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로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17일 동안 전투
결국 밥 대신 빵 먹고 싸운 관군의 승리로 끝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무대가 된 1877년의 일본 세이난(西南) 전쟁.
‘서양문물 도입에 반발한 사무라이들의 반란’, ‘조선침략을 주장한 정한파가 정계에서 밀려나면서 관군과 충돌한 내전’ 등등 전쟁 성격에 대한 평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다. 어쨌든 전쟁의 결과로 260년에 걸친 일본 사무라이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세이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다하라자카(田原坂) 전투다.
1877년 3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관군과 반군이 사투를 벌였다. 양측이 모두 30만 발의 총탄을 발사했고, 1만2000명이 전사하며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인은 여럿이지만, 병참 측면에서는 단팥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년과 달리 3월임에도 수시로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이레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사무라이 반군은 폭우 때문에 제때 밥을 지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굶주린 채 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관군은 허기진 채로 전투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밥 대신 단팥빵 등 일본인의 입맛에 맞도록 개량해 만든 빵을 먹으며 싸웠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관군은 단팥빵의 원조인 기무라 제과점을 비롯한 3개 제과점에 병사들이 먹을 빵 23만7063근을 주문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4만2000㎏이다. 병사들의 간식이 아닌 휴대용 전투식량으로 전통적인 주먹밥 대신 빵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비가 계속 내려도 사무라이 반군과 달리 관군은 빵을 먹으며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일본 관군이 빵을 먹고 싸운 전쟁은 또 있었다.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868년의 보신(戊辰) 전쟁이다.
메이지 일왕이 일본을 지배했던 도쿠가와 막부에 권력 반환을 요구하자 수구 막부 세력이 반발해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이때도 관군은 막부가 있는 에도(도쿄)를 공격하러 갈 때 제과점에 장기 보관이 가능한 검정깨를 박은 빵 5000명분을 주문해서 전투식량으로 삼았다.
보신 전쟁에서 빵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역시 관군의 승리였다.
일본군은 왜 이렇게 빵을 전투식량으로 삼았을까? 서양을 동경했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일본이 전투 중인 군인들이 먹을 음식으로 빵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시작된 1840년 무렵이었다.
일본은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서양 열강의 공격에 대비해 나라를 지킬 방어책을 가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전반적인 전쟁대비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병사들의 식량 문제도 검토 대상의 하나가 됐다. 당시 일본군의 식량은 서양 군대로부터 조롱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옛날 말 타고 활과 창으로 싸울 때라면 몰라도 현대전에서 전투 중에 밥을 지어 먹겠다고 불을 피우면 위치가 노출돼 총알이 날아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먹밥을 싸서 가지고 다니자니 부피 때문에 휴대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금세 쉬고 겨울에는 꽁꽁 얼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부에서는 군용 식량으로 빵을 이용하기 위해 기술자를 지원하면서 빵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것인데 1842년 4월 12일, 에가와라는 기술자가 처음으로 일본식 빵과 이 빵 반죽을 구울 수 있는 제빵 오븐을 개발했다.
에가와가 처음 만들어 군에 납품한 빵은 프랑스 바게트처럼 딱딱하고 바삭바삭한 형태였는데 맛은 없었지만 먹으면 배는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어 도넛처럼 생긴 빵이 나왔는데 병사들은 이 빵을 허리에 끈으로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후에도 군대를 중심으로 빵을 개량하려는 연구가 계속됐다. 그리고 그 기술 중 일부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도 즐겨 먹는 단팥빵이다.
단팥빵은 서양 빵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도록 개발한 것으로 서양과 달리 밀가루에다 효모를 넣지 않고 주정을 넣어 발효시켰다.
촉촉한 것이 특징이며 여기에다 고기와 야채 대신 단팥을 소로 넣고 찌지 않고 서양 빵처럼 오븐에 구웠다.
기무라라는 사람이 1869년에 처음 만들어 제과점을 차렸는데 여기서 만든 빵이 8년 후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 전쟁 때 관군의 전투식량으로 공급됐다.
크림빵도 만들어진 과정은 비슷하다. 일본군이 전쟁에 쓸 빵을 연구하던 중 서양 사람들이 비스킷 사이에 잼을 발라 굽는 것을 보고 단팥빵에 단팥 대신 잼을 넣어 만든 것이 잼빵의 탄생이다. 그리고 이후 잼 대신에 크림을 넣은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크림빵의 효시다.
<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