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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의 塼塔에대하여
고유섭
중국·조선·일본의 건축을. 그재료 물질의 복색에서 말한다면 중국은 벽돌(甓)의 나라이며 조선은 돌(石)의 나라이며 일본은 나무(木)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낙랑(樂浪)시대의 전축(塼築) 고분(古墳)과 그 영향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공주(公州)의 백제중기 무렵까지의 근소한 전축, 고분이 두 예를 제외한다면 조선에 순수한 전건축은 없다. 물론 삼국이후 부전(敷塼)으로 벽의 벽전(甓塼)으로 기타 부분적으론 사용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실로 귀족적인 계급성올 갖고 있어 중국에 있어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평민 계급까치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전은 궁아(宮衛)·궁전·사원에만 사용되었고 또 부유 사족(富裕士族)의 저택에서 일부 사용되었다(士族이더라도 부유하지 못하면 사용치 못하였고 常民은 부유하더라도 사용치 못 하였다. 그만큼 조선에서 博은 매우 계급적이며 또 귀중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와같은 사정은 전(塼)이 조선에서 비생산적인 재료이었음울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역사상에서 보아 삼국후기에는 전건축올 다시 보지 못하였고 신라 통일전후부터 전건축에 대한 각성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도 진정한 전전축은 아니고 전을 의(儀)한 석재로부터 시작하였다. 즉 그 가장 좋은 예를 우리들은 경주의 분황사(芬皇寺)탑과 그 부근에 있는 깨어진 탑의 재료에서 알 수 있다.
분황사탑은 선덕왕(왐德王) 3년(634년) 분황사 낙성(落成)의 기사가((삼국사기》에 보이고 있어 거의 당대의 유구(遺構)로 보이는 것이며((동경잡거(東京雜記)》에는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서 구층탑이던 것을 임진란에 그 절반이 봉훼(崩毁)되고 후에 우승(愚僧)이 수축하려다가 또 기반을 붕훼하였다고 있어 일찍부터 이탑의 층이 문제되어 있었는데 이는 도리어 문제 삼는 편이 기이하여 신라삼보의 하나로서의 구층탑이란 것은 실은 황용사의 목조구층탑으로서 분황사탑은 아니었다. 이것은《삼국유사》나 《고려사》를 읽어도 알 수 있는 일로서《동경잡기》가 분황사탑울 신라삼보의 하나라고 한 잘못은 그 유래한 바가 분명하지만 전혀 취할바 못되는 설로서 분황사탑의 층이 다론 문헌에 보이는 예가 없으므로. 9층이었는지의 여부는 의문에 속한다. 이강은 잘못 전해진 속설에 잡혀서 성설(成說)하는 어리석음은 지금도 종종볼 수 있으나 차차 반성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1층탑선이 너무나 방대(庬大)하여 현재의 3층형식으로서는 아부리 하여도 조화가 나쁘다는 점에서 혹은 5층이었을 것이라하고 혹은 7층 혹은 9층으로 추정하는 것은 좋으나 이상한 이도라에사로 잡혀서 설명하는 것만은 경계하여야 될 것이다.
그런데 본론으로 들어가 현재의 분황사탑은 왕년 총독부의 손으르 완전히 수축되었기 때문에 다소 원형(原形)을 손상한 듯 하므로 수축 이전의 모양을 보기로 한다(關野貞韓國建築調査 報告에서)。「기단(基壇)은 원래 석축이었으나 지금 모두 파괴되어 크고 작은 석재는 그 주위에 산란(散亂)되었다. 그 잔존하는 석재에서 보건대 단상적(I壇上積) 인듯하다. 탑신은 기단위에서 있고 지복석(地覆石)은 화강석으로서 그 이상은 모두 갈흑색(褐黑色)의 작은 석재로써 축조하였다. 석재는 길이 2촌내지 8촌 두께 2촌 5분 내지 3촌(幅은不定)쯤으로서 거의 연와석조(煉瓦石造)와 같다. 무릇이 석재(石材)는 일종의 안산암(安山岩)으로서 대개 45분의 두께로 벗겨내기 용이함으로써 견치(堅緻)하더라도 이와같은 크기의 석재를 만둘기에는 그다지 곤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돌 사이 잠에는 시멘트를 사용한 듯 하여 그 견고함이란 놀랄만하다.
