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의 울음
함석헌
머리 들어 허허 아득한 누리 바라보라, 그 누리 뉘 누리냐?
끝 없는 하늘알들 떠도는 것 아니냐?
발 디뎌 펀펀 두툼한 땅 딮어보라, 그 땅 뉘 땅이냐?
셈 없는 모래들 모여앉은 것 아니냐?
높은 뫼 넓은 들 덮는 푸른 나무 숲, 그 사이에 피는 가지가지 꽃,
닢 알의 모인 것 뿐이요,
긴 내 깊은 바다 흔드는 은빛 고기 조개, 그 밑에 떠는 형형색색의 마름,
살알의 뛰노는 것 뿐이다.
여섯 자 큰 사내라 뽑내지 마라, 먹은 밥 알 곤두서서 있는 너 아니냐?
억만 인구 굳센 나라라 자랑 마라. 눌린 씨 알 업디어서 서는 너 아니냐?
아. 씨알아, 씨의 씨 알의 알, 생각하는 씨알아,
네 서름이 쌓인 것이 무릇 몇 즈믄이냐?
놈들이 속엿구나! 말 없는 우리라고 속였었구나!
저 놈의 해 제가 태양이라, 저만이 큰 빛이라, 생명의 근원이라, 제가 바루 하느님이라 억만년 날마다 우릴 속여 왔지, 이 폭군아!
저년의 달, 태음이라던 계집, 제 빛도 아닌 걸, 폭군 턱 밑에 몸 팔아 얻은 부끄런 낯짝 가지고 제가 제법 화 복의 권세나 쥔양 밤마다 우리를 속여 왔지,
이 간악한 계집!
산아 너는 뭐라고 높은체, 그래 하느님이 네게 계시다고?
네가 높으냐? 지구의 꽁지 아니냐?
바다야, 엉큼한 놈, 네가 맑다, 그래 용왕이 네 속에 있다?
네가 어찌 맑으냐? 만물의 시궁창 아니냐?
이제 날이 밝았다. 과학의 날이.
밤 낮이 바뀐다.
사나운 폭군 혼자 빛나던 것, 사실은 참 가리는 어둔 밤이요.
억억 만만의 별이 반짝이는 밤, 그게 도리어 평화의 밝은 대낮이었다.
어느 것이 더 밝으냐, 빛 멀어가는 태양아!
너만이 해냐? 너는 수 없는 해 알중의 지극히 작은 하나 아니냐?
너도 본디 씨알의 하나였느니라,
과학의 시대는 씨알의 시대,
씨알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뜨고 입 열게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알은 과학으로 말한다.
성인들아 물어보자. 학자들아 대답하라.
(너희 소위 지도자라는 놈들 물러가라, 너희 말 아니다. 이 주먹꾼 놈들)
크단 것이 무엇이냐?
씨알 모인 것 아니야?
물체는 분자 모여, 분자는 원자 모여, 원자는 전자 모여 됐다더라. 자(子)는 알이다.
굳센 힘 어디서 나오느냐?
씨알 씨알 서로 손 잡음 아니냐?
힘줄도, 강철도, 바위도, 다 뵈지 않은 씨알의 악수다.
빛은 뭐냐? 에너진 뭐냐? 전기는 뭐고 방사선은 뭐냐?
억눌렸던 알의 풀려남 아니냐?
아름다움이 뭐냐?
씨알들의 노는 꼴 아니냐?
씨알이 제 멋대로 하면 자유,
씨알이 제 자리 찾으면 정의,
씨알이 얼굴 들면 영광.
씨알이 숨 쉬면 신비,
산은 무너지고 바다는 마르고 나라도 망하고 문명도 사라지는 날이 와도 씨알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씨알은 전체요 또 부분이다.
하나님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지만, 그저 큰 알 속에 작은 알이 있고 작은 알 속에 큰 알이 있는 것이니라.
아니다. 크고 작음이 없느니라, 그저 알일 따름이다.
알에는 안이 밖에 있고 밖이 안에 있다. 밖의 밖이 안이요, 안의 안이 밖이다.
전체, 밖을 그리면 ○이요, 하나, 속을 그리면 ⦁이다.
정치란 게 무엇이냐?
“씨알은 짐승이다”하는 소리니라.
다스린다는 말 부터가 건방지다. 누가 누굴 다스리느냐?
종교란 게 무엇이냐?
정치 아닌 종교 없느니라,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는 암호를 쓸 뿐이다.
요새 종교는 점점 정치화 하고 정치는 점점 우상화 하지 않더냐?
놈들이 서로 손을 잡고 씨알을 짜먹을 뿐이더라.
보라, 씨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다만 생각하는 마음 뿐을 가진 알짜 씨알은 정치에도 종교에도 없지 않더냐?
이 세상이거나 저 세상이거나 이름에 관계 없이, 잘 살기를 목적하는 정치와 종교, 우리 씨알과는 상관이 없더라.
씨알은 울어야 한다!
우리 목이 메고 눈물이 마르고 손 발이 맞은지 무릇 몇 천년이냐?
길게, 처량하게, 애절하게, 엄숙하게, 거룩하게 울어야 한다.
울면 목이 열릴 것이요. 눈에서 눈물이 솟을 것이요. 그러면 눈이 밝아 밝히 볼 것이요. 몸이 떨리면 저절로 춤이 나올 것이다.
저놈들이 민요라고! 그게 어찌 우리 노래냐? 그것은 썩어진 정치의 문드러지는 소리다. 그러기에 그것 좋아하는 놈들은 정치하는 놈과 그 종들 뿐이지 정말 뿌리 박는 씨알 거기 하나도 오지 않는다.
그놈들 또 포크 댄스라고! 그게 어찌 씨알의 춤이냐? 그것은 썩어진 종교의 미쳐서 하는 발작이다. 그러기에 그 거 좋다는 놈들 정신 빠진 맘몬 교도(黃金敎道)뿐이지 정말 하늘만 믿고 사는 맨 씨알들 하나나 거기 참여하더냐?
부끄럽고 슬퍼 말 못 하겠다.
저 신문장이들을 몰아내라, 잡지장이 연극장이, 라디오 텔레비장이 들을 모두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 달라고 내 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 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 다리에 마취약 놔 버렸다.
그놈들 소리 한댓자 사냥꾼의 개처럼 짖고 행동한댓자 개의 꼬리 치듯이 할 뿐 이다.
쫓아내라, 돌로 부수란 말 아니다. 해가 올라오면 도깨비는 도망가는 법이다.
우리가 우리 울음을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울면 우리 소리에 깰 것이다.
힘도 우리 것이요 지혜도 우리 것이다.
그것은 참이 우리게 있기 때문이다.
내 가슴 만져보며
눈 감아 지난 날 생각해 보고
귀 기우려 동터오는 앞날의 소리 들으려 애쓰노라면
울음이 저절로 나와요.
간난을 이기고
무지를 녹이고
죄를 씻을 수 있는
큰 울음이 저절로 나와요.
얼씨구나, 절씨구나!
얼씨구두 절씨다!
절씨구두 얼씨다!
하늘 알, 땅 알
마음 알, 살 알
얼의 알, 알의 알
얼씨구, 절씨구!
씨알의소리 1970.4월 창간호
저작집30; 2- 301
전집20; 14- 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