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정확하게 제 모습이게 허락하자.
1.
주님, 오늘 제가 당신의 비평가가 되어 당신을 거슬러 판단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창조에 간섭하려 함으로써, 그것을 병적인 형태로 왜곡시키지 말게 해주십시오.
창조의 단일성으로부터 제 바람을 거둘 용의를 냄으로써, 창조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이도록 해주십시오.
그럼으로써 저 역시, 당신께서 저를 창조하신 대로의 제 참나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안에서 제가 창조되었으며, 참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확하게 제 모습이게 허락할 때, 무엇이 저를 두렵게 할 수 있겠습니까?
2.
오늘 우리의 눈이 불경스럽지 않도록 하고, 우리의 귀가 거짓말에 솔깃하도록 하지도 말자.
오직 실재만 고통이 없고, 오직 실재만 상실이 없으며, 오직 실재만 전적으로 안전하다.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예수의 추가 설명]
그대들 대부분은 현실(reality) 속에 살고 있지 않다.
그대들은 공상 세계(fantasy world)에 살고 있으며, 제 자신이 그 감독이다.
자, 여기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대가 제 자신의 현실의 창조자라고 말해왔는데, 이제는 그 현실이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레슨에서 말하는 것은 그대가 사랑과 궤를 같이 하지 않을 때, 마음에서 거짓된 믿음과 아이디어를 정화하지 않을 때 왜곡된 실재의 버전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대는 상당한 시간을 그대의 미래 세상에 살겠지만, 상상의 세상이요, 판타지 세상이다.
상상하는 동안 그대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차를 운전하면서 집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믿지만, 사실은 마음속의 왜곡을 통하여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삶이 삶의 뜻대로 펼쳐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원망은 과거의 싸움, 과거의 상처, 과거의 아픔이 다시 역류하는 것이며, 그대는 지금 이 순간을 떠나서 판타지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판타지, 그 죄인이 그대에게 맞서서 무언가를 행했다는 판타지이다.
불쾌한 경험을 한 많은 이가 펄쩍 뛰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정말로 일어났다!”
물론 그대는 아마도 그렇게 즐겁지 않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대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그 상처를 다시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과거에 한 번 그대에게 상처를 주었을지 모르는 상대방은 그 희생과 상관이 없다.
그대가 상관이 있다.
그대가 원해서 그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마음속의 영화로 다시 돌아가, 나쁜 일을 다시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양분을 주고 길러온 상처를 가진 자에게, 이 용서 과정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지만, 그대는 그 상처를 원치 않는다!
그대는 그 원망을 원치 않는다.
그대는 현재 안에서, 그 오염시키는 에너지가 자라나 미래에 다시 나타나기를 원치 않는다.
옛 상처와 아픔을 역류시키기 위해 현재를 사용하면, 그대는 미래에 똑같은 주파수를 위한 씨앗을 심는 것이다.
과거에 누군가 그대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더라도, 되새김을 포기하기를 요청한다.
그대의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함께 놀면서 먹이를 주기를 멈출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대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그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대의 힘을, 신이 준 창조력으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게 힘을 넣어주는 것이다.
그대를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분리 안에서 사는 동안 행복한 꿈을 창조하기 바란다.
그대의 마음을 훈련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오늘 그대의 레슨을 하라.
과거를 용서하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매일 형제들과 그대의 장엄함을 나눌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감사하라.
...
[알렌의 설명]
용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오늘 레슨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신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이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는 것은 일종의 용서입니다.
그것들이 달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Paul Ferrini 가 그의 책 From Ego To Self 에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에 저항할 때,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사물이 어때야 한다는 소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물이 있는 그대로인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요?
그러나 오늘 레슨은 우리에게 그러라고 조언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나, 내 주위의 세상에게나 잔인한 레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즐겁지 않은 상황(병, 파괴적인 관계에 묶여 있는 것, 병으로 죽어감, 파산, 끔찍한 불행감)에 있다면, 솔직히 말해 어떻게 “모든 것들이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끔찍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가정에서, 친구들에게서, 세상에서 위와 같은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본다면 어떻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아이디어와 같은 말을 하는데 우리가 느끼는 저항은, 우리가 보는 상황이 실재라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고통이 실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엄마가 고통 받으며 돌아가시도록 내버려 두기”, 혹은 “남편이 계속 술을 마시고 나를 때리도록 내버려 두기”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오늘 레슨은, 실제로 우리가 보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실재가 아님을 인식하라는 요청입니다.
“오직 실재만이 고통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실재인 것은 아무것도 위협받을 수 없다.
그리고 실재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먼저 여기서의 모든 것이 오직 실재인 것만을, 오직 신에게서 오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외에는 다 환상입니다.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거기에 없다는 믿음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를 조건과 환경의 세상으로부터 이끌어내서 무조건적인 진리로 데려다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고통의 환상 뒤에 있는 견고한 실재를 보기를 원한다는 확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형제를 보고 냉담하게, “그걸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라고 말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건 신의 뜻이야.”라고 말하는 기독교식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죽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을 보고 실재로 만들고는, 그것에 대해 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슨은 잘못을 전혀 보지 않는 것에 대한 레슨입니다.
"잘못을 보지 마라.
잘못을 실재로 만들지 마라.
사랑을 선택하고 죄를 용서하라."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자.”는, 사랑이 실재가 되기 위해 조건이 바뀔 필요가 없다는 확언입니다.
조건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오직 사랑만이 실재입니다.
이것이 이 선언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보는 고통이라는 잘못은 신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은 실재가 아닙니다.
잘못은 오직 우리의 집단적인 마음들이 투사한 것입니다.
잘못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조건들이 다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을 멈추는 것이 바로 환상을 물리치기 위한 출발입니다.
우주의 창조자 역할을 사임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꾸고, 저것을 고치고, 이것을 요렇게 뜯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면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재를 간섭하여 지금 모습대로의 세상을 지어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간섭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환상의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손가락을 베었다면, 나는 몸이 실재가 아님을 안다는 이유로 피가 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밴드를 붙여줍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마법임을 인식하려 합니다.
나는 단지 환상을 뜯어 고치고 있으며, 그것은 실제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좀 더 편안한 환상을 만들 뿐입니다.
환상을 보다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방하지만, 결국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조건에도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제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물론 저는 그것에 대처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은 실제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식이요법을 통해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확언이나 정신적인 조건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다 환상입니다.
그것들은 다 환상을 뜯어 고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제 몸이 죽든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들로 하여금 정확히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자.”는,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나의 정체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를 의미합니다.
만약 내가 아플 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몸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나는 단지 애초에 나에게 병을 일으킨 잘못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기”는 내가 조건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모든 투자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조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든, 어떻게 드러나든 나는 그것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궁극적인 선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확신하면서 쉴 수 있습니다.
24과는 “나는 나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지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허용하기”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극단적으로 제한된 관점에서 움직이는 우리는 여전히 조건들을 바꾸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 고려 사항에 넣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분리된 마음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우리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것으로 보는 것을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든 결과는 신의 손에 있으며, 신의 손은 선한 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는 이런 자세의 한 예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는 한 개인으로서의 관점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뢰로 예수는 여전히 “당신 뜻대로, 그것이 나에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 교사가 반드시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며, 신의 판단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일어나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라도 나쁘다고, 혹은 좋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전혀 판단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실재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