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경 시인 발표작
정희경 : 1965년 대구 출생. 2010년《서정과현실》등단. 시조집 『지슬리』 『빛들의 저녁시간』『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시조평론집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올해의시조집상,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테트라포드(tertrapod)*
봄날을 행진하는 비정규직 깃발들
삼삼오오 스크럼 짜고 밀려와 부딪친다
저만치 꿈쩍도 않는
항구의 붉은 불빛
* 파도나 해일을 막기 위해 방파제에 사용하는 콘크리트 블록.
장마
국밥집 노할매의 목소리가 굵어진다
'그래도 내한테는 금쪽같은 자식인 기라'
창문을 두드리는 비
삿대질이 한창이다
다섯 살 언저리의 마흔다섯 칠봉 아재
그 많던 손님 곁을 사슴처럼 뛰는 날
문 닫고 뜨겁게 말아낸
붉은 국밥 두 그릇
레이스 짜는 여자
하얗게 꽃을 올린다 열사(熱沙)에 핀 오아시스
그물도 쇠사슬도 정녕코 아니더라
선인장 검은 가시들이 핀을 박는 아마존
얽히고 비틀어진 걸음에 무늬진다
꼬아서 엮어가는 식민지 두터운 벽
석양은 풀리지 않는 긴 매듭을 짜고 있다
신화는 흘러가도 맥박은 반복되고
대서양을 넘어오는 애끓는 노랫가락
정교한 레이스* 위에 집 한 채를 짓는다
*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흑인 노예의 문화로부터 발전해 온 브라질 북부 지역의 문화유산인 빌로 레이스(bilro lace).
ㅡ시조집『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책만드는집, 2020)
4월, 풍경 ․ 2
불 꺼진 쇼윈도의 마네킹 걸음 같은
두 팔이 잘려나간 가로수 몸짓 같은
문 앞에 두고 떠나는 택배상자 무게 같은
층층이 싹 올리는 초록의 저음低音처럼
파도에 쓸려가다 멈춰서는 모래처럼
도시의 위리안치가 기호 앞에 줄 선 날
오시리아역*
숨겨진 기적소리 물갈기에 흔들릴 때
먼 곳을 향해 가는 뚜벅뚜벅 걸음 있다
털머위 노란 꽃숭어리 보름달을 비집고
쇼핑센터 불빛들이 등대처럼 빛나는 곳
그 등대 따라온 배 순간 길을 놓친다
기차는 달의 중력을 가득 싣고 떠난다
오랑대 시랑대가 파도에 부딪치고
너른 들 내달리던 어제의 바람소리
돌아올 기차를 기다리며 불빛들이 피고 있다
*오시리아역 : '오랑대'와 '시랑대', 접미사 '이아(ia)'의 합성어로, '부산으로 오시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동부산관광단지 조성의 일환으로 건설된 동해선의 전철역.
ㅡ『시와소금』(2020, 여름호)
우산에 관한 기억
고흐가 선물해 준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타히티역 출구에 후두둑 비가 내린다
떠나 온 아를의 방에 해바라기 피겠다
손을 떠난 우산은 사이프러스의 별이 되거나
거울 속 자화상으로 선명히 남아 있다
원시의 타히티섬엔 해가 반짝 나겠다
ㅡ『시조미학』(2020, 가을호)
경력단절
채 덜 핀 모란 한 송이 거실로 데려왔다
튼실한 꽃대에 잎도 몇 장 붙여서
잘린 면 맺힌 물방울 배웅인 듯 떨린다
꽃 잃은 초록마당 밤늦도록 술렁였다
화병에서 서성이는 잘려나간 물의 길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자줏빛이 번진다
만지면 부서질 듯 꽃부리 얇아진 몸
고개 떨군 잎자루에 가느다란 잎의 맥박
향기로 모란은 피어 거실은 오늘 밝다
ㅡ『정음시조』 (2020, 2호)
시인의 우편함
매미가 자지러지게 하늘로 오르더니
수만 필 말을 몰아 소나기 달려온다
먼 길을 요금별납으로 온 『눈물이 참 싱겁다』*
『컵밥 3000 오디세이아』*는 말 허리에 묶여 있다
웅크린 젊음들이 저벅저벅 걸어 온 날
집 나간 닿소리들의 『혈색이 돌아왔다』*
* 김진숙, 최영효, 임성구 시조집.
