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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텍스
이 홍사
*
어제의 기억은 온전히 망가져 있었다.
자기 통제를 부실하게 하면 이런 일이 생기는 법이다. 술 앞에서는 늘 겸손해야 하는데.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심한 갈증으로 새벽에 깨었다. 새벽에 사무실에 내려와 망가진 기억의 잔해를 뒤져 파편을 찾아낸다. 입은 물론이오, 뇌리에는 아직도 술 내음이 찌들어 풍기고 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창밖에는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오리무중, 나의 기억도 오리무중이다.
어제 오전까지의 기억은 선명한데 늦은 오후의 기억은 없다. 어제저녁의 기억이 뭉텅 날아갔다. 어지럽게 늘린 기억의 잔해를 뒤지니 듬성듬성 뇌리에 꽂혀있는 파편이 툭툭 불거진다. 때가 찌든 운동화, 텁수룩한 반백의 머리, 그가 메고 있던 때 묻은 배낭. 세월호 리본, 피가 묻는 수염은 눈에 선한데 어느 게 앞인지 구분하기가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침을 먹지 않은 속은 쓰리고 신물이 울컥 올라온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도록 마신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새벽에 극심한 갈증에 잠이 깨어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여니 책이 냉장고 안에서 툭, 떨어졌다. 바로 어제 산 책이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럼 티셔츠는?
어제 분명히 티셔츠도 샀는데 그게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책을 들고 사무실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아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다. 좋은 소리는 당연히 없을 것이고 오로지 바가지가 기다릴 뿐이다. 이럴 때 각방을 쓰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내가 깨어나면 나는 우리 집에서 숙청되어야 마땅할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내의 등쌀에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 그 이야기야 다음에 맑은 정신에 하고. 환장하겠다. 기억이 뭉텅 날아갔으니,
성질이 유별나서 이런 일이 생기면 무던하게 넘기지 못하는 인간이 바로 나다. 이런 일이 생기면, 다음날 술을 함께 마셨던 대상에게 전화해서 실수한 게 없느냐고 물어보고 기억을 살리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술자리에 동석한, 아니 나에게 술을 먹인 대상의 전화번호는 고사하고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애가 터진다.
책상 앞에 앉아 어제를 더듬어 기억의 파편을 얼기설기 엮어 어제 일을 유추하려니 조금 어지럽다. 숙취 탓인가?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술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제는 그 진리를 깜빡하고 정신을 놓았다.
어제 오전에는 비교적 평온한 하루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대구로 갔었다. 간 것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기차를 타고 왔나? 그럼 역에서 집까지는 어떻게 왔나? 생각은 나지 않고 텁수룩한 수염에 이죽거리는 듯한 얼굴이 난삽하게 떠올라 머리만 더 복잡해진다.
*
강을 유심히 본 것은 어제였다.
반백의 까칠한 중늙은이가 차창에 비치고 있었다.
어쩌다, 언제 이렇게 되었나.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 생소했다. 푸석한 얼굴에 저 반백의 사내가 바로 나란 말인가. 뜬금없는 의문이 일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고 푸석한 얼굴을 비볐다.
기차가 왜관 철교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차창에 내 모습 너머에 바로 강이었다.
강을 배경으로 한 내 모습을 잠깐 훑어보았다.
강이라.
눈을 지그시 감고 돌아보니 아득했다.
건너온 강은 돌아보면 언제나 아득한 법. 돌아보니 참으로 질기고 힘든 강을 건너왔다. 너무 진부하고 식상한가? 강을 보고 이런 생각에 잠긴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앞에 놓인 강이 있는 법이다. 죽어서 건넌다는 요단강처럼 꼭 건너야 할 강인데 물살이 얼마나 드세고 험난한지 짐작할 수가 없다. 나는 강을 건너왔다. 이미 건너온 사람은 건너지 못한 자의 슬픔을 모른다고 했던가?
건너온 강?
