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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와요?]
“아.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아. 응.... 알겠어요.]
“미안.”
전화를 끊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서류를 펼쳤다.
3분기 결산 종목.
제목을 몇 번이고 읽었다.
“후.....”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파일을 덮고 책상 한 구석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몇 분간 혼자 이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비서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컵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오빠. 좀 마시고 해요.”
“회사 안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 맞다. 헤헤....”
그녀가 기분좋게 웃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행동 몸짓 하나 하나에 이렇게 반응하는 내가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알면서도 하게 되는 나를 내가 용서할 수 없었다.
철없는 십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애를 한창 즐길 이십대도 아닌 내가 이러는 게.
“오늘 뭐 해?”
“오늘이요? 상무님이 야근하라고 아까 서류 엄청 떠넘긴거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렇지.”
“뭐야.”
또 다시 피식 웃어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또 다시 설레이고 말았다.
예전 아내의 모습과 닮아서 자주 놀란다.
웃을 때면 휘어지는 눈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는, 옅게 립글로즈를 칠한 입술이.
“끝나고 밥 같이 먹을까?”
“네?”
그녀는 담담한 내 표정에 약간 놀란 듯 했지만 이내 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밥 안 드시게요?”
뜨끔 했지만 당황함도 잠시 입에선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오늘 와이프가 모임 있대서. 그리고 오랜만에 학교 선후배 기분 좀 내보는 것도 좋잖아.”
“뭐 그렇다면 전 찬성이에요! 상무님이 쏘신다면 저야 안 갈 이유가 없죠.
안그래도 요즘 맛있는 거 먹어본 지도 오래 됐거든요.”
내가 한두 마디를 하면 항상 신나게 재잘재잘 말하는 그녀였다.
그러면 나는 그 밝은 목소리에 기분좋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에서 아내가 묻어 나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반했던, 그 여고생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그러면 오늘 야근 안 해도 돼요?”
“글쎄. 봐서. 큭..”
자꾸만 장난을 걸고 싶어지는 것도..
일부러 무섭게 굴다가 자상하게 구는 것도..
다 미치도록 짜증났다.
내 자신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어디로 갈래?”
조수석에 탄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 덕분에 그녀의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
불안하기라도 하듯 운전대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큰 눈을 깜빡이며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포장마차요!”
“포장마차?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에이. 안 그래도 돼요. 비싼 건 사모님 사주세요. 전 분식이 맛있어요.”
결국 차를 다시 주차장에 세워 두고 회사 근처 포장마차로 걸어갔다.
옆에서 걸어가는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발걸음이 꽤나 가벼워 보였다.
먹을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것처럼.
천막에 들어가 떡볶이 2인분과 순대 2인분을 시켰다.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는 내가 웃겨 보였다.
“안 드세요?”
“먹어야지. 그런데 너가 너무 잘 먹잖아.”
“오빠도 참. 대학 다닐 땐 자기가 사 줘도 남은 못 먹게 하더니, 이제는 사람이 좀 착해지셨네요.”
“그래?”
정말 희한하게도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그녀였다.
사진부 동아리 후배였던 그녀가, 비서로 들어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반가웠는지도.
대학 다닐때 느꼈던 그 이상한 설레임이 또다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엠티 가서 티격태격하며 같이 요리했던 기억, 동아리 모임 때마다 누가 더 먼저 취하나 내기했던 기억,
동기 녀석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내게 고백했던 기억, 그리고 졸업할 때 그녀가 누구보다 먼저 전화해서 보고싶을 거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예진이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포장마차에서 몇 시간동안 마시고 마시고 하다가 집에 들어왔다.
잠겨 있는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는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기다리다 잠들어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다.
조심스럽게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고, 스위치를 키고 보는데 당황스럽게도 식탁에 홀로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로, 흐트러진 자세로 금방이라도 엎어질 듯이 앉아 있는 아내가.
“뭐해?”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 그거였다.
말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아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뭐하긴. 술 마시잖아요.”
우선 의자를 빼 그녀 앞에 앉았다.
