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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불면증 환자>
- 살인자의 고백
봄비가 슬슬 잦아들고 앙상한 가지 끝에 꽃잎 대신 빗방울이 흐드러지게 맺히었다. 추접스런 흙탕물을 튀기며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가는데, 요란한 엔진 소리만큼이나 거창하게 빗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볕이 구름 너머에서 그림자만 뱉어내고 있는 우중충한 날씨에도 털이 꼿꼿하게 서는 저린 추위는 가셔 있는 걸 보니 완연한 봄날이다.
남자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삐걱거리며 걸었다. 그다지 빗줄기가 굵직하진 않아서 우산을 얌전히 들고 다니는 이도 종종 보였고 아예 끈으로 묶어놓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가 빗속을 거니는 모습은 괜히 안쓰러웠다. 청년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지꼴. 더없이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도리어 거지가 들으면 화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덥수룩한 입매와 턱의 수염이 오랫동안 면도를 않은 듯 제각각의 길이로 멋대로 뻗쳐있고, 기름진 머리가 눌려 있었다. 신발 끝이 질질 끌릴 만큼 마른 몸에 신발 밑창이 너덜거렸다. 볼 살이 홀쭉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앳된 얼굴이 다 사그라지지 않았다. 때에 찌든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데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리 번화한 곳은 아니었지만 꽤 길이 널찍하여 행인들이 성기게 다니긴 했지만 저마다 우산을 펼치고 다녀 골목길 같은 갑갑함이 그의 시야를 옭죄고 있었다. 바람이 나긋하지만은 않은데 그렇잖아도 힘없이 비틀거리던 그가 눈앞에 몰려오는 빗방울에 눈을 앙칼지게 감았다. 꾹 감은 눈으로 검은 기미가 딸려 올라왔다. 웅덩이를 차며 걸어가는 그의 앞에는 어느덧 촌스러운 퍼런 색 페인트 투성이의 건물이 단단하게 담벼락을 세우고 서 있었다. 경찰서라고 부르기엔 영 시시한 감이 있는 파출소였다. 빗물로 반투명한 여닫이문 너머로 나른하고 묵직한 오후에 짓눌려 배를 쭉 내밀고 앉아 있었다.
청년이 바지 끝자락이 젖은 체 질척이는 신발을 끌고 파출소의 손잡이를 잡더니, 온몸을 기울여 힘겹게 문을 밀쳤다. 잠시 시선이 모아지긴 했지만 경찰들은 하나 같이 별반 대단할 일 없다는 듯한 태도로 청년을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무적인 어조가 청년을 불러들였다. 축축한 빗물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는 그가 그리 달갑지 만은 않은 듯 섣불리 미소 짓지는 못한 그 표정이 어정쩡하다. 저쪽 구석을 보니 걸레질을 하던 아줌마가 아주 대놓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보다는 조금 낫지만 대체로 표정이 어둡다. 딱 비오는 날씨 꼴이다.
“무슨 일이세요?”
먼저 물은 말을 못들은 건지 아니면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남자가 거슬렸는지 같은 질문이 다시 날아들었다. 남자는 굼뜬 동작으로 어느 쪽에 답을 해줘야 할 지 망설이는 듯 시선을 번갈아가며 질문자들에게 맞추다가 어정쩡하게 중간쯤을 보고 답했다.
“자, 자… 자백하러 왔습니다.”
“자수요?”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수정해주었지만 청년의 상기된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구부정한 어깨로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에선 어떤 기백도 결의도, 하다못해 후련함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뭐 하러 자수 같은 걸 하러 왔는지, 하는 망설임을 짧은 순간에 여러 번 얼굴로 내비치고 있긴 한데 그렇다고 도망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웬 정신 나간 놈이 이 난리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행색과 행동은 기괴했다.