탑신 1층의 크기는 넓이 21치 4촌 5분、높이는 지복석위 8척 6촌으로 이 높이를 34단으로 나누었다. 추녀는 석재를 차차 더 많이 나오게 일곱 번하여 그 형을 이루었다. 제2층 제3층은 점차(潮次) 크기가 줄어지며、또 높이도 매우 낮다. 이는 층층의 크기를 줄여 안정·장중(莊重)의 관(觀)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1층4면에 입구 모양 만들어 양축에 장방형 대석을 세웠고 그 위에 미석(眉石)을 얹었다. 단 서방에는 석비(石扉)를 베풀고 상하에 작출(作出)한 《축회(軸廻)》로써 열고 닫는다· 내부는 대체로 넓이가 5척쯤으로 지금은 많이 무너졌다. 입구 양측의 넓은 석면에는 모두 인왕상(仁王像)을 반육조(半肉彫)로 각출(刻出)하였다. 그 모양이 웅건(雄健)하고 다소 일본 죠오오꼬꾸사(長谷寺) 천체불동판(千體佛銅板)의 인왕(仁王)과 유사하고, 소열(少劣)하나 당시 천부조각(天部影刻)의 표본으로 진기한 것이다. 귀퉁이에 석조사자를 안치하였는데 높이는 대석은 제하고 4척쯤인데 상모(狀貌)가 매우 웅위(雄偉)하다. 아마도 당시 이 종류의 조각의 종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갈이 흑색의 작은 석재를 진양(塼樣)으로 끊어내어 그것을 전탑에 의(擬)하여 조축한 것은 명백히 전건축에의 지향(志向)을 표시한 것으로 그것이 이 한 탑에만 그치지 않고 또 한 탑이 있는 점으로 보아 전이 얼마나 비생산적인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탑이라 함은 분황사 동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름 없는 절터의 폐탑재(廢塔材)로서 후치시마(藤島亥治郞)박사의 기술에 의하면
(l)안산암의 소석재를 사용하고 중국전탑을 모방한 것
(2)금강역사(金剛力士)를 조각한 평석(平石)은 폭 3·2척 높이 4.43척으로 미석을 걸치기 위하여 상부를 소결(小缺)한 점에 이르기까지 분황사석탑과 동일한 점(분황사탑에 있어서는 폭 2.45尺 높이 4.4전
(3)금강역사의 양식기교가 모두 분황사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고 에술적 가치에 있어서 그에못지 않아 제작연대 또한 감은시기로 인정되는 점
(4)토단(土壇)의 크기는 약 40척평방으로서 분황사 탑기단의 크기와 대략 갈은 점 이상의 점에서 필자는 본탑의 형상양식을 분황사탑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믿고 싶으며 건립연대 또한 분황사 석탑과 전후하는 것으로 두 탑중 어느 하나가 다른 탑을 모조하였을 것이다.
즉 암석을 이와 같이 절단하여 탑을 쌓아 울린다는 것은 그 노력(勞力)에서 보아 도저히 전을 사용하는 것과 비할 수 없고 또 경제상으로도 불리하였을 것임에 블구하고 두 탑이나 축조하였다는 것은 한때의 기분적인 취홍(醉興)은 아니고 명백히 전의 비보편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당시 전이 아주 없었던 것을 아니다. 《삼국유사》에는 같은 선덕왕대에 석양지(釋良志)라는 자가 있어 소전탑을 새겨 식장사(錫杖寺)에 안치하고 치경(致敬)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전방 그자체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으되 요컨대 그것은 공예품으로서의 소탕으로서 아직도 건축적인 구성 융성취할 만큼 전의 보급은 없었던 듯하다.