진부하지만, 이렇게 강을 들먹이면 강이란 존재에 어떤 뉘앙스가 풍기는가?
당연히 험난한 세월의 강이라는 뉘앙스가 풍기겠지.
그건 그렇고.
아이야. 두렵지 않으냐?
강을 건너면서 난데없이 아이를 호명했다. 아이란 불특정 다수였다. 나보다 나이가 작은 대상이면 다 아이에 포함했다. 그 다수에게 강을 보면 두렵지 않은지를 묻고 있었다.
아이야!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서리맞은 고춧대처럼 시들시들하냐는 말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활력이나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구나.
엊그제 신문을 보니 돈이 없어서 굶어본 경험이 있는 젊은이가 전체 인구의 삼 할이 된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이 대명천지 21세기에 돈이 없어서 굶는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이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성세대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만들었는지. 모든 게 내 탓이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을 차린 내가 정신이 나간 나를 툭, 건드렸다.
정신을 차리니 기차 안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던 거지?
강은 저렇게 유순하게 흐르고 있는데. 짬만 나면 내 사유는 나침반 바늘처럼 암울한 시대를 더듬고 있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돌아보면 그 영역을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으며 나는 또 왜 이럴까? 세상이 이렇게 변한 데 대해 불만은 여전했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늘 그 모양이었다. 어정쩡한 태도와 입장. 이렇게 줏대가 없이 어떻게 여태 살았는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서점!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문을 닫는 서점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술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줄이고 집에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제 서점을 찾으니 구미에서 서점 중에서 가장 크다는 춘향당서점에 가니 문은 열려있는데 점포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 이 서점도 결국 문을 닫는구나. 들를 때마다 서점이 한산한 걸 보고 조마조마했는데.
도서를 찾아주던 사서 아가씨가 아닌 인부들이 안전모를 쓰고 작업준비를 하는 눈치였다. 서가는 이미 비어 있었고 무슨 작업인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못 볼 것은 본 것처럼 꽁지를 내리고 내려왔다. 바로 아래층이 역이었으므로 나는 대구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어야 했다. 대구에는 다른 볼일이 없다. 그저 서점 탐방뿐이다. 신간은 어떤 게 나왔나. 둘러보고 읽고 싶은 책 한두 권을 사서 올라오는 게 고작이다. 대구에 책을 사러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지만 즐겁고 마음이 가뿐하다. 늘 그렇지만 누구의 빈소에 조문을 가는 길과는 대조적인 마음가짐이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에 가면 서점을 두 군데 돌아보고 올라온다. 어제도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교보문고와 바로 인근에 있는 영풍서적인데 대구역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으면 십 분이 걸리는 거리다. 점심시간이 걸려 허기가 지면 극장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어묵으로 허기를 달래도 기분은 깔끔하다. 올라올 때는 기차 안에서 새로 산 서적을 뒤적이니 지겨울 틈이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전날 밤에 유튜브를 뒤적이다 신간을 소개받았다.
유튜브의 채널은 다양하다, 잘 찾아보면 책을 읽어주는 코너도 있다.
그 코너를 뒤적이다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을 들었다. 유튜브를 시청한 게 아니고 누워서 청취했으니 들은 것이다. 동양에 공자가 있으면 서양에는 발타자르가 있다고 했다. 벌써 사백 년 전의 사람인데 스페인이 낳은 거장이다. 그가 쓴 책은 사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사람들의 생활 지침서로 읽히고 있다. 여태까지 나는 그런 책이 있는 줄 몰랐다. 공자나 발타자르, 그런 사람이 정의로 내리는 인생이라는 것과 지켜야 한다고 일러주는 지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소설을 읽어 거기에서 던져주는 아포리즘이나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숨은 길을 찾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경험을 대신하는 것은 책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경험하여 체득할 만큼 인생은 길지 않다.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유튜브를 듣고 있는데 매력은 가장 강력한 지배 수단이라는 말을 했다. 귀가 확 뚫리는 말이었다. 절대 공감하는 바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 책이 누구의 책인가. 누워서 듣다가 벌떡 일어나서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보니 발타자르의 글이었다. 유튜브로 듣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책을 사서 읽어야겠구나, 마음을 먹었다. 이 책이 한글로 어떻게 번역이 되었나 살펴보니 사람을 얻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다.