반달가슴곰 KM-53*
계절이 짙어 와서 더 보이지 얺는다
윤기를 잃어버린 백두대간 수풀 사이
바람의 낯선 소문들 무성하게 쏟아질 뿐
천년을 길들여 온 야성은 살아있어
오가는 발걸음에 반달 가슴 자꾸 뛰어
철 지난 동면冬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꿀벌도 흰개미도 자취 감춘 어둔 밤은
철골만 앙상한 끝없는 긴 울타리
도시는 콘크리트 위헤 열대림을 세운다
* 2015년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가슴곰 KM-53'은 지리산을 수차례 탈출해 결국 2018년 김천 수도산에 방사되었는데 2019년에는 구미 금오산에서 발견되었다.
ㅡ『열린시학』(2019, 가을호)
참깨를 심다
안개가 훑고 간 땅 이랑이 선명하다
걸어오던 바람들이 둔덕에 멈춰 선다
고 작은 몸집 하나가 자리 잡은 헌 책상
어두운 쪽방에서 몇 날을 기다리나
뻐꾸기 울음소리 우묵한 봄의 한낮
별똥별 대척점으로 눈물 한 점 보내고
깨알같이 웅크린 고시촌 말랑한 몸
어디든 길을 내면 내 길이 아니더냐
때맞춰 알람이 운다 하지(夏至) 지난 너른 들
ㅡ『시산맥』(2020, 9월호)
대한大寒
한때는 뿌리를 단 싱싱한 몸이었다
물기 없는 세상에 잎들은 남아 있어
한겨울 바람에 익은 시래기를 삶는다
섣달의 각질처럼 질겨진 껍질들
덕지덕지 붙어있는 겨울을 벗겨내면
초록빛 속살 같은 봄 웅크리고 있을까
창령사 나한상
먼 길을 걸어서 온
엄마가 앉아 있다
햇살로 지은 집에
산 하나 얹어 놓고
바람에 뭉개지는 몸
두 손 가만 모은다
복원 13
-아파트 놀이터
모래를 걷어내고 새 매트를 깔았다
등나무 잘라내고 지붕을 또 얹는다
흙 한 줌 구름 한 점도 티끌 없는 유리성
등나무에 놀던 바람 총총히 돌아간다
모래를 쪼아 먹던 새소리도 날아간다
아이들 웃음소리만 깨끗하게 닦인 오후
ㅡ『시조21』(2020, 봄호)
광장
누군가 먹다 흘린 삼각김밥 허리에
비둘기 떼 몰려든다, 날갯짓 부딪힌다
경칩의 부산역광장 이른 아침 무료급식
질주하는 KTX에 사라진 비둘기호
퇴화된 눈빛으로 도시를 배회하는
스스로 날개를 잘라 얼룩진 비행들
부산한 발걸음에 흩어지다 또 모인다
역사驛舍에 들지 못한 노숙의 잠자리처럼
흩어진 밥알 몇 개가 구석에서 얼고 있다
―『시와소금』(2014, 여름호)
민들레 경로당
재건축 아파트가 씨방처럼 부푸는 길
옹기종기 모여 핀다, 운촌의 노란 대문집
홀씨는 날려 보내고 지팡이만 남았다
화투패로 점쳐보는 홀씨들의 늦은 안부
바람에 흔들리다 지팡이는 여위는데
아파트 창가에 걸려 저녁이 오고 있다
복원 · 11
- 성지곡 수원지
푹 파인 등껍질에 선연한 물길 자국
바닥을 움켜쥐는 거북이 드러났다
시간은 절로 엎드려 푸른 바람 풀리고
윤슬에 살랑이다 흘러가는 물결 위에
구름을 쫓아가는 오리 떼의 물갈퀴
편백이 제 몸을 담가 빈 하늘을 안는다
잉어도 물풀들도 다 떠난 저수지에
물의 무게 견뎌낸 거북의 단단한 힘
몇백 년 갈증을 달랜 맨바닥의 핏줄들
ㅡ『서정과현실』(2019, 하반기호)
누렁이
-지슬리 32
누렁이가 집집마다 밤이슬을 맞고 다닌다
이장님 따라 나선 봄날의 기억 더듬어
물고 온 짝짝이 신발 보름달이 담긴다
한 짝을 찾아 모인 아침이 부산하다
코로나로 걸음 끊긴 마을회관 꽃은 피고
늦잠 든 누렁이 등을 쓰다듬는 지슬리*
* 경북 청도군 각북면 지슬리
말