이 같은 상대에서 전이 하나의 완전한 건축을 구성하계 된 것은 그 유문에서 보아 동일 초로부터였다고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 제일 좋은 실지 예로서 안동군(安東郡) 안에 약간의 전탑이 남아 있어 현재 읍내의 두 탑과 일직면(一直面)의 한 탑은 이미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진 명탑이며,:길안면(吉安面)· 남후면(南後面)에도 또 각 하나씩 있다고 하나 그 진부(眞否)는 불명이다. 안동군 안에 전탑이 그와 같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좀 불가사의 한 현상으로서 그같은 이유는 추적할 수는 없으나 후지시마(孫島)박사는 「불행이도 문헌이 결제(缺除)하나 안동이 사찰로 가득차 있어 성관(盛觀)을 이루던 시대에 중국 전탑을 직접 본 승려 또논 공장(工匠)이나 혹은 당으로 부터 도래한 공장 둥이 어떤 종교적 관계로 이 군에 재류(在留)하여 유력한 자금을 얻어 이 조선으로서는 웅대하다고 평한 평한 7층, 5층의 전탑을 조립(조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매우 방원적인 1주청올 내리고 있다. 여하간애 지금 안동군 안에 있는 전탑은 조선에 있는 전탑 중 제일 오랜 것이며 우수한 것이라 하겠다. ri중에서도 신세동(新世洞)의 7층탑파가 대표적인 것이다. 절은 황폐하여 이름(寺名)도 알 수 없으나 시제동의 소자명(小字名)이 법흥동(法興洞)이므로 혹은《동국여치승람》24권의 안동불우조(安東佛宇條)에 〈법흥사 재부동(法興寺:在府洞)이라 보이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나 아닐까 한다. 이 추정은 대체로 맞는 것으로 선조(宣祖) 41년(l608)에 간행되었다는 안동의 고읍치 (古邑誌) 영가지(永嘉誌)에도 신세리 법흥사의 구절이 있고 안동의 고여지도(古輿地圖) 에도 법흥사라는 것이 바로·현재의 탑파위치에 해당하므로(《朝鮮の 風水》 참조) 늦어도 선조41년까지는 법흥사의·보탑(寶塔)으로서 공양(供養)이 끓이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수리되었고 주위에 민가도 위집(蝟集)하고 있여 매우 미관을 손상하고 있으나 높이 48척이나 되는 고탑인 만큼 와부탄(瓦釜發)의 안두(岸頭)에 위연(巍然)히 솟아 있는 그 위관(偉觀)은 실로 볼만하다. 민간일부에서 이같은 전탑을 몽고탑이라한다하여 무지를 조소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러나 본인은 그들의 무지를 비웃는 것 보다 그 매우 비조선적인 만주색(滿洲色)의 건축조형에 대한 적절한 평어(評語)로서 도리어 그들의 돈지(頓智)에 경탄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 만큼 이 탑은 비조선적인 감을 나타내고 있다. 무문(無紋)의 전을 당당히 쌓아 올리기 7층인데 옥개의 상단형은 처마 아래의 받침보다 한 두 단 높고 곳곳에 와즙(瓦葺)의 흔적을 남기고 최정상에는 노반(露盤)을 남기지 않고 옥개형으로 하였다. 실로 투명하고 웅건한 팁이다. 1층 탑신에는 남면에 감실(龕室)을 만들고 실내 천정은 사방으로부터 단형(段形)으로 받쳐 울라가 최후에야 약 1척 6촌각의 구멍을 만들어 상방으로 길게 관통케 하였다. 아마도 찰주(擦柱)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없다. '이와같이 이 탑은 통일초의 대표적전 탑이나 또한 순수한 전탑은 아니다. 그것이 기단에서 증명된다. 즉 기단은 원래 2층이던 듯하여 상단은 지금 시멘트로서 만두형(饅頭型)으로 보강하여 매우 체제가 나쁘지만 그것은 별 문제로 하고 하단은 화강암으로 구성 되어있다. 높이2 척6촌4분,목2척7촌 크기의 판석에 천부 (天部)의 좌상을 준경(遂勁)히 부조(浮彫)한 문울 전후 도합 l8배를 세우고 있는데 이같은 기단은 지면으로부터 전으로써 축상하는 중국의 전탑의식과 약간 다른 것으로、즉 여기에 조선적인 돌에의의식이 미련스럽게도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사실은 같은 읍내의 다른 한 탑에 의하여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즉 읍 남쪽에 있는 5층 전탑인데 이곳에는 찰간지주(刹竿支柱)가 남아 있으나 절터(寺域)는 또한 황폐하여 그 이름도 미상이다. 혹은《여지승람》에 (법림사재성남(法林寺在城南)》이라 있음에서 그에 해당시키고 싶은 생각도 있으나 그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이 탑은 높이 약 28척으로 전자에 비하면 매우 낮지만 조선에서는 고탑의 하나라 할 것이다. 전으로 1층 탑신부터 축상하였고 옥개에는 와층이 남아 있으며 정상에 노반이 없고 옥개형으로 와즙하고 있음은 법흥사탑과 같은 수법이니 처마의 받침이 매우 높고 그에 비하여 옥개 면이 얕은 것은 조형감정(造型感情)에서 보아 매우 천박하다. 현재 l충 남면에 감실을 만들고 제2층 탑신 면에 인왕입상 두 구를 고육조(高肉彫)한 암석이 감입(嵌入)되고 제3층면에는 작은 감실을 만들었는데 그 구조는 단순한 성자형(箱子型)으로서 전기 한 법흥사탑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다. 실내에는 물론 아무 것도 없으나 기단이 또한 암석작(岩石作)이며 탑신의 지복석에 화강암을 이용하고 감실 입구의 연광(緣框)도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은 아무리 하여도 돌을 잊을 수 없었던 조형(造型)이다. 