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27일 ‘뉴스타파’라는 낯선 이름의 뉴스 방송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선관위의 투표소 무더기 변경 의혹을 다룬 첫 방송에서 와이티엔(YTN) 해직기자였던 노종면 앵커는 “뜻을 함께하는 수많은 언론인과 함께 죽어가는 저널리즘의 복원을 선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다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뉴스타파가 이후 달려온 세월은 한국 탐사저널리즘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과정임과 동시에 광고와 협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언론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최근엔 독립언론과의 연대와 협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교육-실무-창업을 논스톱으로 지원하는 ‘저널리즘스쿨’ 1기생을 모집(20일까지)하며 비영리 독립매체 인큐베이팅에도 나섰다.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기자와 피디 출신으로 뉴스타파의 ‘버팀목’이 돼온 김용진 대표와 최승호 피디를 지난 4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함께센터에서 만나 지난 10년을 돌아봤다.
중략
언론노조가 내준 회의실 하나와 ‘언론개혁’ 관련 사업에 쓸 수 있는 민실위 예산 2천만원이 전부였다. 용산전자상가에서 50만원씩 주고 사온 관광용 캠코더, 일명 ‘주먹캠’ 두대가 이들의 촬영 장비였다. 편집기로 쓴 맥북 한대는 중고로 구입했고 또 다른 한대는 첫 방송 뒤 응원차 찾아온 ‘노종면 기자의 팬’ 공지영 작가가 기증했다고 한다. 창고를 개조한 더빙실에서 내레이션을 읽고, 앵커는 프레스센터 18층 창틀에 앉아 진행을 하며, 프롬프터 없이 종이에 적힌 글씨를 보며 논평을 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가진 것’ 없이 시작한 뉴스가 일으킨 반향은 컸다. 이명박 정권 시기 공영방송이나 종편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강정마을, 4대강 공사현장, 삼성 백혈병 피해자의 모습에서 시민들은 ‘진짜 뉴스’를 발견했다. 유튜브가 대세가 아니던 시절, 첫 방송은 기술적 오류로 몇번을 재업로드했는데도 반년 만에 90만회의 누적 조회수를 기록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 애초 이리 긴 여정이 될 줄 몰랐다. 2012년 6월 문화방송에서 해고된 최 피디는 “곧 돌아갈 텐데라는 생각에” 시즌2 합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12월19일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직후 모든 게 달라졌다. ‘진짜 언론’을 살리자는 시민들 트위트가 번져가며 후원이 몰려들었다. 이듬해 초엔 2만명을 넘어섰다. 김 대표는 “해직자들도 자신의 노조에 돌아가 할 일들이 있고 대선 닷새 전 시즌2 고별방송까지 한 터였다. 하지만 이런 시민들 열망을 외면하면 죄를 짓는 것이란 말이 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013년 2월 김 대표가 대표를 맡고 최 피디가 앵커로 합류하면서 20명 규모의 회사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매체명)가 출범했다. 2013년 6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조했던 조세회피처의 한국인 명단 발표는 뉴스타파의 이름을 널리 각인시킨 계기였다. 김 대표는 수개월간의 보안 작업 끝에 이 보도 협업 파트너 언론사로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은 순간과 최 피디의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보도 당시 중국 정부가 한국 법원의 사실 조회에 입출경기록이 위조된 것이라고 답했음을 확인한 순간을 ‘가장 짜릿했던 기억’으로 꼽는다. “보수언론들이 반대 방향의 보도를 내고 있던 때였다. 국정원 때만큼은 뉴스타파의 ‘단독’ 기사를 내보내고 싶더라. 내가 직접 쓰겠다고 나섰다”고 그는 말했다.
후략
진짜 탐사보도하는 뉴스타파 벌써 11년이나 되었다니 대단하고 후원으로 함께하는 시민들도 대단하고 멋있어서 작년 기사지만 끌올
첫댓글 오 멋있다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