사람을 얻는 지혜.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을 얻는 게 아니라 나를 알고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 책은 단숨에 다 읽어버리는 게 아니라 곁에 두고 짬이 날 때마다 한 문장씩 읽고 새겨도 좋을, 생활이나 습관의 지침서가 되는 책이었다.
어제는 잊지 말고 기어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새벽에 나가서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시간을 내서 역사에 이 층에 자리 잡은 춘향당서점으로 갔는데 애석하게도 공사 중이었다. 하여 마음먹은 김에 대구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왜관에서 낙동강을 넘어서면 강의 의미 있게 보았다. 강을 건너면 대구까지는 금방이었다. 대구역에 내려서 걸으면 중앙로는 항상 한산하다. 대구에서 중심이지만 한산한 편이다. 상권도 옛날과 달리 다 죽었다. 오죽하고 명찰이나 상패를 만드는 가게가 있고 구제 옷을 파는 가게들이 터를 잡고 있다. 상권은 바로 뒤에 있는 동성로에 다 빼앗기고 명성만 남은 거리다. 그런 거리에서는 꽁초 관리만 잘한다면 담배를 물고 걸어도 무방하다. 도로를 건너서 천천히 걸어도 담배 한 대 피울 짬이면 교보문고에 도착한다. 나는 그 거리를 끽연을 즐기며 활보했었다.
사람을 얻는 방법.
교보문고에 들어서서 서적 검색대에 그렇게 쳤는데 그런 책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뭐가 이래?
사람을 얻는 수단인가?
그렇게 쳐 보니 역시 없었다. 책의 제목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난감했다. 뒤에 도서를 검색할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책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뒷사람에게 검색대를 양보하고 핸드폰을 뒤져 지난밤에 보았던 유튜브를 찾았다. 사람을 얻는 지혜, 그렇지 지혜였었지. 사람을 얻는 지혜, 그랬구나. 검색대에는 바로 뒤에 또 다른 손님이 금세 붙어 있었다. 서점은 삼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 층에도 검색대가 있다. 실내에는 작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놈을 이용해 이 층으로 올라가 검색대를 뒤졌다. 나는 서점에 가면 항상 필요한 책을 먼저 찾고 다른 신간을 뒤적인다. 내가 찾는 책은 이 층에 있었다. 삼 층은 학생들의 참고서 종류가 있는 곳이라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어떤 책들이 나왔나?
이 층 서가를 둘러보고 일 층으로 내려와 판매순위가 상위에 오른 책들을 쭉 둘러보고 서점을 나왔다. 바로 부근에 있는 영풍서적에는 들르지 않았다. 대신 담배를 물고 중앙로를 걸어가면서 언뜻 본 중고 옷가게에서 노란색 티셔츠를 싼값에 하나 샀다. 서점에 가면서 만져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게 디자인과 색상이 마음에 든 것이었다. 사고 보니 그 티셔츠는 중고가 아니라 상표가 붙은 새것이었다. 아마도 이월 상품이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을 보니 대구에서 점심을 먹기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주전부리로 때우지 않고 구미에 와서 역전에 있는 싸구려 한식 뷔페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택시 기사들이 많이 찾는 뷔페식당인데 가끔 가서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식당이다. 역 부근에는 그런 식당이 두세 군데나 있다. 그곳이 생각나서 서둘렀다. 구미로 오는 기차는 거의 삼십 분 간격으로 있다. 꼭 기차 시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역으로 가면 별로 기다리지 않고 탈 수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골덴텍스를 아시우?”
