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프로페셔널(외 4편)/ 권현지
제25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_ 심사위원 : 이영주, 박성준
프로페셔널 외 4편
권현지
겁 많은 빨간 목도리 안으로
한쪽 눈만 보여주는 표범 무리가 있다
의심스럽게 반짝이는 숲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물 위로 떠다니는 구멍 난 치즈처럼
맨다리의 촉감을 생각하며 준비운동을 한다
호루라기를 문 오리들의 삐, 신호음이 들려와
나는 연못 안으로 뛰어든다
움직이면 조금 더 커지는 바다를, 떠올리며
바닥 위로 자라나는 가시들은 온통
촉감 인형처럼 간지럽다
양동이를 뒤집어쓴 마을은 내게 걸어온다
온통 머리는 하얗고 들판처럼 투명하다
나는 두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으고
조금씩 작아지려는 태아처럼,
피리들의 아지트 안에서
빈 병을 바라본다
너는 이제 울어야 해,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식빵의 마음으로
트리 위에 양말을 걸고 싶다
저 멀리, 검은 표범을 타고 파란 수염의 여자가
달려온다 돋보기로 나를 확대한다
나는 인중을 최대한 오므린다, 눈을 가운데로 모은다
그러나 웃을 때 치아가 보이지 않는 콤플렉스는
가장 높은 빨간 에나멜 구두가 되고 싶다
조금씩 방향을 다투어 회전하는 숲들
진열장은 휘청거리고, 병들은 바닥 위로 굴러떨어진다
유리 파편 사이로 집게를 버린 전갈들
유심히 나를 바라본다
양파의 시간
새파랗게 돋아나는 양파의 싹은 왠지 불안했습니다
물안경을 쓰고 커피 하우스를 지날 때
나무에서 떨어진 부엉이 한 마리
정도껏 날았어야지, 너 어쩌다가 내 손에 담겼니
다리가 부러진 부엉이를 가방 안에 담고
지퍼를 올리면, 폭죽 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군가의 결혼기념일 같습니다
초콜릿 케이크 위 빨간 리본을 풀듯
나는 재빨리 재킷을 벗습니다
온몸에 크림이 묻었습니다
조용한 숲으로
뒷짐을 진 두 손으로
말 걸고 싶은 고목들에게 다가갑니다
흔들리는 잎사귀들, 손전등으로 비추면
침묵의 웅덩이 밖으로 거기,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양파
새파랗게 돋아나는 양파의 싹
파란 세계를 꿈꾸는 뒤통수는
바라보면 눈물이 납니다
울면서 크림을 핥아 먹습니다
이제, 요리할 시간입니다
트레비 기차
눈 가린 말들의 혼잣말이 들려와 나는 트레비 호수에 동전을 던진다
가늠할 수 없어서 이것은 몇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기차입니까
퍼레이드를 향해 나아가는 기차가 있다 코코아를 마시면서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가정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모두가 잠든 새벽으로부터 기차는 망토를 끌어모은다 불꽃이 터지고, 타오르는 바퀴들은 누군가 잃어버린 기억 같아서 나는 유령이라고 명명한다
지붕 위로 올라가 탄산수를 마시며 기차의 행렬을 내려다보는 소년, 그 맨발을 올려다보는 당신의 뒷모습은 투명망토를 닮았다
말의 고삐를 잡고 밤의 언덕을 오른다
오늘의 창문 위로 말굽 소리가 당도하면, 안대를 벗고 거울 앞에 선다
당신과 맨 얼굴로 면담하고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곳은 수감된 자들의 노래가 들려오는 감옥, 수인번호들이 절벽 위로 기어오르고
내가 내민 손가락을 잡는다면 이 기차는 다시,
달려나갑니까 동굴 속 괴한들이 묻어놓은 안전모는 이제 영원합니까
주머니 속 지도는 폐기되었고, 칸막이 뒤로는 밤의 테라스가 있다
아무도 먹지 않은 빛나는 접시,
조금씩 거대해지는 퍼레이드의 행렬, 거리의 악사들은 퍼레이드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유령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당신은 즐거운 퍼레이드의 행렬로 나아가는 중이다 거울 위로 서로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아이들, 자라나는 꼬리들,
태어나는 문장들을 다독이면서, 방향을 더듬으면서
이것은 가늠할 수 없어서 몇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기차입니까
트레비 동전들 기억을 반추하며 젖은 망토를 끌어모은다
비상구
노랑
노랑
쏟아진다
입 벌려
혼돈 속에서 납작 엎드려 있어
휘날린다, 언덕들의 몽유
긁는다고 열리지 않아
우편함 속에서 쓰다듬고 싶어
소리 나는 조개껍데기 밖으로
헝클어진 그림자, 기어 나온다
맞이할 팔은 짧아서
티셔츠의 구멍 밖으로
다락의 검은 쥐들이 들락거리는 14월
알람은 울리지 않고
생일도 까먹을 수 있어
자꾸만 닳아가는 케잌 위의 작은 초들,
괜찮아?
목걸이를 물고 달아나는 부리가
내 이름표를 놓칠 때
둥지를 파헤치는 손등
무덤을 바라보는 부러진 안경 위로
올라가 피리를 분다
구멍 사이로 흘러내린다, 아이스크림
발룻(Balut) *
요트 안으로 멈춘 오후 3시,
당신을 내려다보며 파라솔 위의 점심을 추억하는 중이다
피의 사원으로 나온 여행자 가족들은 즐거운 저녁 메뉴를 떠올린다
거리의 산책자처럼, 당신도 유유히 흘러가는 중이다
금발의 여인들은 받침을 걸친 듯 비문 없는 완전한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구두를 잃어버린 주인처럼, 당신은 가끔 고독에 합류한다 이편을 향해 탈출하고 싶다
방전된 핸드폰 안으로는 소속되지 않은 전화번호들이 넘쳐나고, 당신은 언제나 번호들을 폐기하고 싶지만
들개들이 기지개를 켜는 오후는 지루하다 긴 소매의 구멍, 검은 제복을 입은 신부들의 목청에서 성가의 화음이 지붕을 휘감으면 역사는 반추되는가 액자 위에 걸린 왕비의 붉은 웃음은 사진 안에서만 영원히 흡혈하는가
초상화의 액자 위로 빛이 반짝, 이면 사원의 과실수는 허기를 느낀다 사과 한 알이 바닥 위로 툭, 떨어지면 균열 사이로 노을이 깃든다
유폐된 요트로부터 해가 들어서면 당신의 하루는 천천히 시작을 더듬는다
당신에게는 냄새가 없다 달걀의 얇은 막처럼,
주머니를 뒤집으면 말라비틀어진 담배 한 개비가 만져질 뿐이다
네바 강을 바라보는 요트 안의 시체
녹슨 캠벨 통조림과 말라비틀어진 과일 조각
염분으로 보존된 책상 앞의 시선은
녹슨 철제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파라솔이 접힌다
당신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부화 직전의 발룻.
*발룻(Balut): 부화 직전의 오리 알을 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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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현지/ 1991년 경기도 시흥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와 대학원 문예창작과 전공. 2016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2016년 《시로 여는 세상》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