그렇지 않아도 경찰들에게는 가뜩이나 피곤이 겹쳐오는 나날이었다. 나름대로 공무원 간판이 지켜주던 철밥통에 태클 거는 정치인이 확 늘었고, 한동안 잠잠하던 미해결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여론이 최근에 비슷한 영화가 개봉하면서 다시 들끓었다. 때 마침이라 해야 할 지, 그간 경찰이 지목해온 용의자가 헛다리짚은 걸로 마무리 되면서 이제 단순한 비난 대상이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 되던 참이었다. 비난 받는 일도 과히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지만, 비웃음을 사는 일은 나름대로 권위를 끼고 일해야 하는 경찰들에게 참 버거운 일이었다. 허구한 날 경찰서에 들이닥쳐서는 “제가 범인입니다!”하는 퍼포먼스인지 과대망상인지 모를 자백을 들어주는 것도 진저리났다.
한동안 뜸하다 싶더니 또 나타나고 말았다. ‘자수’하겠다는 얼간이가. 또 어디 뉴스에서 본 내용을 주절주절 읊으면서 반쯤은 지어낸 얘기를 더듬더듬 뱉어내지 않을까. 진짜 범인은 아닐까 하는 미묘한 긴장이 짜증스런 표정 틈새에 묻어있다. 경찰은 비오는 날 들이닥친 청년을 한차례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다, 하는 판단이 드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지저분하긴 해도 전반적으로 곱상하게 생긴 상이 개미 한 마리 어찌 못할 상이었다. 웬 샌님이 시시한 절도라도 했던가, 어디서 맞짱이라도 뜨고 와서 설레발치나 보다 싶었는지 형사들은 하나 둘씩 관심을 꺼뜨리고 있었다.
“어, 어제 있었던 토막살인….”
청년이 몸이 찬지, 긴장한 탓인지 턱을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더듬거리는 말투가 거슬리던 차에, 몸을 배배 꼬아대니 알아듣기가 한층 더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청년의 발음에서는 틈틈이 낯익은 이질감이 들리곤 했는데 영어 발음이라도 하는 양, 혀를 굴리는 듯 했다. 일단 도시라곤 해도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지역에서 풋내 나는 놈이 꼬부랑 소릴 해대는 꼴이 딱히 신뢰가 가지 않음은 물론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딱 꺾이던 찰나였다. 다들 슬슬 그의 영양가 없어 뵈는 자백에서 눈과 귀를 차례로 떼고 하던 일을 하려던 때에 어제, 하는 단어와 ‘토막살인’하는 단어만은 정확한 발음으로 형사들의 달팽이관을 때렸다.
“어제?”
거의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던 질문들 가운데, 그 짧은 물음이 가장 청명하고 간결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청년은 대충은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발생이 어제라고 추정 중이기는 하고 있지만 시체가 발견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다. 아직 언론에 알려진 바도 없었고 소문조차 퍼질 틈이 없었다. 허위 자수가 급증하고 있긴 하다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알려지지도 않은 사건의 범인이라고 덜컥 찾아오니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일로 와봐.”
냉큼 심문실로 끌고 갔다. 정적 와중에 빗소리가 요란하다. 침묵이 습기만큼이나 공기를 짓누르는 가운데, 심장소리만 두근거리고 있었다.
심문실로 들어간 청년은 담담한 목소리에 느린 어조로, 기름기 섞인 발음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가만 듣던 심문자는 점점 확신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여기 써봐.”
결국은 청년의 더듬거리는 말투를 알아듣기가 영 버거웠는지, 심문 내용을 기록하던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청년은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쓱쓱 글을 써 내려나갔다. 다시 받아든 종이에는 직접 적은 일부 대화와 청년의 날렵한 글씨체가 둥둥 떠다녔다.
저는 올해로 스물다섯 살 먹은 대학생입니다. 어릴 적에 받았던 인대 수술 덕에 군대는 면제 받았지만,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던 데다가, 작년까지 어학연수를 갔다 왔던 터라 아직 졸업하지 못하고 3학년입니다.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고 있으나 휴학 중이고 요즘은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요? 잘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 또한 별로 제정신인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 아니어서요. 이런 말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되새겨 보아도 - 되새기고 싶은 기억은 아닙니다만 - 어렴풋하기만 하고, 정황을 정확하게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뒤통수를 내리쳐서 죽인 후 전자 톱으로….