좀 갈라진 탁음이었다. 기차표를 끊고 한산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새로 산 책을 건성으로 뒤적이고 있는데 누가 물었다.
골덴텍스? 나를 보고 묻는 것인가.
그 생각을 하면서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 고개를 들기가 싫었다.
바로 앞에 다가와 말을 거는 자의 신발을 보았기 때문이다. 꼬질꼬질한 신발. 원래는 흰색 운동화인데 어디에도 흰색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때가 묻어 있었다. 접어서 신은 운동화 위의 바짓가랑이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거지발싸개라고 했던가? 그 말이 떠오르며 순간적으로 귀찮은 존재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고 책에 눈길을 주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골덴텍스를 아느냐구?”
이게 반말인가? 말꼬리를 왜 잘라먹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묻는 사람의 행색을 훑어보는데 눈에 딱 거슬리는 게 있었다. 바로 가슴에 단 세월호의 노란 리본이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머리를 텁수룩하게 기른 사내는 반백의 머리였는데 무엇이 들었는지 때가 찌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어디 등산을 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는 자를 보면 나는 혐오를 넘어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이 일어 경악한다. 제 아버지가 죽었으면 칠 면이 팔 년이 되도록 리본을 달고 다니겠는가? 순간적으로 마음에 가시가 거꾸로 돋았다. 그 지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리본을 달고 나오는 인사가 있다. 그러면 나는 단박에 채널을 돌린다. 남의 아픔을 저토록 오래 우려먹는 잔인한 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월호 리본을 좌파의 훈장으로 여기는 인간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 행색을 보니 그 작자는 리본을 훈장으로 생각하고 단 게 아닌 듯했다. 세월호 피해자의 가족인가? 그래서 정신적으로 못 이겨 노숙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골덴텍스가 뭘 어쨌다는 거야?”
앉은 채 텁수룩한 수염을 올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약간의 귀찮음이 묻었지만 역시 나도 반말이었다.
“내가 골덴택스를 만들었다는 말이지. 왕년에. 이 바지도 골덴텍스야.”
사내는 허리를 숙여 때 묻은 바짓가랑이를 뒤집어 보여 주었다. 바짓가랑이에는 노란색으로 GOLDEN TAX 수를 놓은 바짓단이었다. 골든 텍스가 맞지만 우리는 그 시절에 골덴텍스라고 불렀다. 영국제 모직이 성성하던 시절에 우리의 기술로 만든 모직이었다. 가볍고 착용감이 좋고 입으면 부티가 나는 최고의 모직이었는데 사내가 그런 행색으로 걸치고 있으니 전혀 부티가 나지 않았다. 골덴텍스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면서 허리를 구부린 사내의 엉덩이를 슬쩍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직 공장에서 기계에 기름이나 치면서 근무했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 리본이 뭔지나 알고 달고 다니는 거야?”
“이거? 죽은 아이들의 넋을 기리는 거지.”
낭창하게 대답하며 그 작자는 바로 일어서 때 묻은 손으로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넋? 꼴값 떨고 있네. 미친 새끼, 떼! 인마 그게 언제 적 얘긴데. 네 새끼가 죽었어?”
얼른 보아도 나보다는 두세 살 많아 보였지만 욕을 첨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들을세라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내 새끼가 죽은 건 아니지만 이걸 왜 떼? 절대로 못 떼!”
역시 사내는 리본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야 골덴텍스! 너 좀 맞고 뗄래? 그냥 뗄래?”
정서가 훼손된 나는 약이 상당이 올라 도전적으로 말했다. 여차하면 벌떡 일어서며 그의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난폭하게 떼어낼 기세였었다.
“야! 이 새끼야! 맞아도 못 떼!”
사내는 언성을 조금 높였다. 아마도 주위의 지원군을 요청하는 모양새였다.
“너 이 새끼 더러운 주둥이로 나한테 욕했어?”
“욕은 네가 먼저 했잖아? 개새끼야!”
