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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선생실기
[묵계실기서]
곰의 발바닥과 물고기의 맛을 분별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성현의 뜻은 아주 적절한 것이나 현혹되지 않고 취하고 버리는 자는 적다. 그러나 여러 번 죽음을 당하는 기로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참된 삶을 알고 걱정하며 죽는 것이다.
나의 종조부이신 묵계공(류복립)께서는 태어나시면서 기개와 재능이 있고 자못 지조와 절개가 투철하여 선조25(1592)년 왜구의 침략 때 지위가 낮은 하급 관리로 외삼촌 학봉 김선생(경상도 우감사 김성일)을 따라 적과 전투를 하고 있는 진주로 가시었다.
보좌관으로 참전하여 계략을 세우고 협력하여 도와서 큰 공을 세웠으며, 선생(김성일)을 몸이 야위도록 힘을 다하여 간호를 하였으나 별세하시니 의사들은 이미 모두 해체되고 고립된 성루 역시 이미 운이 없게 되었다. 선생 임종 시의 부탁으로 성을 버리지 않고 지켜 2개월여를 지지 않고 겨루어 세신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순절하시니 싸움터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어릴 때부터 장한 뜻이 있었는데 비록 보답할 때 순절한 초기에 사망하신 사실이 명확치 않다고 하여 빚어낸 것은 돌아가신 지사의 눈물이다. 진주사람들이 촉석루 아래에 세운 척비에 이르기를
“절사 류 아무개는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에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죽었다”
라고 하였는데 그때 같이 순절한 여러 들 중에 누군들 비석이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어찌하여 공은 홀로 연고에 대하여 짤막한 말 한마디도 기록되어있지 않으니 특히 가련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강물에 흘러 떠돌다가 가라앉을 뻔하다가 숙종 때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관리의 관직을 죽은 후에 높여 주는 것)의 명이 내려지니 이 포상으로 만족스럽게 된 것은 공의 기세가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또 정려(동네에 정문을 세워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는 것)가 내려지고 또 명이 내려져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역대의 임금이 이를 장려하고 숭상함은 지당한 일인 것이다.
공의 5대조이신 회헌공(류의손)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줄 때 신하로서 선왕(선조)의 영에 성의를 다한 절개가 있었고 생모이신 김씨는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서 국가가 이 선행을 표창하여 정려가 내려졌으니 집안 대대로 충렬의 문은 이미 터놓은 바이다.
부모 곁에서 효도하고 인재를 기르고 또 학봉(김성일)의 수제자로 재주가 있는 장인으로서의 기대가 있었음은 꾸밈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나의 선조 도헌공(류우잠)은 묵계공 형님의 아드님이다. 선영(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 선산)에 의관장(시신 대신에 죽은 자의 옷과 갓을 묻고 장사지내는 것)을 지내고 제사를 올리며, 이제 그 축문을 읽으니 위 언덕의 묘가 마음속에 사무치는 느낌을 억제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후손인 류태환 씨와 류전 씨에게 흩어진 문헌을 모으라는 말씀이 떨어졌을 때 근거가 되는 고사와 포상의 시말에 대한 실기 1권을 만들기 위하여 류심래, 류봉래 및 류병 씨 등이 본인(류치명)에게 서문을 작성케 하여 먼저 가신 분에 관련된 일을 생각하니 서러운 마음이 격동하여 눈물을 닦고 삼가 글을 쓴다.
철종 5(1854)년 8월 하순에 종후손 가선대부 전행 병조참판 류치명이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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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선생실기] _권지일
[년보]
*명종 13(1558)년 7월 21일 경상도 안동부 수곡리의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대대로 살아온 곳은 한양의 묵사동이다. 생가댁 조부인 인의공(류윤선)께서 형님 참판공(류윤덕)이 영남 관영에 계실 때 따라 가서 임시로 영주에서 사셨는데 생부 시정공(류성)께서 안동의 수곡으로 이사를 하였다.
*명종 14(1559)년 공 2세
*명종 15(1560)년 공 3세 7월에 생부(생부) 시정공이 별세하였다.
*명종 16(1561)년 공 4세
*명종 17(1562)년 공 5세
*명종 18(1563)년 공 6세 1월에 어머니 김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부인은 학봉 선생의 누님인데 25세 때 존경하는 남편을 잃고 두 자식이 모두 어려서 손수 조문을 받으시며 엎어지면서도 집안의 예법대로 상을 치렀다. 머리털을 자르고 옷은 석새 삼베(삼승포)의 겹옷으로 추우나 더우나 갈아입지 않고 단벌로 사시다가 3년 상을 마친 후 식사를 끊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후에 이 사실을 나라에서 알고 정려가 내려졌다. 학봉 김선생이 맡아 양육할 때 김선생이 원곡에서 임시로 사셨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능이 뛰어나 즐기며 소꿉장난을 할 때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활쏘기를 즐기며 말하기를
“이곳의 이 장부가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보신 학봉선생은 기이하게 여기였다.