아, 이런 얘기는 제가 저지른 일이지만 그다지 내뱉고 싶진 않군요. 차후에 다시 좀 더 진정이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살해한 남자와는 별다른 관계가 아닙니다. 이건 스스로 생각해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믿어주실 지가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 남자는 처음 보는 남자였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얼굴도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아주 초면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잘은 모르지만, 그리 넓은 동네도 아니고,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긴 했지만 징그럽게도 이 동네에 오래 살았거든요. 이사란 걸 가본 기억이라고는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에 했던 한 번 뿐이거든요. 그러니 그 아저씨도 이 동네 사람이라면 아주 못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 죽였는가, 하시면 그도 사실 그다지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라, 이건 뭡니까? 일단 해보라니요, 전 이런 검사를 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해봤거든요. 어디서라뇨? 이런 테스트는 인터넷에 검색 한 번으로도 넘치도록 찾을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한 육 개월 전부터 유행 아닌 대유행이 있지 않았습니까. 사이코 패스 테스트, 맞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이미 테스트를 알고 있고, 마음먹기 따라서 사이코 패스로 판정 받을 수도 있고, 정상인으로 판정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미 살인죄를 고백하려는 마당에 그런 시시한 것을 숨겨 무얼 하겠습니까. 저는 그때 정확한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이코 패스가 맞습니다. 말 잘하는 것이 뛰어난 재능으로 느끼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진은 뭡니까? 어느 쪽이 진짜 웃고 있는 거냐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이 테스트 또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답 또한 알고 있지요. 이쪽 여자가 진짜로 웃고 있는 것이 맞지요? 이런 흔한 테스트는 어지간하면 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그 테스트란 것을 접한 건 1년 전쯤입니다. 그 왜 한참 난리였지 않습니까. 연쇄 살인 사건이었나, 강간 살인이었나. 토막 살인이었던 것도 같군요. 매일 같이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던 살인범의 눌러쓴 모자는 아직도 잊혀 지지 않을 지경입니다. 마침 이전에 비슷한 사건이 두어 개 터졌을 때는 그래도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관심이 조금씩 쌓이다 폭발한 것처럼 격렬했습니다, 살인마에 대한 관심은요.
이래봬도 정치에도 관심이 많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꽤나 깊이 생각하는 편이어서 토론이나 시사 프로그램은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었는데 거기서 처음 ‘사이코 패스’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저만의 지식이었는데 어느덧 널리 펴져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는 문제가 되었더군요, 사이코 패스란 거. 유행이란 무서운 겁니다. 옷, 모자, 패션, 그런 것 말고도 살인범과 살인범을 규정짓는 방식마저 유행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행했던 건 질문 몇 개로 이루어진 테스트만이 아니었지요. 전기 충격기 같은 것도 꽤나 성행했습니다. 실제로 같은 과 여자 친구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호신용 전기 충격 기를 사거나, 주문해놓았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강한 척 하긴 했어도 저 또한 텁텁한 밤에 골목을 걷자면 섬뜩한 감각이 목을 타고 등뼈를 시리게 하는데 침이 꼴깍 넘어갑디다. 여자 애들이야 오죽했을까요. 더구나 그 살인마는 여자만 노렸지 않습니까? 공포를 넘어 경악스러울 만하지요.
아,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빠졌군요. 아무튼 그런 검사가 유행했었죠. 질문을 늘어놓고 정상적인 답변과 사이코 패스의 답변을 구분해놓는. 저도 우연히 그 검사를 접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실은 제가 눈치가 상당히 빠른 인간입니다. 대강 질문들을 훑어보니, ‘남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답변’이란 게 눈에 보이더군요. 끽해야 OX 검사에 불과했으니 결과란 게 빤히 들여다보일 만도 했죠. 검사지의 질문이란 것도 참 어정쩡해서 ‘말을 매우 잘하는 것이 꼭 필요한 재능이라 여기십니까?’ 따위였죠. ‘매우’, ‘꼭’ 따위를 보고 있자니 초등학교 도덕 시험이라도 치는 기분이더군요. 아무튼 저에게 ‘정상인’으로 나오는 과정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사이코 패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죠.
하지만 질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까 조금씩 미심쩍은 생각들이 피어오르더군요. 질문 하나, 하나가 제가 도출한 ‘정답’과는 여러 가지로 어긋나는 저의 본심을 들추어내었습니다. 막판까지 도달했을 때의 기분은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충격적이라는 말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튼 저는 이미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이코 패스’라는 사실을요.