“뭐 개새끼? 너 이 새끼. 따라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고 끌었다. 덩치가 왜소하고 늙은 사내의 멱살은 한 손에 들어왔다. 주위에서 시선을 주었지만, 이내 거두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사내의 멱살을 잡고 층계를 내려갔다. 끌고 갔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이 새끼가 아주 호작질거리를 만드는군.”
멱살을 잡고 층계를 내려가면서 뱉은 혼잣말이었다. 호작질이라고 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짓을 어릴 적에는 호작질이라고 했었다. 본질에서 살짝 벗어나는 짓거리를 그렇게 불렀는데 순간적으로 그 말이 떠올랐다. 역사 일 층에 내려가서 뒤로 돌아가니 여행 장병 안내소가 있었다. 거기까지 갈 동안 멱살을 풀지 않았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 골덴텍스는 계속 개새끼라고 욕을 했다. 거기가 비교적 한산했다.
“개새끼야! 너? 나를 때리면 술을 사줘야 한다?”
술? 웃음이 픽 나왔다. 멱살을 풀고 돌려세우자 골덴텍스는 예상하지도 않은 흥정을 제시한 것이었다.
“욕은 그만하고! 순순히 리본을 떼면 술은 사줄게.”
“개새끼야! 이걸 가지고 왜 계속 시비야? 이 개새끼가.”
골덴텍스는 리본을 감싸 쥐며 욕을 더 심하게 했다. 그 순간 내 주먹이 골덴텍스의 턱으로 날아갔다. 주먹이 날아가는 순간, 주먹을 피해 고개를 픽 돌리다가 욕을 내뱉던 아가리가 맞은 것이었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금세 흐르고 뱉은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골덴텍스는 주둥이를 손등으로 닦으며 피가 묻은 침을 아스팔트에 또 뱉었다.
“한 대에 소주 두 병이야. 알고 때리는 거야? 이 개새끼야.”
기가 막히는 건 둘째치고 약이 더 올랐다.
“오늘 소주를 박스 채로 사줄게. 죽어서 마셔라. 이 새끼야.”
종아리를 걷어찼는데 골덴텍스의 입에서는 신음 대신에 소주를 계산하고 있었다.
“소주 네 병.”
약이 올랐다. 종아리를 더 세게 걷어찼다.
“소주가 여섯 병이요.”
기가 막혔다. 걷어찬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때리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팍 사그라졌다. 때리거나 걷어찰수록 약이 오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야! 이 더러운 새끼야. 소주 사줄게. 가자.”
그 말에 골덴텍스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던가? 내가 졌다. 약이 오르면 지는 것이다. 어떤 싸움에서나 마찬가지다. 손자병법에 이런 사항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 싸움의 패배자는 바로 나였다.
내가 앞장을 섰다.
종아리가 아픈지 쩔뚝거리면서도 잘 따라왔다. 도로를 두 번이나 건너서 문화회관 맞은편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술집이 문을 열고 있었는데 한산했었다. 그 집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에게 돼지 껍데기를 안주로 시키고 냉장고의 소주를 내가 직접 꺼냈다. 골덴텍스는 시키지 않았지만, 맞은편이 제 자리인양 앉았다. 나는 소주잔이고 골덴텍스는 맥주잔으로 소주를 가득 부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정말 아이들의 넋을 기리느라고 그 리본을 달고 있는 거야?”
미처 안주가 나오기 전이었다. 빈속에 소주를 콸콸 부어 한잔 마시고 리본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럼, 이게 멋으로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 새끼야.”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아나? 이 새끼야.”
“뭐가 잔인하냐? 이 새끼야 넋을 기리는데.”
이 새끼. 저 새끼, 분명히 욕인데 이젠 하도 들어서 욕처럼 들리지 않았고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나는 골덴텍스가 제 손으로 리본을 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맥주잔에 부은 소주를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골덴텍스에게 말했다.
