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나 흩뿌리는 겨울비가 쌀쌀맞다. 창밖 잿빛 하늘에 묻힌 가지들의 흔들림이 을씨년스럽다. 는개에 맺힌 물망울이 움처럼 돋아나 매달렸다 날린다. 뒤 공원 낙엽의 젖은 잔해가 번들거리고 길은 봄 길처럼 누웠다. 새해가 되고 철을 잊은 듯 춥지 않은 날이 괴이쩍다.
대책이 본래 있을까 싶지 않은 일로 여전히 말만 시끄럽다. 바람이 불고 추워질 다음 주면 먼지가 사라진다는 일기 예보의 말씀도 그렇다. 맞추는 것도 신통찮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하늘이 내려앉았다. 미세먼지 농도를 알리는 호들갑에도 이제 면역이 생긴 건지 무덤덤한 얼굴이 많다. 마스크를 하지만 이걸로 막아질 일인가 싶어 숨도 갑갑하고 해서 벗어버린다. 원래 풍진세상이거늘 한다.
얼음 구멍으로 물고기를 잡는 산천어 축제에도 망신살이 지폈다. 한 철 장사 망쳤다며 망연해하는 얼굴이 안쓰럽다. 내린 비로 흙탕의 강물이 흘러내리며 준비했던 시설물을 쓸어가 버렸다고 야단이다. 홍수 난 것 같은 겨울 강의 모습에 서늘해진다. 자연을 멋대로 독차지해온 인간의 길이 끝내 저리될까 싶어서다. 얼음 속의 고기까지 끄집어내어 먹으려는 식성의 업이요, 그걸 축제라 이름 붙여 놀이로 삼은 자업자득의 업이라 하면 말이 될는지. 지금껏 잡아먹힌 물고기들의 반격이라고 속 편하게 말 붙여두자.
내 백수살이가 요즘 가시라도 밟은 양 저릿하다. 그래도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늘 황송스럽다. 세상이 좋아지는 건지 안 그런 건지 분별력도 줄어드는 세파에 파묻혀 산다. 소파에 앉아 벽을 마주 보면 온통 먹방, 노래방으로 도배를 하듯 여기저기 화면이 흔들린다. 연이어 광화문과 서초동의 핏발 서린 삿대질 그 뒷마무리 싸움질에 질린다. 법이 보듬는다고 믿어온 세상은 거품 같은 거였다. 천국과 지옥마저 뒤섞으려 하는 것 같으니 망조인가 아노미인가. 그 요지경 통의 세상, 보지 않으려 하지만 꾸벅 졸면서도 자꾸 힐끔거린다.
통학 열차에서 내린 들녘은 사방이 캄캄했다. 까까머리의 교복을 뚫는 칼 같은 북서풍이 매서웠다. 길섶의 짚단에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헉헉대며 개울을 건너뛰었다. 허깨비가 나온다는 곳이었다. 헛 고함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줄행랑치듯 뛰기도 했다. 횃불이 타다 바람에 홱 꺼지면 더 오싹했다. 어른들이 이야기해 준 그 허깨비는 유년부터 날 따라다녔고 밤길엔 늘 소름이 돋곤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은 더 그랬다. 해코지를 한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도 두려웠다. 언덕길을 돌아 가물대는 마을 불빛이 보이면 그제야 마음을 놓곤 했다.
꾸벅대며 옛 허깨비 이야기에 빠졌나 보다. 다시 요지경 통이다. 오늘도 하늘은 희뿌옇다. 이제 푸른 하늘 보는 게 별난 날이 되어가려나 보다.
낮에 친구들을 만났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돌아다니다 지하철을 탔다. 입에 들어간 밥알이 튀어나올 만큼 말들이 격했고, 우리도, 스치는 군상들도 얼굴은 찌푸린 날씨였다. 세상일이 왜 이리 뒤숭숭하냐고 했다. 돌아다녔건만 체한 것 같은 속은 여전히 그대로다.
한강 물 옆 큰집이 괴상하다.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발광이 더 심해졌다. 튀어나오는 말들이 허깨비들의 말과 같으니 허깨비 집이다. 패를 갈라 다투는 의원 나으리들 노는 품새가 가관이다. 적폐 척결한다며, 개혁한다며 눈 부릅뜨고 내지른 말도, 나랏법 만든다면서 서로 삿대질해온 그 수많은 말들이 끝내는 제 밥그릇 붙들려는 것이었다. 칼자루를 차지하고 몫을 나누는 거였다. 그 세의 싸움이 이제 으스스하다. 허깨비가 나온다는 내를 건너뛰던 시절 같은 두려움에 붙들려 산다. 나는 어디로 뛰어가면 좋을지 길을 모르겠다.
북악산 기슭 그 푸른 집에서 내지르는 소리는 더 요사스럽다. 내세웠던 평등, 공정, 정의, 그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헛갈린 지 오래다. 그 집은 자칭 선량도, 포졸도, 이미 탈색한 법복도 모두 휘어잡고 갑남을녀의 생사여탈도 나랏돈 풀어 안기며 틀어쥐려는 괴물의 성으로 바뀌어 간다. 그 성에서 “우리 편의 죄는 죄가 아닌 걸로 만들자.”며 빼든 칼에 불꽃이 튄다. 핏발 선 날이 선득하다. 거창하고 고상하게 민주화를 부르짓던 그 입들이다. 애오라지 능글맞은 북쪽 젊은 사내의 번들거리는 얼굴을 보며 춤을 춘다.
아, 이건 분명히 허깨비 세상이다. 온전한 세상이 이럴 리 없는데, 하늘과 땅에 변고가 생긴 거다. 북쪽 허깨비, 남쪽 허깨비가 제 갈대로 추어대는 춤이 사위스럽다. 이 허깨비 집을 지나야 하는데 불붙여 들 짚단도 풀어 흩어지고 오라기뿐이다. 그 개울 위쪽 솔숲의 상엿집처럼 음습하다. 희뿌연 하늘이 내려앉은 앙상한 겨울 숲을 걷는 길이 갑갑하다. 허깨비가 차지한 세상 봄은 어떻게 오려는가. 아직 내게는 해코지를 하지 않아 밥이 목줄을 타니 황공무지로소이다. (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