가시가 목에 걸려 붉게 변한 바다빛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는 더욱 못해
나에겐 붉은 가시가 그에게는 뼈였네
한 마디 말의 뼈가 내게 와 가시 된다
살점에 묻혀있는 난독(難讀)의 옹이여
잘 구운 고등어 등은 아직까지 푸른데
ㅡ『시조미학』(2020, 여름호)
태화강 떼까마귀
검디검은 강물이 하늘로 흘러간다
대숲에 숨어들어 깃을 접는 철새들
노을의 짙은 함성이 광화문에 깔리듯
감말랭이
ㅡ지슬리 31
쫄깃한 햇살들에 속살이 그을린다
하늘에 매달려서 익을 대로 익었는데
떫은 맛 날리는 시간 마당귀가 열린다
바람도 여기 와서 주름을 펴고 있다
갈라지고 흩어진 어머니 이름 앞에
잎보다 더 붉은 단내 가을꽃을 피운다
속까지 다 말라서 물기 없는 몸뚱어리
앙상한 손가락에 지는 꽃이 검붉다
흰 분이 서리로 앉는다, 갈무한 입동 무렵
ㅡ『시와문화』(2020, 봄호)
플로랄 폼(floral foam)*
불 꺼진 빈 방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단물이 빠져 나간 온 몸이 푸석하다
피어서 화려한 꽃들 지나간 길 아슴하고
끝없이 밀어올린 물관부의 퍼런 상처
가시 박힌 자리마다 골다공증을 앓는다
한때는 눈부시던 리본 노을에 와 펄럭인다
* 꽃꽂이 할 때 쓰이는 것으로 흔히 오아시스라 불린다.
덤벙 접시
운대리 가마터*에 까치가 울다 간다
덤벙 담갔다가 건져 올린 달을 향해
시간의 백토를 입힌 그 기다림 한 조각
손금은 마디마디 무뎌지고 둥글어졌다
먼 길 오실 손님 위해 길마다 해를 달고
정갈히 닦아낸 접시 실금마저 보얗다
내 사랑도 한때는 일렁이는 가마였다
일렁이다 사그라져 흰 재만 남아 있을
운대리 깊숙이 묻어둔 말간 슬픔 고인다
* 전남 고흥군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
배웅
뚜벅뚜벅 타고 오는 새까만 구두소리
또박또박 따라 걷는 새로 산 흰 운동화
긴 복도 중환자실에 느릿느릿 뻗어 있다
ㅡ『부산여류시조』(2019, 제33집)
어떤 명함
달리는 오토바이가 명함을 휙휙 던진다
비스듬히 내리는 때 이른 진눈깨비
급전이 필요하십니까 즉시 대출 싼 이자
불 꺼진 치킨집 앞 수북한 고지서처럼
폐업처분 가격인하 가속력 칼금처럼
가장의 낡은 구두에 추적이는 누런 낙엽
폭포
한 여인이
돌아서서
어깨를
들썩인다
등 뒤로
흘러내린
가지런한
머리카락
하얗게
눈물이 뚝뚝
바람빗에
묻어난다
죽을 끓이다
자꾸만 가라앉아 밑바닥에 들붙는다
윗물은 아직까지 뽀얗게 흥건한데
흡수를 거부당한 채 생쌀들이 누웠다
물갈퀴 가지는 꿈 한 번도 꾼 적 없다
젖은 날개 퉁퉁 불어 꺾이고 뭉개져도
알갱이 그 흔적조차 가긍스레 사라져도
무겁게 가라앉는 노량진 공시생의 길
펄펄 끓어 튀어 오른 푸른 불꽃 확 줄이고
뭉근한 시간을 기다린다 위아래를 젓는다
ㅡ『서정과현실』(2020, 상반기호)
기념타월
얼굴을 닦아주고 젖은 머리 감싸주던
글씨가 흐릿하다, 김끝순님 칠순 기념
올올이 새겨 넣었을 지난날이 풀려 있디
언니에게 치이고 동생에게 양보했을
김끝순 아지매의 보풀 같은 일상들
뽀얗게 삶아내었다, 햇살이 촘촘한 날
ㅡ『釜山時調』(2019, 상반기호)
수국
눈 밝은 별 하나가
지상에 내려와서
울다 지친 초록바다
두고 간 햇살조각
기도실
수녀님 이마
흰 베일을 걷는다
씨앗호떡
남포동 고소한 줄 운촌시장 건너왔다