이같온 돌에의 미련이라할까 애착이라 할까 그 같은 것은 요컨대 전의 사용법을 충분히 소화 못 한 점에서 기인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선라인이 용전번(用塼法)올 충분히 구사(驅使)하기 전에 벌써 저의 귀중성은 무문전(無紋塼)으로 부터 유문전으로 옮아감으로써 배가(倍加)되어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를 우리들은 일직면 조탑동(造塔洞)의 5층탑에서 본다. 그형식은 대체로 법림사탑과 유사한데 감실온 재1 탑신에만 있고 그 입구 양측에 준경(遵勁)한 인왕 입상석이 감입되어 있으며 기단은 다른 예와 같이 붕괴 되어 토대(土臺)만으로 되어있다. 가람(伽藍)도 또한 황폐하고 야원(野原)에 홀로 정정히 서 있는데 1층탑선 그 자체가 앞의 그 둘과 달라 화강암의 잡석적(雜石績)으로 되어있고 전은 옥개상으로 부터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면(地面)에는 참으로 유려한 당초무늬를 부조하고 있어 사치하고 귀족적인 탑이다. 이 탑을 한 전기(轉機)로 하여 이후 유문의 전탑이 다소 전립되었다. 청도군 불령사(佛靈寺)에 있는 전탑은 지금 도괴되어 전만이 집적(集積)되어 있어 탑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그 전면에는 당초와 불상과 탑파 형이 부조되어 있는 점에서 신라대의 전탑 중 유명한 것이 되어있다. 이탑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삼국유사》에 하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是啟師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縣地 乃思海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塔塼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殆塼 知是前代伽藍犍也 畢創寺而 住焉 因名鵲岬寺>
라 하였다. 전성이기논 하나 원래 5층의 전탑이었릏 것이다. 신라말 고려초의 설화이나 전은 신라 중기 무렵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풍림없이 신라시대예 속하는 것이 었는데 여기예 문제되는 유문전답 하냐가 있다. 그것은 경기도 여주(關州) 신륵사(神勒寺)의 5층 전탑이다.
이 탑 전면(塼塔)에는 반원형 중권(重圈)안에 보성화(寶相華)가 섬려(織麗)하계 부조되어 있는네 그 연대에 대하여는 세까노(關野)박사가 한 번 통일 초의 것이라고 한 후로는 일반이 그대로 신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한 번 으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일찍이 고(故) 이마니시(今西龍)박사는 다이소(大正)5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서、
< 5중 전탑은 전표면에 3조화 무늬를 양각한 것욜 혼잡하였다. 이 축조의 당초에는 전부 이 무늬를 사용하였을 것이나 후세 수보(,修補)때에 무문(無紋)의 것올 보입(補入)하였을 것이다. 근대 이 탑에 대수선을 행한 것은 단축에 있는 중수비기(重修碑記) 에 상세하다. 이 탑은 형자(形姿)가 우수하고 전의 무니 또는 아름다우나 아직 이것을 신라시대의 것으로 인정한 정중(徵證)을 소유하지 못하고 전(塼)의 무늬 같은 것은 도리어 고려의 형식이 있어 아마도 고려말의 건립이나 아닐까? 단 탑의 가치는 연대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이탑을 그와 같이 의심한 것은 유독 이마니시(今l:'.!l)박사에만 그치는 듯하고 별로 다른 선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다분히 진리가 있는 것으로 경청(傾聽)할만한 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먼저 제1로 이 신륵사의 창건연대에 관하여 당사(當寺)에 현존하는 우왕(禑王) 5년(1483년)의 보제선사(普濟禪師), 사리석종(舍利石鐘) 비문에는 신라의 유규(遺構)를 말한 아무런 기사가 없고 다만 <신륵사유보제대관도장장ㅇ영세불추> 우운이라 있어 고려 말기로부터 번성한 듯 기록되어 있다. 이조에 들어서도 김수온기(金守溫記)애<昔玄陵王師懶翁 韓山牧隱李公二人相繼來遊 由是寺
遂爲畿左名刹>이라 있고 영조(英祖) 2년(1726년)에 수립된 탑의 중수비문에도 <神勒之刱 미상하대 玄陵王師懶翁 與韓山君來遊 遂爲名籃>이라 하였고 김병기(金炳翼) 중수기에도 (神勒之爲寺 刱自麗代懶翁之所主席 自雲之所留詩 又留牧隱諸賢之所題記>라 있어 모두가 고려대의 도량(道場)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며, 아무도 신라대의 가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현재 또한 신라 시대의 가람으로서는 너무나도 유물을 남기고 있지 않다. 탑파를 신라시대의 것이라 하면 그에 따라서 적어도 어떠한 동대(同代)의 유물을 남기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그런 듯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 초석이 남아 있으나 그들은 모두 고려대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뿐이다.