*명종 19(1564)년 공 7세
*명종 20(1565)년 공 8세
*명종 21(1566)년 공 9세 효경(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전한 효도에 관한 논설 내용을 훗날 제자들이 편저한 책) 수업을 시작하였다. 일찍이 책을 읽을 때 탄식하며 하는 말씀이
“나는 부모가 없으니 효도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랴. 오로지 임금에게 기꺼이 옮겨 충성으로 꼭 이루리라”
라고 하였다.
*명종 22(1567)년 공 10세 6월 명종 임금이 승하(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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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1568)년 공 11세 이 해에 당숙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즉 공은 후에 학봉 선생이 한양 집에 데리고 갔다 양부인 공(류지)께서는 공(류복립)이 공부할 때의 말씀을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며 후사로 맞이하였다.
*선조 2(1569)년 공 12세 이 해에 양부(류지)께서 병상에 누우시므로 공께서 상심하셨다. 결국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는데 어른 못지않았으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조 3(1570)년 공 13세
*선조 4(1571)년 공 14세
*선조 5(1572)년 공 15세 이 해에 부인 완산 이씨를 맞이하였다. 사직 이영종의 따님이다.
*선조 6(1573)년 공 16세
*선조 7(1574)년 공 17세 12월에 아들 호를 낳았다.
*선조 8(1575)년 공 18세
*선조 9(1576)년 공 19세
*선조 10(1577)년 공 20세
*선조 11(1578)년 공 21세
*선조 12(1579)년 공 22세
*선조 13(1580)년 공 23세 윤4월 생가의 외조부 청계 김공이 별세하였다.
*선조 14(1581)년 공 24세
*선조 15(1582)년 공 25세
*선조 16(1583)년 공 26세
*선조 17(1584)년 공 27세
*선조 18(1585)년 공 28세
*선조 19(1586)년 공 29세
*선조 20(1587)년 공 30세
*선조 21(1588)년 공 31세 이 해에 종부시 주부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서 가려 뽑아 특별히 공에게 제수했으나 40이 못되어 벼슬을 하지 않았다. 알아보니 어명채의 통문, 최용우의 상언에 이르기를
“이 나이에 익위사 세마에 천거하여 제수 함이 당연하니 재고를 바란다”
고 한 것이다.
*선조 22(1589)년 공 32세
*선조 23(1590)년 공 33세 3월에 학봉선생이 일본 통신사 부사를 조정에 사직하고 도성을 떠날 때 공이 수행하여 안동으로 갔다.
*선조 24(1591)년 공 34세
*선조 25(1592)년 공 35세 봄에 서울의 집을 버리고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의 수곡으로 가 형님 기봉공(류복기)과 함께 살았다. 공은 모름지기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하여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4월에 왜구가 크게 몰려와 학봉 선생이 초유사로 진주로 가실 때 공이 따라갔다. 이때 조정과 민간에서는 도망쳐 숨었고 모든 관청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공께서는 떨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대대로 충신의 후손으로서 의롭게 당당히 목숨을 바칠 것이다. 비록 상감을 모시고 따라가는 것이 도리이나 불가하고 스승을 따라 임금께 은혜를 갚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식솔들과 헤어져 선생을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만났다.
6월에 모집관을 하였다. 그때 강 우측은 비어 있어서 적의 두려움이 없었다. 김선생이 각 휘하의 여러 사람을 임시로 별군의 장교인 모집관으로 하여 침범하는 적을 막았다. 공 역시 모집관을 하였으나 멀어서 어려움이 많아 사퇴하고 이르기를
“온 힘을 다하여 돕는 것이 어떤 일이나 상책이 아니랴”
하였다. 공은 평소에 정랑 박성과는 절친하여 집회에서 만나면 대단히 기뻐하고 같이 일하기로 약속하였다.
7월에 모든 군사와 함께 힘을 다하여 싸우니 적은 비밀리에 군대를 움직여 야간에 도주하여 사천과 고성 등의 읍을 수복하였다. 이때 김선생이 오랫동안 거창에 계신 것을 적이 염탐하여 진주가 무방비상태인 것을 알고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해가므로 선생이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모든 읍에 군사를 풀어 구제하여 군세가 자못 등등하니 적이 남강에 이르러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모든 장수들을 더욱 독려하여 싸우니 적들이 밤에 도망을 갔고 함락 당했던 사천과 고성 등의 읍을 되찾았다.