“너에게 하나 묻자.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라고 하고 남편을 잃는 여자를 과부라고 하고 마누라를 잃은 남자에게 홀아비라고 한다. 그럼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뭐라고 하냐?”
“자식을 잃은 부모? 뭐라고 하지? 모르겠는데? 뭐라고 부르냐? 이 새끼야.”
골덴텍스는 입가에 묻은 소주를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손등에는 입술에서 나는 피가 함께 묻어났다.
“그건 이름이 없어.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거야. 그 슬픔을 가슴에 묻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이름이 없는 거야. 그건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불가침 영역이야, 이 새끼야. 리본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라. 너 애비가 죽었으면 지금까지 삼베 리본을 달고 있겠냐? 이 새끼야.”
끝말에 언성을 높이며 주먹으로 탁자를 때리자 안주로 돼지 껍데기를 접시에 담아 들고나오던 아주머니가 움찔했다.
“당장 네 손으로 떼라!”
꿈적도 하지 않자 태도를 바꾸어 언성을 낮추고 말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내 방식대로 하면 못 뗀다. 이 새끼야!”
그 말에 나는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골덴텍스도 내가 술을 마시면 짬이면 맥주잔에 든 소주를 마셨다. 마시다가 내려놓는 잔에는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그게 눈에 엄청나게 거슬렸지만 지적하거니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휴지가 바로 탁자 위에 있었지만 권하지 않았다.
“떼라!”
“못 뗀다. 이 새끼야. 너는 인정도 눈물도 없냐?”
“떼라!”
그 사이에 소주 한 병이 비었다. 그런 엄포는 틀린 방법이었다. 먹히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내 손으로 뗄 수도 있었지만,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제 손으로 리본을 떼도록 만들고 싶었다. 일단 아주머니에게 소주를 더 시키고 나는 내 시각과 그때의 심경을 장황하게 낮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쩌면 그건 간곡한 부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손으로 리본을 떼기를 진정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리본을 떼는 것보다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월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백을 하는 투로 낮은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봄이 되었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봄이 절정을 맞는 이 시기에 나는 분노한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정치인에 의해 온 국민의 트라우마 세월호 사건이 소환되기 때문이다. 이 잔혹한 계절에 반복되는 슬픔팔이라고 이름하자. 그 싸구려 슬픔팔이에 나는 분노한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가장 잔혹한 사건이 될 것이다. 정말 잔혹하다. 이 세상에는 가해자가 없는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 가해자가 없는 비극의 불행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해상 교통사고. 그런 사고로 자식을 잃은 슬픔은 불가항력적인 피동성이다.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이다. 그래서 슬픔에 젖은 자의 슬픔에 공감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가 슬픔을 딛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위로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그들이 슬픔을 벗어나기보다는 세월호 사고의 슬픔에 속박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한 자들의 귀에 속삭인 것이다. 분노하라. 분노하라. 이건 사고가 아니라 학살이다. 당신의 자식을 앗아간 자들에게 분노하라. 기회를 맞은 무리는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귀에 속삭이며 자신의 정적을 가해자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피해자들은 슬픔이라는 피동적 감정을 분노라는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으로 바꾸고 분노했다. 홀로 감내하는 슬픔보다는 함께하는 분노가 편했고 위안이 되기 때문이었다.
해상 교통사고인데 누구를 향해 시위를 하느냐?
가해자를 만들어야만 했다. 지난 대통령을 향해 여섯 시간 동안 무얼 했나? 어느 정권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넋을 기리는 일이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정말 잔인하지 않은가? 물론 그럼 감정은 슬픔을 치유하는데 아픔도 고통도 치유하지 못했다. 너도 그런 일에 이용되고 있다. 무엇이 도움되었나? 결국은 그들의 삶을 좀 먹는 지옥의 불길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몇 년 동안 유가족들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매표 행위의 금전으로 악용했고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방향성 잃은 슬픔과 분노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비단 정치인만 이런 짓을 한 게 아니다. 지적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이에게 세월호는 위선이며 싸구려 자기 어필의 수단이었고 그런 위선의 도구로 이용되어왔다. 결국 세월호 사건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이용하는 상품이 되었다. 너는 그런 일에 교묘하게 현혹되어 있다.