마흔둘 이력 적힌 노총각의 종이컵
차지게 늘어진 오늘 따뜻하게 담겼다
몇 번을 주물러서 숙성된 햇살덩이
고시원 전전하다 발길이 멈춰있다
씨앗을 가슴에 품어 발아하는 내일처럼
구름이 모여 사는 운촌시장 그 처마끝
뜨거운 프라이팬 버터기름 흥건해도
씨앗은 손길을 따라 한 송이 꽃 부푼다
점멸등
과속으로 내달리던 경부선 고속도로
느리게 깜박깜박 오늘은 걷고 있다
이승에 놓지 못한 끈 앞뒤로 매달고서
스쳐갔던 휴게소에 목련이 희게 진다
과적의 지난날은 가벼이 조문하고
그 뒤를 가르던 바람 껌벅껌벅 따른다
ㅡ『부산여류시조』 (2018, 32집)
짜글이찌개
벗겨지고 구겨진 어제 같은 양은 냄비
새벽이 끓고 있다 오늘이 졸아든다
호명을 기다리고 선 인력시장 귀퉁이
처음부터 자작한 물 침묵에 사라지고
간이 밴 묵은지는 기다림이 뭉근하다
축축한 목장갑들이 연탄불에 둘러있다
짜글짜글 소리도 웅성임도 식어간다
졸아들다 눌러 붙은 벌건 양념 그 위로
눈발이 하얀 눈물이 사선으로 내린다
조가비 팔찌
ㅡ동삼동 패총
밀려 온 파도소리 조개무지에 두고 갔나
수천 년 뱉지 못한 투박조개 울음소리
수평선 둥글게 묶어 손목에다 두었다
밀물로 다가왔다 이내 사라진 얼굴 하나
갈거나 다듬은 길 기다림이 납작하다
살점은 녹아내려도 더 선명한 기억들
ㅡ『부산여류시조』 (2018, 32집)
갑오징어
짙은 바다 휘저으며 방패를 세워둔다
닿지 못해 부러진 창 포말로 밀려오고
몸값이 한껏 올랐다
갑옷까지 두르고
폐지 내는 날 · 2
어젯밤 내어놓은 폐지가 흠뻑 젖어
바닥을 뚫고 오는 냉기가 또 무겁다
예보도 피해 갈 수 없는 길거리의 얇은 잠
부동산에 그은 밑줄 붉은 눈물 번져있다
표제는 흐릿한 채 엉겨있는 기사들
읽다 만 조간신문들 묶인 자국 헐겁다
구호로 공약으로 내려가는 바깥 체온
해가 나면 마를까 아랫도리 아직 축축해
축 처진 폐지 더미 위 집게차가 지나간다
복원 · 14
ㅡ자가격리
나팔을 길게 불어 백합은 목이 쉬고
한낮에도 화려하던 노란 장미 거뭇거뭇
불 꺼진 동네 꽃집은 며칠째 얼어있다
당분간 닫습니다 불편 드려 죄송합니다
유리문에 이슬이듯 갇힌 일상 흘러내리고
꽃집 앞 흰 마스크만 얼굴 없이 오간다
ㅡ영언동인 제8집 『갸웃』(시와소금, 2020)
꼭두서니
대기 시간 깊어지는 인력시장 사무실
초록 덤불 헤집고 보일 듯 말 듯 꽃은 핀다
희뿌연 입김의 행렬 속 가느다란 알전구
새벽을 서성거린 뿌리 같은 발이 붉다
가시가 송송 돋은 빈 줄기의 휘청거림
바닥은 꼭두서닛빛 아침 해가 번진다
어떤 명함
달리는 오토바이가 명함을 휙휙 던진다
비스듬히 내리는 때 이른 진눈깨비
급전이 필요하십니까 즉시 대출 싼 이자
불 꺼진 치킨집 앞 수북한 고지서처럼
폐업 처분 가격 인하 가속력 칼금처럼
가장의 낡은 구두에 추적이는 누런 낙엽
박태기나무
울 할매 어제 흘린 밥풀때기 몇 조각
꽃대 따윈 필요 없어 나무 몸에 붙어 핀다
아범아 밥이 참 곱제 식기 전에 마이 무라
밥심으로 살았는데 살아서 견뎠는데
어무이 이제 이게 어무이 밥줄이라요
링거 줄 자꾸 뜯어버리는 요양병원 98호
ㅡ시조집『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책만드는집, 202
|
첫댓글 -박태기나무-를 울컥하네요.
현실을 위무하는 글들이 가슴을 또 데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