다음에 또 탑 자체에 대하여서도 중수 비문에 <舊有塼塔鎭其相傳爲懶翁塔 見於挹翠諸賢詩語者 亦可訂矣>라 있을 뿐인데 이것은 현재의 전탑 앞에 3층석탑이 있어 이것이 나응(懶翁)의 사리 일부를 넣은 묘탑(墓塔)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이,-지이탑이 바뀌어 5층전탑은 나옹탑이라고한 세간의 오류를 정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탑을 나옹탑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것이 신라의 유구(遺構)이냐 고려의 유구냐함 대하여는 적혀있지 않으므로 이 비문을 떠나서 시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여기에 문제의 해결은 형식에 관계 되는데 새끼노(關野)박사나 기타 같은 의견의 인사들과 감이 치금으로 부터 210년 전에 완전·히 개축된 탑을 가치고 감축률(減縮率)문제로 삼는다든지 층의 받침을 문제로 한다든지 기단을 문제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는 무늬 형식에 있는데 이것은 이마니시(今西)박사와 같이 섬약(纖弱)하여 하등 신라시대의 징증을 인정키 어렵다고 한다면 그만이치만 나의 의견으로도 전의 무늬 형식은 차치하고 기단을 갖고 논한다면 그 형식은 문제 1밖이지만 석재의 형으로 보아 영조(英祖)시대의 것으로는 볼 수 없고, 물론 또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더욱이 볼 수 없고 고려말기가 대략 온당한 듯이 보인다. 대체 세끼노(關野)박사나 후치시마(藤島)박사는 조선의 전탑을 모두 신라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며 더욱이 후치시마박사는 조선에서 전탕이 건립된 것은 겨우 신라시내의 그것도 안동과 여주에만 한정되었다고 까지 한정적으로 단정하고 있는데、결코 이와같이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한정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기술한 불령사(佛靈寺)의 전탑이라는 것은 안동군과는 방향이 다론 청도군 안에 있고 또《여지승람》 49권、갑산산천조(甲山山川條)에는 <백탑동유전탑 (白塔洞有地塔)》이라 있고 25권 영주(榮州)의 고적조(古跡條)에는 무신탑(無信培) 이라고 부르는 전탑이 군내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조애 정습인(鄭習仁)이란 지가 지군(知郡)이 되자 그 무신이라는 명칭이 비윤리적임을 꺼려 탑을 허물고 그전으로써 빈관(賓館)을 수리한 기사가 있다. 이나중의 두탑은 시대는 미상하치만 전탑을 지방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닌 유력한 예중(例證)이다. 또 시대적으로도 한정하여서는 아니 될 예로서 《여지승람》10권 긍천불우조(矜川佛宇條) 안양사(安義寺)에 <寺之南 有高麗太祖所建七層甎塔>이라 있어 이숭인(李崇仁)의 중수기가 실려 있다고 한 구절에
<昔太祖將征不庭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采 異之 使人往視 果得老浮屠雲下 名能正 與之言稱旨 此寺之所出立也 寺之南有塔 累甎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毎壁繪佛扶隆 人天之像 外樹楯楣 以限出入 其爲匝麗 他寺未有也>'v
라 하였다. 고려에도 전탑은 훌륭히 있었다. 현재 총독부박물관에 rJ탑에서 붕괴된 전의 조각이 보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탑전의 한 양식을 모방하여 불상을 부조하고 있다. 이 같은 예에서도 여주의 전탑을 곧 신라대의 것으로 하는 이유는 없는 것으로 다시 한민 신중한 고찰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여간 위와 같은 예에서 보는 바와같이 조선의 전탑은 요컨대 순수한 전건축이 아니었음이 알려진다. 또 그것은 신용건축에 전건축이 없었을 뿐 아니라 종교직 예술품이 라고 할 탑파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전은 조선에 있어서는 하이칼라한 귀중한 것이다. 그러니만큼 적어도 종교적 예술품인 탑파에 있어서라도 순수한 전조(博造)가 있었을 법도하치만 아깝게도 마침내 그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은 도괴 되었지만 상주읍(尙州邑)밖에진 석심토피(石心土皮:)라는 다른 양식의 5층탑파가 전탑형식을 모방하려하여 건립되었다고 하는 도리어 비극적인 예도 있다. 요컨대 전은 조신의 것이 아니었다. 전탑형식도 그것이 석재에 의하여 번안됨으로써 비로소 조선다운 형식으로 되었다. 필경 조선은 전의 나라로 되지 못하고 물의 나라로서 그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