발 끝부터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까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언제부턴가 그녀의 두 빛나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오밀조밀 움직이던 입술도 닫혀 버린 채 말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결혼해 달라고 할 때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안아주던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언제부터 마셨어?”
“아까요.”
딱 봐도 아까부터 마신 것 같진 않았다.
취해서 귀가 붉은 것을 봐도 그랬다.
“회사 사람들이랑 또 회식했어요?”
“응. 이번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서.”
“회식 같은 거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그녀는 내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감당할 수 없이 슬픈 목소리로.
마음 같아서는 왜 그러냐고 물어봐야 했는데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자. 그만 마셔.”
나는 싫다는 그녀에게서 잔을 뺏어 들었다.
그 순간 나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얼마나 무겁게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오빠!”
어깨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생머리.
즐겨하던 오렌지빛의 귀걸이.
어리게 보인다며 입던 나풀거리는 치마.
어딘가 지독하게 익숙했다.
“오빠! 왜 딴 생각 해요?”
나는 정신이 들어 내 옆에 서 있던 민아를 쳐다보았다.
“미안. 정신 좀 팔았다.”
“오빠. 우리 여기 들어가요. 안에 있는 곰인형들 정말 예쁜데.”
“여기?”
“우리 여기 한 번도 안 가봤잖아요.”
“그래. 들어가자.”
“맘에 드는 거 있으면 선물로 하나 사 주면 안돼요? 헤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통의 이메일이 날라왔다.
계속 보내도 답장이 없었던 메일 주소로.
제목 없음을 클릭하고 스크린에는 검은 글자들이 떴다.
나 예진이에요.
잘 지내요? 미안해요 연락 계속 안해서.
일부러 그랬어요. 오빠가 용서하던 말던 난...
그렇게 시작된 글은 너무나 간단하게 끝을 맺었다.
우리 이혼해요.
나 좋은 남자 생겼어요.
얼굴을 꼭 봐야 이혼 도장을 찍겠다는 내 말에 순순히 그녀는 달려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 표정에 나 혼자 가슴아파했다.
서랍에서 인감을 꺼내는데 웃기게도 손이 떨렸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거실에 다시 나가 그녀 앞에 앉았다.
예전보다 많이 홀쭉해진 모습이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한 마디 했다.
“남자가 잘 못해주나 보네? 얼굴이 많이 헬쓱해졌어.”
비웃는 것으로 들렸는지 그녀의 표정은 굳어졌다.
젠장 이런 말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다른 말을 찾아 보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감기 걸려서 그래요.”
“아.”
차갑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아’ 그 한 마디만 나왔다.
우리는 이렇게 많이 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께는........”
“.............”
“내가 말씀 드릴게요. 뺨을 맞던, 걷어 차이던, 머리를 뜯기던......”
나는 그녀를 보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 한 구석에선 지금이라도 그녀를 잡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예진아.”
“왜요.”
“그 사람 많이 사랑해?”
집 앞에서 그녀가 하교할 때까지 기다리던 기억,
발렌타인 데이 때 혹시나 그녀가 주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동네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그녀와 마주치려 했던 기억,
부모님이 심부름 시켰다는 핑계로 집까지 찾아가 그녀의 부모님께 잘 보이려 했던 기억..
그녀는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는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을까?
군대에서 그녀의 편지를 밤낮이고 기다렸던 기억,
혹시나 이메일로 써주지 않을까 해서 고참들에게 눈치 보여 가면서 이메일을 체크했던 기억,
제대하고 돌아온 나를 수줍게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말하는 그녀를 꽉 안아줬던 기억..
지금 이 순간은 다 떨쳐 버려야 했다.
“나도 물어볼 거 있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런 나....”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안 원망스러워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얼어버린 나에게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데요?”
“앞으로 사적으로 그만 보자.”
내 일방적인 통보에 입술을 꽉 깨물고 날 노려보던 민아는 바들바들 떨며 내 뺨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얼얼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머리가 띵 해질 만큼 아팠다.
맞아도 쌌다.
그건 인정했다.
“사적? 하. 사적으로 그만 보자고요?”
