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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젊은 시절, 부산의 변두리에 있는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교사들은 輪番(윤번)으로 숙직을 하였다. 낮에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 학교에서 숙직근무를 했다.
숙직하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돌아왔다. 말이 숙직이지 숙직실에서 그냥 자는 것이었다.
규정상으로는 밤새 매시간 순찰을 하면서 자지 말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순찰은 하지 않고 잠만 잤다.
當直日誌(당직일지)에는 순찰을 한 것처럼 시간과 순찰장소를 기록하였다.
숙직을 하고 다음날 낮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계속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관행은 당연한 것으로 묵인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잠만 자는 숙직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늦게 까지 술을 마시거나 私務(사무)를 보다가 통금시간 가까이 되어서 학교에 돌아와 잠을 잤다.
이렇게 하는 것도 양호한 편이었다. 많은 교사들은 아예 숙직도 하지 않고 장부에는 숙직을 한 것처럼 허위 기록만 하였다.
학교 위치가 시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교육청 복무단속반이 밤중에 학교에 들이 닥치는 일은 아예 없었다.
교장 선생님의 집도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밤에 교장이 학교에 불시에 들르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교사들은 마음 놓고 ‘농땡이’를 부렸다.
더구나 50대의 야간 경비 아저씨도 술을 마시고 잠에 떨어지거나 교사들이 숙직을 하든 말든 일체 말이 없었다.
이처럼 숙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되었다.
가끔씩 복무기강확립 공문이 내려오면 교감이 공문을 읽어주며 숙직근무를 철저하게 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교사들에게는 馬耳東風(마이동풍)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판’ 숙직근무에 큰 변화가 오게 되었다.
경비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40대 초 쯤으로 보이는 경비원은 키가 크고 다소 마른 편이었고 검은 색으로 염색한 야전상의를 입고 있었다.
새 경비원이 부임한 첫날부터 소동이 났다. 당일 숙직교사가 방과 후에 시내에 가서 모임을 마치고 밤 11시 경에
학교에 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숙직일지를 작성하려고 보니 자신이 지각한 사실이 그대로 기록이 되어있었다.
순찰도 하지 않고 밤새 잠만 잔 것도 기록되어 있었다.
교사는 ‘前에는 이런 일이 결코 없었다면서 定時(정시)에 도착하여 규정대로 순찰하였다’고 기록을 수정하라고
지시하였지만 경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숙직교사는 화까지 내면서 재차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경비는 묵묵부답이었다.
숙직교사는 교감과 교장에게 불려가서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교장은 서무주임을 시켜서 경비에게 숙직교사의 지각사항은 그대로 두고 순찰은 한 것처럼 일지를 再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숙직근무를 하고 다음 날 계속 근무를 하여야 하는 학교 현장의 특수 사정 때문에 밤에 순찰을 돌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신임 경비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규정에 따라 순찰을 하였다.
숙직교사의 야간 순찰사항에 대한 ‘허위’ 기재는 묵인하였지만 勤怠(근태)사항만은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일지에 기록하였다.
교사들은 처음에는 ‘사람이 조금 모자란다’ 또는 ‘건방지다’라며 경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면서 점점 경비를 어렵게 생각하고 경비를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어쩌다가 한 잔 마시고 지각하거나 숙직을 빼 먹게 되면 그 사실이 그대로 公簿(공부)인 일지에 기록이 되고
그러면 근무평정에서 불리하게 되거나 교육청 복무감사에서도 꼼짝없이 당하기 때문이었다.
교감이나 교장에게 ‘찍힐’ 가능성도 있었다.
다소 융통성 없어보이는 신임 경비 때문에 교사들의 숙직근무는 정상화되고 학교의 밤은 보다 더 안전하게 되었다.
교육감도 아니고 교장도 아닌 최말단의 볼품없는 경비가 학교의 숙직질서를 바로 잡은 것이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경비를 최고학부를 나오고 콧대가 센 교사들은 교장보다 그를 더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교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규정(법)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
이것이 ‘미천한’ 경비를 교장보다도 더 권위있는 학교의 어른으로 만든 것이다
첫댓글 표현이 좀 그러네요
"미천한 경비"라는 단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