속하며, 성리학자로는 드물게 조선왕조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여러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져 많은 저술과 편저를 남겼다.
양주동(梁柱東,1903~1977)은 국문학자이며 영문학자이다. 호는 무애(无涯)로, 개성에서 태어나 장연에서 자랐다.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양응락(梁應洛,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선조39년(1606)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양곡(梁穀,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광해군6년(1614)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양정호(梁廷虎,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숙종38년(1712)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양권(梁權,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태종1년(1401) 증광시 동진사(同進士), 양사적(梁思○,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태종2년(1402)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양순석(梁順石,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단종1년(1453) 식년시 정과(丁科), 양희(梁喜, 1515 乙亥生)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식년시 을과(乙科), 양성시(梁聖時, 1673 癸丑生) : 문과(文科) 숙종43년(1717) 별시2 을과(乙科), 양봉기(梁鳳騎, 1869 己巳生) : 문과(文科) 고종27년(1890) 별시 을과(乙科), 양취영(梁就盈, 1869 己巳生) : 문과(文科) 중종6년(1511)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216명이 있다. 문과 45명, 무과 60명, 사마시 102명, 의과 1명, 음양과 8명이다.
본관 남원은 전라북도 남원시의 지명이다. 196년(초고왕 31)에 백제의 5방 중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5현을 관할하는 남원부로 개편되었다. 남원양씨 인구는 2000년 현재 218,546명이다.
현대 저명인사는 다음과 같다.
▲양성봉 전 농림부장관 ▲양유찬 의학박사 ▲양일동 전 통일당 당수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장관 ▲양대경 전 대법관 ▲양원일 전 판사 ▲양준모 법학박사, 신문윤리위원장 ▲양희경 전 대법원 판사, 변호사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 변호사 ▲양정수 전 대한서울변호사협회장 ▲양대연 철학박사, 전 홍익대 교수 ▲양정강 의학박사, 전 연세대 치대 학장 ▲양재모 의학박사, 전 연세대 부총장 ▲양정모 원풍산업(주) 회장 ▲양복윤 조광페인트공업(주) 회장 ▲양택식 전 서울시장 ▲양정규 국회의원
▲양재권 전 국회의원 ▲양창식 전 국회의원 ▲양해경 전 병무청장 ▲양극필 전 국회의원 ▲양회영 전 참의원 ▲양회직 로스엔젤레스 교민회장 ▲양인석 예비역 육군소장, 전 육군대학 총장 ▲양태석 유학자 ▲양덕인 전 국회의원 ▲양용태 의학박사, 전 중앙대 의대 학장 ▲양동규 전 부산대 치대 학장 ▲양종의 전 전북대 법대 학장 ▲양달승 전 국회의원 ▲양 헌 변호사 ▲양상경 동명학원 이사장 ▲양우갑 조해상선 회장 ▲양명훈 변호사 ▲양경자 전 국회의원 ▲양병두 교육학박사
▲양재목 전 수산대학장 ▲양윤길 전 시카고영사 ▲양형호 약학박사, 중앙대 약대 학장 ▲양중해 문학박사, 제주대 사대 학장 ▲양용대 동화목재 대표 ▲양정석 중앙일보 상무이사 ▲양호열 광주투자금융(주) 전무이사 ▲양재봉 대신증권(주)대표이사 ▲양성민 조광페인트공업(주) 대표이사 ▲양규모 (주)진양 회장 ▲양재철 전 경찰국장 ▲양충호 경희대 교수 ▲양광남 전 중앙대 예술대 학장 ▲양남길 조선대 의대 학장 ▲양병탁 문학박사, 경희대 사대 학장
▲양상열 법학박사, 변호사, 전 전주시장 ▲양석성 의학박사, 전남대 교수 ▲양재현 이학박사, 성균관대 교수 ▲양옥룡 공학박사, 인하대 교수 ▲양재원 부산제철 사장 ▲양치종 전 제주교육감 ▲양훈영 공학박사, 연세대 교수 ▲양흥석 공학박사, 서울대 공대 교수 ▲양상현 공학박사, 전북대 교수 ▲양태용 공학박사 ▲양태성 중앙대 교수 ▲양회두 예비역 육군준장 ▲양희종 법학박사,변호사 ▲양용식 전 법제처 차장 ▲양성환 금성학원 이사장▲양학식 전 군수
▲양창현 전 군수 ▲양용택 전 군수 ▲양승훈 유학자 ▲양건주 정치학박사 ▲양영환 철학박사, 성균관대 교수 ▲양해생 의학박사, 병원장 ▲양승권 성원학원 이사장 ▲양주순 동명공업 사장 ▲양성현 풍산개발 사장 ▲양태운 대창해운 대표 등 (무순, 상당수는 전현직 구분이 되지 않았음)
양(梁)씨의 본관은 경주 고부 곡산 군위 김해 나주 남양 남영 남원 남한 남흥 단양 대전 명월 문화 삼척 송악 양주 양천 예성 예춘 원주 임천 전주 제주 진주 청송 청주 충주 파주 풍산 해주 등 총 32개에 인구는 2000년 현재 389,152명이 있다.
언론인, 성씨 전문기자의 전주매일신문 기고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