저의 불면증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불면증이란 게 참 피곤한 것이더군요. 그냥 잠이 달아나는 것뿐인 줄 알았더니, 눈꺼풀에 내려앉은 피로는 도무지 가실 줄을 몰랐습니다. 잠이 안 오는 게 아니라,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더군요. 불면증이란 말이 잠을 못 잔다는 병인 건 알면서도 막상 그렇게 당하고 보니 또 다르더군요.
그 해괴한 테스트 이후에 잠이 멎어버렸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고 있는 저이고, 어떤 것이건 간에 제 생활을 침범하는 불화가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애써 잠을 청해보았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면제의 힘을 빌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할 일 없는 휴학생 신분이고 놀고먹는 백수나 다름없던 지라 그냥 퀭한 상태로도 살만 하다 싶어 그럭저럭 지냈지요. 사실 당시에 제 잠을 훔쳐간 것은 너저분한 테스트만은 아니었습니다.
여느 아들들이 다 그렇듯이, 요즈음의 저 또한 아버지와 냉전 중이라고 부를 만한 대치 상황입니다. 철없는 아들의 반항이라고 욕하지 않으시면 좋겠군요. 아버지들이 아들들의 주관을 반항으로만 보듯이, 젊은이 또한 아버지의 개똥철학이 구닥다리로 느끼게 되니까요. 이 진술서를 아버지가 보실까 두렵기도 하군요. 은근히 아버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이런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와의 냉전은 시답지 않은 자존심 싸움입니다. 정말 별 사소한 걸 가지고 일일이 서로를 물어뜯고 나니 지칠 법도 한데 쉽지 않더군요. 왜 갑자기 아버지와의 싸움 얘기를 꺼내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짜증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게 꽤나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쯤 전이었지 싶군요. 불면증이 절정에 치닫던 때라 눈꺼풀을 들어올리긴 했는데, 여전히 시야가 컴컴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화장실에 좀 들락날락 해보고, 찬물 몇 잔을 들이킨 후에야 시계를 봤을 때의 시각이 2시 반쯤이었으니 잠을 깬 것은 불과 2시 정도, 아마 1시간 조금 더 잤을까 싶은 짧은 수면 시간이었습니다. 딱히 할 일은 없었고, 불이라도 밝히고 책을 읽기에도, 컴퓨터를 켜서 게임이라도 하기에도 영 어정쩡한 시간대인 것이, 평소에 잠을 깊이 자던 제게는 오밤중의 그 막막함이 너무 높고 단단하게 여겨졌습니다. 어둠 속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자취방이었다면 편의점에서 맥주나 사다 시간을 안주삼아 술이나 홀짝일까, 하는 다소 청승맞은 방안이라도 고려해보겠지만, 고향집에서 그런 행동은 영 개운치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범생이로 살아온 제게, 그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고 제 스스로도 고향에서의 제 역할은 얌전한 범생이일 뿐, 어설픈 낭만주의자라거나 애주가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딱히 할 일 없이 베란다에도 나가봤다가, 냉장고 문도 열어봤다가, 화장실에도 기웃거리다 했는데,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꽤 귀에 거슬렸는지 아버지가 신음소리 비슷하게 ‘우으음’하는 소릴 내셨습니다.
평소에도 새우잠을 주무시는데다, 밤 귀는 또 유별나게 밝아서 종종 느닷없이 일어나선 불평을 하시곤 했지요. 그날도 냅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선, 잠에 깨어 서성이는 제게 호통을 치셨지요. 너 이 새끼, 안자고 뭐해, 또 컴퓨터 켰냐, 자, 얼른, 하는 식이었습니다. 부모란 존재는 자식을 늘 어린애로만 보게 되니까요. 아무튼 아버지는 그렇게 종종 욱하는 성질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아니 제가 아버질 닮은 것이겠지요. 요즘 같이 아버지와 한창 소원할 때면 아버질 닮은 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자기혐오감이 마구 솟아올라 눈물을 짜내곤 합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서글퍼진다고 해야 할까요, 혹은 존재의 근원을 부정한다는 게 그런 기분일까요.