그렇게 세월호를 팔아먹는 동안 바꾸고 개선된 게 무엇이 있나?
잔인하다. 지금도 세월호 리본을 달고 너 같은 인간이 있다. 정말 슬픈가? 세월호 이후에 바뀐 것은 무엇인가? 바로 정권이다. 한 정권이 무너지고, 그 쓰임새는 사라졌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그 말로 쓰임새는 끝이 났다. 오늘 나는 너의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보고 분노했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어지간히 우려먹어라. 왜 세월호 리본에 혐오감이 일까.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인가. 세월호 이젠 슬프면서 지겹다. 유가족의 슬픔을 건드리지 마라. 나는 분노한다. 세월호를 우려먹으려는 위선의 정치인에게. 너 같은 사람에게 분노한다. 제발 리본을 좀 떼라. 떼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지금 네 가슴팍에 달린 세월호 리본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뭐 그런 요지의 설명이었는데 차분하게 말했다.
말을 하고 보니 탁자 위의 소주는 빈 병이 셋이었다. 말을 하면서 나도 마셨지만 골덴텍스는 들으면서 한숨을 안주 삼아 계속 마셨다. 술을 마시는 그를 보면서 가슴팍의 리본을 제 손으로 떼기를 바랬다.
“이 새끼야. 소주 다섯 병을 더 시켜라. 그러면 내 손으로 뗀다.”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다.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투였다.
“다섯 병을 시키는 건 좋은데 입에서 욕도 떼라. 너 무슨 띠냐?”
“소띠다.”
소띠? 놀라웠다. 행색이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손아래였다.
“소띠면 나보다 두 살이 적다. 나는 돼지띠거든, 형님에게 욕을 하지 마라. 그리고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말고, 형님이라 불러라.”
“같이 늙어가는 주제에 형님은 무슨.”
그 말을 하면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
내가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골덴텍스의 요구대로 나는 아주머니를 불러 과감하게 소주 다섯 병을 더 시킨 기억은 난다. 소주를 시키자 골덴텍스는 가슴팍의 리본을 떼어서 나에게 준 것 같기도 하다. 그 리본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제 산 티셔츠는 골덴텍스에게 입으라고 준 것 같다. 그가 입고 있었던 지저분한 티셔츠 가슴팍에는 피가 묻어서 그게 눈에 거슬려서 당장 갈아입으라고 준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노란 티셔츠를 입은 골덴텍스를 보았든가? 그 기억은 뿌옇다.
세월호 리본을 떼고 그 자리에서 티셔츠를 갈아입히고 골덴텍스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것 같다. 골덴텍스가 경남모직에서 나온 것인가, 제일모직 제품인가, 들었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아무튼, 모직 회사에 다녔다고 들었는데 그때가 그의 전성기였던 모양이다. 추가로 시킨 소주 다섯 병을 다 마셨는지 기억이 없다.
골덴텍스는 모직 회사에 다니던 제 전성기의 이야기를 했고 나는 이 모순의 시대에 대해서 떠벌린 것 같다. 내가 말하고 스스로 차오르는 분노에 술을 마셨다. 다섯 병을 더 마시고 술을 더 시켰든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집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면서 골덴텍스와 무슨 노래인가 불렀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술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객기를 부리면 안 되는데.
속이 쓰리고 신물이 넘어온다.
내 입에서는 역겨운 술 내음이 진하게 풍기고 창밖에는 여전히 농무가 드리워져 있다.
골덴텍스는 역의 의자 밑에서 자고 있을까?
그런데 세월호 리본은 어디로 간 거지? 내 손으로 분명히 받았지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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