“그래.”
“시작한 게 누군데! 그게 누군데!”
“미안해.”
“들켰어요? 그래서 그래요? 아니. 어차피 사모님 외국 갔다면서요. 돌아왔어요?”
“그게 아니라 내가 그만하고 싶어서 그래.”
“왜 사람을 갖고 놀아! 왜!”
“민아야.”
“야근 일부러 시켰다며. 내가 좋다며. 집사람보다 더 좋다며!”
귀가 아프도록 한참을 소리지르고 울던 그녀가 어느 순간 눈물을 그치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보며 나는 미친 사람 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나 어떡하면 좋을까.”
“오빠.”
“나 어떡하면 좋을까.”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잔뜩 어지럽혀진 서류 더미들,
쉴새없이 돌아가는 시계의 초침,
마스카라가 번져 있는 민아의 얼굴,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불이 다 꺼져 있는 회사 안.
모든 게 숨을 조여 왔다.
“민아야.”
그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 죽일 놈이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이제는 용서를 바랄 수도 없어.”
“오빠. 무슨 말..”
“미안하다고 돌아와 달라고 할 수도 없어.”
“지금 저한테 말하는 거에요?”
“나 어떡하지?”
가래 섞인 기침을 몇 번이고 토해냈다.
내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든 내 모습이 비참할 정도로 망가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젠 너무 늦어 버렸어....”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들락거리는 인터넷 카페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결국 그 남자를 보내주었다는,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의.
스크롤바를 더 내리다 보니 누군가가 달은 답변이 보였다.
그 답변은 놀랄 만큼 길었다.
-이런 말 해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love님이 받아들어야 할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봅니다.
제 경험이나 주위분들 경험을 보자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남자분의 향수가 남아서 일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런데 결국 이 답답함을 해결해 주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자님 글 보니 남자분을 참 많이 사랑하신것 같은데..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셔도 계속 생각 나게 됩니다.
그냥 받아 들이세요 이제 다른 여자의 남자라는 걸.
시간이 좀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이겨내시길 빌께요.
한번 그렇게 떠나간 사랑은 다시 돌아 오지 않습니다.
영화나 소설책같은 우연은 바라지 않으시는게 좋을것 같고요
필자님의 인생을 위해 지금 부터라도 새로운 다른 반쪽을 찾는데 노력해보세요.
그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맘이 편해지실겁니다.
새로운 사랑 꼭 성공하세요.-
읽고 난 후 씁쓸한 마음으로 창을 닫았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검은 바탕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무님 곧 있으면 회의 시작하는데요?”
신제품 개발에 대한 중요한 회의였다.
나는 부랴부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프린트물을 챙겼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회의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같은 시간...
그 똑같은 답변을 읽으며 울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첫댓글 결국은 후회할줄 알앗어요 쯧쯧 너무 잘 보고갑니다 건필해주세요
쿄쿜쿄쿜쿜쿄쿄쿄쿄쿄쿄쿄쿜ㅋ쌤통이에염흥흥여주만불쌍해영ㅠ_ㅠ
남자는 후회할 필요도 없어요!!!ㅡㅡ^
제 생각이지만.. 남자는 그냥 그 여자랑 사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 여주도 이미 떠났는데, 새로운 사랑까지 버릴 이유는 없는 것 같은 .. ㄲㄲ
아 진짜ㅠㅠ너무 슬퍼요. 나쁜놈이긴 하지만 슬픈건 어쩔 수 없는 듯 헐 ㅠㅠ
진짜 나쁜놈이네요ㅠㅠㅠㅠㅠㅠ
ㅠㅠ저 왼지 번외 꼭 보고싶네영 ㅎ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그렇지 후회할줄알았어....잘보고가요~~
이래서 있을때 잘해야하는듯ㅠㅠㅠㅠㅠㅠㅠㅠ
윗님 말대로 있을때 잘 해야할 듯.. 잘보고 갑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좋다
웬지 처음부터 남자가 나쁜놈이라는 사실 왓어! 흥..하지만 죄없는 여자는 뭐길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