사실 그 정도의 불쾌감이나 짜증은 종종 느낍니다. 설령 아버지, 아니 가족, 혹은 흔히 ‘감히 그래서도 안 되는 분’들께도 별 수 없이 짜증내고 혐오하는 게 인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변명할 생각도 없지만은, 당연한 인간다움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서 그쳤어야 했습니다. 물론 욱하는 마음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날부터 꾸게 된 꿈은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이미 언급했으나 저는 잠을 깊이 자는 편이라 꿈을 잘 꾸지 않습니다. 간혹 꾼다하더라도 기억이 매우 흐릿하여, 대략적인 인상 정도나 기억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인물이라든가 숫자라든가 하는 것들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이 얘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너는 꿈으로 로또 당첨번호 따위 점지 받기는 글렀다며 웃더군요. 더군다나 불면증 같은 골치 아픈 병을 맞이했으니 꿈꿀 일 같은 건 영영 날아 가버릴 줄 알았지요.
또 이야기가 새고 말았군요. 죄송합니다. 침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는 글이라 차분하지 못하지만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불면증 환자가 꿈을 꾼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어쩌면 제 병은 불면증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정확한 진단명을 받은 것은 아니니 불확실할 수밖에요. 저는 불면증이 맞다고 여기지만, 밤에는 도무지 오지 않던 잠의 유혹이 깨어있어야 할 낮에는 솔솔 불어와 저를 꾀어냈습니다. 막상 자리에 누우면 달아나버리고, 일어나서 돌아다니자면 다시 찾아오는 얄궂은 스토커 같은 칙칙함과 위화감을 몰고 다니며, 잠은 제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간간이 졸기도 했습니다만 하나 같이 깊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서 꿈이라곤 모를 것 같던 제가 잠깐의 환상 속에서 본 것들을 세세하게 기억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친구들이 해준 얘기처럼 그저 로또 당첨 번호나 불러주는 꿈을 기억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할 일 없이 책상에 걸터앉아 시시한 소설이나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50페이지나 읽었을까 싶을 때, 깜빡 잠이 들었는지 내용은 가물가물하고, 선명한 환상만이 뇌리에 죽죽 빗금으로 그려졌습니다.
도륙, 살육. 어느 것이 어감 상 더 잔혹하고 충격적인가 때문에 잠시 고민했습니다. 꿈속의 기억은 상당히 선명하고도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쇠망치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사람의 골을 깨부수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제 모습이 하도 천연덕스러워서 지금도 흠칫 놀라게 됩니다.
제가 꿈에서 누굴 살해했는지 아십니까? 짐작하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처음엔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스멀스멀 기어와 심장을 틀어쥐는 그 기분 나쁜 꿈은 경악스러울 만치 선명해서 쉽사리 잊을 수도 없었을 뿐 더러,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별 수 없이 알게 되더군요.
제가 꿈에서 끝도 없이 머리통을 바스러뜨리고 그도 모자라서 시체의 몸통을 걷어차고, 육신을 토막 낸 그 시체는 아버지였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를 전율이 끌어올라 갈비쯤이 욱신거립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감각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딱 맞을 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입술을 꾹 깨물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마를 한 차례 훑었을 뿐인 소매가 흥건한 식은땀으로 묵직해졌습니다. 오한이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와 혈관을 타고 손끝으로 퍼지는 데, 경악스러운 짜릿한 감각이 다시 심장으로 흘러들어 저를 파먹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펜을 뗐는지 모릅니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간신히 그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왠지 쿵쾅거리는 박동 소리가 쉽사리 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고 보니,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나 침착한, 흥분을 간단히 가라앉힌, 당연하다는 것처럼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흥분을 꾹 눌렀다가 다시 꿈의 형상이 눈꺼풀의 그림자에 슬쩍 비치기라도 하면 다시 흥분을 눌러 담았습니다. 그리고 미식가가 요리를 음미할 때처럼 천천히 끌어 오르는 그 전율을 즐겼습니다.