9월에 좌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학봉선생을 따라가 안동에 도착하여 1일 머무르고 또 수행하여 산음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적과 싸우는 전선의 좌도관찰사로 대신을 천거하여 임명하고 김선생을 본직으로 돌아오게 한것 때문에 우도의 유생들이 규탄하였다. 문지기에게 청하여 머무르자 곧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신녕으로 가 도착하라는 명을 받은 곳이 고향집에서 머지 않아 잠시 가서 성묘를 하고 공을 따라 1일 묵고 선생의 둘째 아들 혁과 같이 갔다.
10월에 부임지 진주로 달려가 입성하려는 적을 막는 전투에서 크게 이겨 임금의 표창장을 받았다. 김선생이 산음에 계실 때 들리는 바로 적이 무리를 이끌고 진주 전투에서 패한 보복을 하고자 독려하고 달려든다고 하여 모든 장수들과 협력하여 지키고자 할 때 적은 이미 성을 10겹으로 포위하고 수십리에 뻗어 있었다. 결사대를 모아서 활과 살을 주고 공이 선봉에 나서서 밤에 남강을 따라 틈새를 타고 입성하여 장병을 독려하며 죽기로 싸우니 사방을 포위하여 공격하던 적은 일곱 밤과 낮의 전투에서 부득이 전의를 잃고 주둔하던 막사에 불을 지르고 시신이 쌓인 채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목사 김시민이 전사하였다.
*선조 26(1593)년 공 36세 4월에 학봉선생이 공관에서 별세하여 슬픔을 맞이하였다. 공은 박성, 이노 및 조종도 공 등과 같이 진중에 항상 있으면서 상을 주관하여 시신을 입관하고 지리산에 임시 매장을 하였다. 다 같이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6월 29일에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김선생(김성일)은 이미 별세하였고 공께서 지휘권을 대행하여 여러 장병과 같이 장윤, 이종인 등 여러 공들과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여러 차례 적의 침범으로 양식은 떨어지고 공을 격려하는 지사들은 죽어갔다. 버티기를 두 달여에 이르러 적은 총동원하여 공격해오는데 하늘에서는 비가 와서 성이 무너지고 적은 개미떼처럼 줄줄이 성안으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단속하여 돌을 던지며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여 거의 물리치게 되었는데 동쪽 성을 지키는 황진이 전쟁을 며칠간 용하게 버텨왔으나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김천일의 군사가 지키려 하였으나 북문이 이미 함몰되어 무너졌고 적은 산에 올라가 있어 위를 쳐다보니 군인들은 궤멸 되었다. 혼자서 싸우며 올라갔으나 모든 군사가 크게 혼란되니 김천일이 촉석루에서 최경회와 손을 잡고 통곡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고 공은 강희열, 이종인 등과 격분하여 큰 칼로 적을 베는데 온 힘을 다하다 순절하였다. 군사와 민간인을 합하여 죽은 자가 6만여 인이 되고 달아난 자는 몇 명이었다. 소, 말, 닭 할 것 없이 남아있는 것이 없었고 왜변 이래로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전쟁이 심하였다.
조카 우잠이 촉석루 아래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의관장으로 고양 선조의 묘소 아래에 귀장(타향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으로 가져가 장사 지내는 것)하였다. 후에 양지현 식지곡(현 용인시 운학동) 남향의 산기슭에 개장하였다. 진주인들이 절사비를 촉석루 아래에 세웠는데 표제에
“절사 류복립은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죽었다”
라 하였다. 진주인들이 당일 눈으로 본 것을 쫓아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조정의 특명으로 세금과 부역 면제의 특전을 그 집에 내렸다. 공의 자손은 경기지방에 살며 대대로 그 가족에게 세금과 부역 면제의 혜택을 누리게 하였다. 선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숙종 44(1718)년에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관찰사 김연의 장계(감사 또는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임금에게 글로 보고하는 것. 또는 그 보고)와 예조판서 민진후와 이조판서 이관명 등의 계청(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을 듣고 추증하였다. 전하여 이르기를
“류복립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 당시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가 죽은 일로 조정에서 이 관직을 25일에 증직한다”
고 하였다.
*영조 5(1729)년 6월에 종손 심의 집에 정려가 내려졌는데 이르기를
“충신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조봉대부종부시주부류복립지려”
라 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이제정이 계청하고 도설 예조판서 김시환 등도 다시 계청을 하였는데 전하여 이르기를
“이는 전란에 몸을 용맹하게 투신하여 죽음을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두려움 없이 싸웠으므로 이를 특별히 정려를 표한다”
고 하였다.
*순조 2(1802)년 1월에 진주 창렬사에 추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추가로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것)이 내려졌다. 김천일, 황진, 최경회, 장윤은 정조13(1789)년에 이미 추향이 내려졌고 공에 명이 내려진 것은 감사와 연신이 계청을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3월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봉안문은 예조판서 김희순이 지었다.
*철종 6(1855)년 5월에 실기를 간행하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