가급적 아버지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를 믿고 싶긴 했지만, 환상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이코 패스입니다. 천인공노할 만한 죄를 저지르는 꿈을 꾸고도, 그 심중의 남모를 충동을 꺼내놓고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금세 거기에 적응하여 매캐한 죄의식을 즐기는 사이코 패스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살인이라도 하고 감빵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인생을 계획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남들 사는 데로 대강대강 살 계획이 뿌리내리고 있는 제게, 그런 중대한 오차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일탈이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집을 뛰쳐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와서야 어렴풋하게 그 남자의 인상이 기억이 날 듯 합니다. 그 남자, 꽤나 수염이 덥수룩하니 구부정한 어깨에 팔자걸음 모양새가 아버지와 엇비슷하였습니다. 공사판이 옆에 있었던지, 녹슨 쇠파이프가 군데군데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적당한 길이의 파이프를 하나 짚어 들었는데 생각보다 묵직해서 휘두르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녁인데다 인적도 드문 곳이었습니다. 저는 걷다 지쳐 수시로 꿈과 현실을 드나들었는데 이제 뭐가 뭔지도 혼돈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좀 정신을 차려보니 보다 색다른 흥분이 치솟았습니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육신의 피로가 허리를 짓눌러오고, 팔다리가 저려왔습니다. 저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동안 꾸역꾸역 쌓아왔던 흥분과 짜릿함, 그리고 피로가 한꺼번에 어떤 선을 끊고 밀려나와 저를 덮치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지금도 희미하긴 하지만 손에 걸리는 감각만큼은 분명합니다. 피가 질척이던 그 인상도….
경관은 거기까지 보고는 읽기를 그만두었다. 청년의 길고 긴 진술서를 읽은 후에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은 그저 하품하다 나온 것일 뿐이었다. 권태, 그것이 찔끔 눈꺼풀 사이로 새어나왔다.
“잘 봤네. 덕분에 시간은 좀 죽였어. 이제 그만 가게. 안녕히.”
청년은 납득이 안 된다는 듯이 경관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경관의 자세는 꼿꼿하고 강건했다. 떼를 써봐야 소용없다고 여겼다.
“이건 용서인가요?”
“그런 게 어딨어, 우리 같은 힘없는 말단한테. 그냥 판명이 났을 뿐이야. 가서 수면제를 먹더라도 잠이나 자게나. 아직 많이 피곤한 모양이야. 그리고 다시 오면 진짜 공무 집행 방해죄로 쳐박아버릴 테니 그리 알고 오지마. 앙?”
협박조다. 청년은 여전히 갑작스럽게 변한 경관의 태도가 내키지 않았다.
“왜…?”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 말을 듣긴 한 건지 청년을 보지도 않고 경관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왜긴 왜야, 인마. 범행에 쓰인 건 쇠파이프도 아니었고, 시신이 토막난… 에라이, 씨. 그런 건 왜 물어봐, 인마. 그냥 자네는 과대망상증이야. 꿈이라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
청년은 꽤나 반항적인 눈초리로 그렇게 말했다.
“참나, 웃기는 놈일세. 네가 살해한 사람은 50대의 중년 남자로 짧은 머리에 조금 작은 키라고 했지?”
“예.”
“피해자는, 여자야.”
그 말만 남기고 경관은 홱 고개를 돌렸다. 다시 사무적인 손짓으로 서류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청년은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첫댓글 메피스토펠레스님 글은 항상 재밌네요 ㅋㅋ 마지막에 청년 머리 띵 하겠군요....ㅋㅋ
띵- 하다라 딱 맞군요~_~
저도 띵~한데요 ㅎㅎ
흠... 좋은 의미라 믿습니다~_~
글진짜 잘쓰시는듯! 다음글 기대할께요 ㅋㅋ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 글은 꽤 늦을 테니 지난 글이라도....ㄷㄷ
아 좀 어려운말들이 만은거 같앗지만 머리가 아프지만 재밋네요 이 소설쓰신 분 아이디도 어려워염 ㄷㄷ;
필명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이름이랍니다~_~
헐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다행이네요 ㅋㅋ 청년입장으로썬 ㅋ 색다른ㄴ 소설이였어용 ㅋㅋㅋ
색다른... 그런가요~_~ 감사합니다.
마지막 청년의 느낌은..뭥미.. 잘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